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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3  통권 277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1506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20세기 초 중국 개신교회

의화단전쟁의 피해
19세기 말을 향하면서 새로운 선교회와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도착하여 선교 역량을 보태었다. 1896년 선도회(宣道會,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MA)의 리브스(C. H. Reeves) 선교사 부부가 광서성에서, 1898년 미국 북장로회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이 산동성 청도(靑島)에서, 1898년 독일 신의종(信義宗, Lutheran Church)의 파송을 받아 도착한 쿤즈(Kunze) 선교사 등이 산동성 청도에서 사역을 시작한 바 있다. 그러나 의화단전쟁 중 중국 개신교회도 막대한 피해를 봤다. 이는 가톨릭교회에 비하면 적었으나 역시 심각했다.

선교사 188명이 순교하였고, 신자 5,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교회 건물의 3/4가 파괴되거나 소각 또는 손상을 입었다. 특히 대도시나 연안 지역보다는 내륙 깊숙한 지역으로 들어가서 선교하던 선교 거점들이 더 큰 피해를 봤는데, 이는 내지회 소속 선교사들이 가장 많은 58명이나 순교 당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인명 피해뿐만 아니라 개신교회가 선교 과정에서 역점을 두었던 학교와 의료 시설들의 피해도 컸다.

개신교회의 양적 성장
의화단전쟁을 거치면서 입은 충격과 손상이 컸지만, 신축 조약과 후속 조약들을 통한 기독교 선교 보호와 신앙 자유의 보증이 이루어지면서 개신교회가 다시 선교 역량을 회복하여 교회의 양적 성장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1896년 통계 자료에서 외국 선교사(목사) 389명, 외국인 평신도 선교사 294명, 외국인 선교사 합계 683명, 중국인 목사 252명, 중국인 선교 보조인력(전도인, 교사 등) 4,777명이었던 것이 1906년 통계에서는 외국인 선교사 3,833명, 중국인 목사 345명, 중국인 선교 보조인력 9,761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중국인 여자 전도인은 1889년 180명이던 것이 1910년에는 1,789명으로 통계 자료가 보고될 만큼 증가했다.

중국인 평신도 수는 1893년 55,093명이던 것이 1900년에 60개 교단, 489개 선교 거점, 95,943명으로 증가하고, 1906년에는 82개 교단 신도 수 178,251명으로 괄목할 만큼 증가했다.

개신교회의 교육 선교
의화단전쟁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은 뒤에도 중국 개신교회는 대학 교육과 의료선교에 여전히 역점을 두었다. 미국 감리회는 1900년 선교사 알렌(Young J. Allen, 林樂知, 1836〜1907) 등의 주도하에 강소성 소주에 동오(東吳)대학을 세웠는데, 이는 1950년 이후 현재의 소주(蘇州)대학, 화동정법(華東政法)대학, 상해재경(上海財經)대학으로 분립 발전하는 뿌리가 되었다.

산동에서는 1904년에 미국, 영국 그리고 캐나다 등 3개국 14개 선교단이 공동으로 자금을 마련하여 제로(齊魯)대학이 개교하였고, 1950년 이후 산동사범(山東師範)대학, 중국약과(中國藥科)대학, 산동재경학원(山東財經學院), 산동(山東)대학, 산동농업(山東農業)대학, 산동대학의학원(山東大學醫學院), 산동중의약(山東中醫藥)대학, 태산의학원(泰山醫學院) 등으로 분리 편입 또는 개교하는 토대가 되었다.

미국 남북침례회는 연합하여 1905년 강소성 상해에 호강(滬江, Shanghai Baptist College)대학을 설립하였으며, 1905년에는 사천성 성도에서 비치(Joseph Beech), 오마르 레슬리 킬본(Omar L. Kilborn, 啓爾德)과 데이비슨(R. T. Davidson) 등 선교사들의 주도로 각 교단이 힘을 모아 화서협화(華西協和)대학이 개교하였다.




아울러 중국선교에 대한 각성과 새로운 선교 방법론에 대한 천착도 이루어졌다. 가톨릭교회가 의화단전쟁 피해 보상을 적극적으로 요구한 것과는 달리 중국 개신교회는 외교단 주도의 피해 보상 요구에 적극 가담하지 않고 자진하여 손실을 감내하며 오로지 선교에 매진하는 기류가 돋보였다. 

그리고 선교 방법론과 관련하여 비교종교학과 인류학 등도 선교에의 접목이 시도되었고, 중국 근대화를 위한 기여 방법에 대한 숙고도 이루어져서 해외 유학생 파견 등 정부 정책의 추진에 대한 협조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이러한 중국에서의 환경 변화와 더불어 각국 개신교회의 중국선교 지원과 선교사 파송이 급증하였다. 예일대학 외국선교회의 경우 1902년 대표자를 파송하여 재중국예일선교부(Yale-in-China)를 조직하여 병원과 학교를 경영하면서 많은 중국선교에 중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 초대 소장 에드워드 흄(Edward H. Hume)의 열정적인 헌신 아래 라투레트(Kenneth S. Latourette)와 같은 중국교회사 전문가들과 존 모트(John R. Mott) 등 청년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대거 배출되어 중국선교의 지평을 확장하였다.  ♣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오마르 레슬리 킬본(Omar L. Kilborn) (아래) 화서협화(華西協和)대학 [출처 | 위키피디아]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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