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국교회를 떠올릴 때마다 한 선교사가 생각이 나곤 했다. 전쟁, 기근, 내전, 외세 침략 등 혼란의 시대에 있는 중국을 떠나지 않고 자기 몸이 상해가면서도 끝까지 복음을 전했던 선교사다. “순종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에 기초한다”라는 삶을 잘 보여주었다. 오늘의 중국 크리스천들에게 환경을 초월한 순종의 삶을 상기시킨다. 최근 미국 출장을 갔다 오다가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그의 삶을 담아낸 영화를 보게 됐다. 1924년 파리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에릭 헨리 리들 선교사(Eric Henry Liddell)의 이야기를 담아낸 <불의 전차>. 승리의 영광보다 십자가의 길이 더 가치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준 에릭 헨리 리들 선교사와 가상인터뷰를 진행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아름다운 증언을 상상해 보았다.
■ 에릭 헨리 리들 선교사님,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 만나게 돼 기쁩니다. 과거 영화 <불의 전차>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가슴이 벅찼는데, 최근 우연히 다시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순간은 역시 파리올림픽 결승선일 겁니다. 그날, 기분이 어땠는지요? 에릭 헨리 리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그날의 함성과 발자국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결승선에 들어서는 순간은 제게 오히려 고요했습니다. 사람들은 47.6초라는 세계 신기록과 금메달을 본다면 저는 그 이전의 시간을 기억합니다. 주일 경기 불참을 결정했던 바로 그 순간이죠.
■ 주일 경기 포기는 선교사님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또 다른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마음속에서 싸움이 치열했을 것 같은데요. 에릭 헨리 리들 맞습니다. 저는 운동선수였고, 올림픽 출전을 위해 4년을 준비했습니다. 100미터는 제 주종목이었어요. 1923년 AAA(Amateur Athletic Association) 선수권대회에서 9.7초의 영국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자신 있던 종목이었죠. 그런데 경기 일정이 주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제 마음은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조국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거든요.
■ 선택이 결국 당신을 더 빛나게 만들었지요. 에릭 헨리 리들 (조용히 웃으며) 사람들은 결과를 보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선택을 보십니다. 저는 그걸 믿었습니다.
■ 이제 시간을 좀 더 거슬러 가볼까요? 1902년 1월 16일 중국 톈진(天津)에서 태어나신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에릭 헨리 리들 저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 제임스 던롭 리들(James Dunlop Liddell)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로서 중국의 영혼을 위해 평생을 바치셨죠. 제 어린 시절은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기도로 가득했습니다. 다섯 살까지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며 현지 아이들과 뛰어놀았어요.
■ 그 시절의 기억 중 가장 선명한 장면이 있다면? 에릭 헨리 리들 아버지와 함께 새벽마다 드리던 기도입니다. 그 기도 소리가 제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습니다. 세상은 넓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보다 더 크다는 걸 어릴 때부터 배웠습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건, 중국 아이들과 함께 논밭을 가르며 달리던 시절이에요. 언어는 달랐지만 웃음은 같았거든요.
■ 6살에 형 로버트(Robert)와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야 했을 때는 어땠나요? 에릭 헨리 리들 런던 남부의 엘탐칼리지(Eltham College)라는 선교사자녀 기숙학교에 들어갔을 때, 어린 마음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죠. 왜 부모님, 여동생 제니(Jenny)와 헤어져야 하는지… 하지만 부모님은 저와 형에게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주고 싶어 하셨어요. 기숙사에서 보낸 첫 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 그런 상황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은 비결이 있었나요? 에릭 헨리 리들 매주 주일 아침, 교회에서 중국인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부모님을 떠올리며 기도했죠. 다행히 부모님과 제니, 그리고 새로 태어난 남동생 어니스트(Ernest)가 두세 차례 휴가 차 영국에 돌아와서 주로 에든버러에서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었어요. 그 기도가 제 신앙의 뿌리가 됐습니다.
■ 달리기 재능은 언제부터 드러났는지? 에릭 헨리 리들 엘탐에서부터였어요. 운동장에서 달릴 때마다 바람이 제 얼굴을 스치는 그 기분이 좋았어요. 마치 하나님이 제 옆에서 함께 달리는 것 같았습니다. 15세에 학교 크리켓과 럭비 1군에 발탁됐고, 나중에는 두 종목의 주장까지 맡았어요. 학년 최고의 운동선수에게 주는 블랙히스컵(Blackheath Cup)도 받았습니다.
■ 교장 선생님도 선교사님을 특별하게 보셨던 것 같은데요? 에릭 헨리 리들 조지 로버트슨(George Robertson) 교장님은 저를 “전혀 허영심이 없는 학생”이라고 평가해 주셨어요. 운동을 잘한다고 자만하지 않으려고 늘 노력했습니다. 모든 재능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1920년 에든버러대학교(University of Edinburgh)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는지요? 에릭 헨리 리들 네, 형 로버트와 함께 순수과학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시절 육상과 럭비가 제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어요. 100야드와 220야드 종목에서 학교 대표로 뛰었고, 럭비에서도 대학팀 선수로 활약했습니다. 화학 실험실에서 공부하다가도 운동장으로 뛰어가곤 했죠.
■ 럭비에서도 상당한 실력을 보이셨다고 들었습니다. 에릭 헨리 리들 1921년과 1922년 글래스고와의 도시 간 경기에서 에든버러 대표로 뛰었고, 이를 통해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럭비팀에 발탁됐어요. 1922∼1923년 파이브 네이션스 경기 8경기 중 7경기에 출전해서 아일랜드, 프랑스, 웨일스를 상대로 연속 득점을 올렸죠.
■ 당시 언론 평가도 좋았다고 하던데요? 에릭 헨리 리들 언론은 아일랜드전 승리 후 “그를 ‘그저 달리기 선수’라고 평가해선 안 된다”고 썼죠. 또 저를 “희귀한 조합, 즉 속도와 럭비 두뇌, 그리고 손재주를 겸비한 선수”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과분한 칭찬이었죠. 2022년에는 국가대표 데뷔 100주년을 맞아 스코틀랜드 럭비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고 들었습니다.
■ 대학 시절에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기도했어요. 중국에 있는 부모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이 제게 주신 달리기 재능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요. ‘글래스고 학생전도연합(GSEU)’에서 연사로 초청받아 스코틀랜드 전역을 돌며 복음을 전하기도 했어요.
■ 운동과 신앙,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는 게 힘들지 않았나요? 에릭 헨리 리들 전혀요. 오히려 서로 보완했습니다. 달릴 때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기도할 때는 달리는 것처럼 온 마음을 다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저에게 “운동에만 집중하라”고 조언했지만, 저는 하나님 없는 달리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 1923년 AAA 선수권대회에서 영국 신기록을 세우셨죠? 에릭 헨리 리들 100야드에서 9.7초를 기록했어요. 220야드와 함께 두 종목에서 영국 챔피언이 됐죠. 이 기록이 23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고 하니 놀랍습니다. 그때부터 신문들이 저를 올림픽 유망주로 꼽기 시작했어요.
■ 1924년 파리올림픽 선발 과정은 어땠습니까? 에릭 헨리 리들 1923년의 좋은 성적 덕분에 자연스럽게 대표팀에 선발됐어요. 그때만 해도 일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죠. 단지 조국을 대표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 100m 예선이 주일에 열린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됐나요? 에릭 헨리 리들 파리에 도착하기 몇 주 전이었어요. 영국올림픽위원회에서 경기 일정표를 받아보는데, 제 주 종목인 100m 예선이 일요일 오전에 잡혀 있더군요. 그 순간 제 머리가 새하얘졌습니다. ■ 바로 불참을 결정하신 건가요? 에릭 헨리 리들 아니에요. 며칠간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도만 했어요. “하나님,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요? 4년간 준비한 올림픽인데…” 하지만 성경 말씀이 계속 떠올랐어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십계명 말입니다.
■ 에드워드 왕자까지 직접 설득하러 오셨다고요? 에릭 헨리 리들 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죠. 훗날 에드워드 8세가 되신 왕자님이 저를 만나러 오셨어요. “리들, 자네는 영국의 희망이야. 하루만, 딱 하루만 양보할 수 없겠나?”라고 하셨어요. 저는 정중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전하, 저는 하나님께 더 큰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 언론의 반응은 어땠나요? 에릭 헨리 리들 혹독했죠. <데일리 메일>은 “종교적 광신주의”라고 비난했고, 어떤 신문은 저를 “조국을 버린 배신자”라고 썼어요.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지하는 목소리도 있었어요. 특히 교회 공동체에서요.
■ 400m로 종목을 바꾸는 건 어떻게 결정하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사실 400m는 제 전문 종목이 아니었어요. 대학 시절 몇 번 뛴 적은 있지만 세계 수준의 기록은 없었죠.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실 거라 믿었습니다. 평일에 열리는 종목이니까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어요.
■ 200m에서 먼저 동메달을 따셨죠? 에릭 헨리 리들 네, 예상치 못한 결과였어요. 미국의 잭슨 숄츠(Jackson Scholz)와 찰스 패독(Charles Paddock)이 워낙 강했거든요. 하지만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이게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느꼈어요. 진짜 도전은 400m였으니까요.
■ 400m 결승 당일, 경기 직전에 받은 쪽지 이야기를 해주세요. 에릭 헨리 리들 아, 그 쪽지! 마사지사가 전해준 건데, “나를 존중하는 자를 내가 존중하리라”(삼상 2:30)라고 적혀 있었어요. 누가 보낸 건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흘렀어요. 하나님이 저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이 들었죠.
■ 47.6초의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한 그 결승 레이스를 자세히 묘사해 주세요. 에릭 헨리 리들 출발선에 섰을 때 관중들의 함성이 들렸어요. “Go Liddell!” 하는 영국 응원단의 목소리가 특히 컸죠. 총성이 울리고 저는 곧바로 선두로 치고 나갔어요. 보통 400m에서는 페이스 조절이 중요한데, 그날은 처음부터 전력으로 뛰었어요.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 시상대에 올라 국가를 들을 때 심정은? 에릭 헨리 리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영국 국기가 올라가는 걸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어요.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 또 하나는 중국에 있는 부모님이었어요. “아버지, 어머니, 보고 계시나요?”
■ 올림픽 후에도 몇 차례 더 경기하셨죠? 에릭 헨리 리들 네, 영국 대 미국 친선경기에서 4×400m 마지막 주자로 뛰어 승리를 이끌었고, 1925년 스코틀랜드 선수권대회에서는 100야드, 220야드, 440야드를 모두 제패하며 역사상 네 번째로 세 종목을 석권한 선수가 됐어요. 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중국을 향해 있었습니다.
■ 올림픽 이후 영국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으셨죠? 에릭 헨리 리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어요.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알아봤고, 사인을 요청했죠. 여러 회사에서 광고 모델을 해달라고 했고, 프로 선수가 되라는 제안도 많았어요. 하지만 그게 제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습니다.
■ 1924년 파리 올림픽 후 이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신 후, 1925년 중국행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에릭 헨리 리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직후부터 계속 마음에 있던 생각이었어요. “이 영광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이 기회를, 단순히 개인적인 성공으로 끝낼 수는 없었어요. 부모님이 평생을 바친 선교지,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 중국에서의 선교사 생활은 어떠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톈진(天津) 등지에서 선교사 교사로 섬겼어요. 평일에는 수학과 과학을 가르쳤고,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달리기도 했죠. 주말에는 인근 마을을 돌며 복음을 전했고, 체육대회도 열었습니다. 학생들이 신기해하며 눈을 반짝이던 모습이 기억나요.
■ 1932년 첫 휴가 때 목사 안수를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에릭 헨리 리들 네, 스코틀랜드에서 회중교회 목사로 안수받았습니다. 에든버러의 모닝사이드 회중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죠. 그리고 그해에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1934년 플로렌스 맥켄지(Florence Mackenzie)와의 결혼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에릭 헨리 리들 플로렌스는 캐나다 선교사 가정 출신의 간호사로 중국에 온 선교사였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느꼈죠. 그녀도 중국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적이었어요. 결혼 후 세 딸 패트리샤(Patricia), 헤더(Heather), 모린(Maureen)을 두었습니다.
■ 가정을 이루고 나서 삶이 어떻게 바뀌었나요? 에릭 헨리 리들 더욱 충실해졌어요. 첫째 패트리샤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죠. 집에서는 아빠였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이었고, 교회에서는 전도사였어요. 각각의 역할이 모두 소중했습니다.
■ 1930년대 말부터 일본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됐죠. 어떻게 느끼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점점 상황이 심각해지는 걸 느꼈어요. 학교 수업 중에도 폭격기가 지나가곤 했죠. 학생들의 불안한 표정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1941년 가족을 캐나다로 보내는 결정은 얼마나 어려웠나요? 에릭 헨리 리들 제 인생에서 힘든 결정 중 하나였어요. 플로렌스는 둘째 딸 헤더를 임신한 상태였고, 첫째 패트리샤는 겨우 일곱 살이었어요. 일본군의 침략이 심해져서 가족의 안전이 최우선이었지만,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괴로웠죠.
■ 마지막 이별 장면이 어떠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항구에서 배를 타는 가족을 배웅하면서 눈물을 참을 수 없었어요. 패트리샤가 “아빠도 같이 가면 안 돼요?”라고 묻더군요. 그때 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아빠는 중국 친구들을 도와야 해”라고 설명했죠. 그 후 저는 가난한 지역으로 가서 선교사역을 이어갔습니다.
■ 혼자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더욱 열심히 일했어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일로 달래려 했던 것 같아요. 학생들을 더 세심히 돌봤고, 주말에는 더 많은 마을을 방문했죠. 밤에는 편지를 썼어요. 플로렌스와 딸들에게, 그리고 영국에 있는 형 로버트에게 말입니다.
■ 1943년 일본군에 체포되기까지의 상황은 어떠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점점 숨통이 조여 오는 걸 느꼈어요. 선교사들에 대한 감시가 심해졌고, 수업도 자유롭게 할 수 없었죠. 어느 날 일본 헌병이 학교에 와서 “서양인들은 모두 지정된 곳으로 이주해야 한다”고 통보했어요. 그게 웨이셴 수용소행 통지였죠.
■ 산둥성 웨이셴 민간인 수용소(濰縣集中營)에 도착했을 때 첫인상은? 에릭 헨리 리들 절망 그 자체였어요. 높은 철조망, 삭막한 막사 그리고 사람들의 체념한 표정… 하지만 제가 할 일은 절망하는 게 아니라 희망을 나누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첫날밤부터 다른 포로들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 수용소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나요? 에릭 헨리 리들 선교사, 사업가, 교사, 의사… 다양한 배경의 서양인들이 있었어요.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 사업을 잃은 사람들, 절망에 빠진 이들이 대부분이었죠. 그중에는 아이들도 300명 정도 있었어요. 부모와 떨어져 있는 아이들이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 수용소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노인들을 돕고, 아이들에게 과학과 성경을 가르쳤어요. 정규 학교가 없으니까, 제가 임시 교실을 만들었죠. 과학, 수학, 영어를 가르쳤고, 체육 시간도 만들었어요. 아이들이 웃음을 되찾는 모습을 보는 게 제게는 큰 위안이었습니다.
■ 성인들과는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매주 일요일 예배를 인도했어요. 처음엔 몇 명 안 왔지만 점차 늘어났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려 했어요. 또 체육대회도 주최했습니다. 축구, 배구, 탁구… 가능한 모든 운동을 통해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죠.
■ 유명한 “침대 양보” 사건도 들려주세요. 에릭 헨리 리들 아, 그건 별것 아니에요. 막사에 침대가 부족했는데, 나이 드신 분이 바닥에서 주무시는 걸 봤어요. 당연히 제 침대를 드려야죠. 예수님이라면 그러셨을 거예요. 저는 바닥에서 자는 게 힘들지 않았어요. 운동선수 시절부터 어떤 환경에서든 잘 수 있었거든요.
■ 다른 포로들의 증언을 보면 선교사님이 모든 사람의 상담자 역할을 하셨다고 하던데요? 에릭 헨리 리들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누구나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해요. 고향에 두고 온 가족 걱정, 사업 실패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저도 같은 처지였지만 서로 위로하며 버텼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것을 계속 상기시켜 줬어요.
■ 수용소에서도 달리기를 계속하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제한적이었지만, 좁은 마당에서 조깅을 했어요. 다른 포로들이 “아직도 달리기를 하냐”라고 신기해했죠. 저는 “몸이 움직여야 마음도 살아난다”라고 했어요. 때로는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 경주도 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와 함께 뛴다는 게 아이들에게는 큰 즐거움이었어요.
■ 수용소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언제였나요? 에릭 헨리 리들 플로렌스에게서 셋째 딸 모린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만날 수 없을 때였어요. 태어난 딸의 얼굴조차 볼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 괴로웠죠. 그날 밤 혼자 울었어요.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다시 아이들 앞에 설 때는 웃음을 되찾았어야 했습니다.
■ 1944년부터 건강이 악화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에릭 헨리 리들 두통이 심해지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스트레스와 과로,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점차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고, 가끔 방향감각을 잃기도 했어요. 그래도 아이들 수업은 계속했어요. 제가 쓰러지면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싶어서요.
■ 뇌종양 진단을 받았을 때 심정은 어떠했는지요? 에릭 헨리 리들 수용소의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해줬어요. “에릭, 뇌에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그 순간 모든 게 이해됐죠. 왜 머리가 아픈지, 왜 가끔 혼란스러운지…, 하지만 무섭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아, 이제 집으로 갈 때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마지막 몇 달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할 수 있는 한 평범하게 지내려고 했어요. 여전히 아이들을 가르쳤고, 일요일엔 설교했죠. 다만 점점 피곤해져서 쉬는 시간이 늘어났어요. 그 시간에는 주로 기도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수용소의 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 마지막 설교는 무엇에 대한 것이었나요? 에릭 헨리 리들 사랑에 대해 말했어요. 요한복음 13장 34∼35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요. 이 땅에서 제가 전하고 싶은 마지막 메시지였죠.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것. 그것만이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비결이라고 말입니다.
■ 1945년 2월 21일, 43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으셨을 때 마지막 말씀이 “완전한 헌신(It’s complete surrender)”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에릭 헨리 리들 네, 그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다 이루었다”와 같은 의미였어요. 제 인생의 경주가 끝났고, 믿음을 지켰다는 안도감이었죠.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고, 그분의 뜻에 순종했던 제 삶이 이제 완성됐다는 평안함이었습니다. 아무런 후회가 없었어요.
■ 그때 마음 상태는 어떠셨나요? 에릭 헨리 리들 평온했어요. 마치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죠. 고통은 있었지만 두려움은 없었어요. 오히려 곧 하나님을 뵙고, 하늘에서 가족들을 다시 만날 생각에 기대됐습니다.
■ 수용소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에릭 헨리 리들 많은 사람이 울었다고 들었어요. 아이들도, 어른들도…, 제가 없어진 빈자리를 느끼며 슬퍼했죠. 하지만 동시에 제가 전해준 희망의 메시지를 기억해 줬어요. 그것만으로도 제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 선교사님이 세상을 떠난 뒤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아시나요? 에릭 헨리 리들 물론 제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보여주셨어요. 전쟁이 끝나고 수용소가 해방됐을 때, 사람들이 제 무덤에 꽃을 놓고 기도하더군요. 에든버러와 글래스고에서는 1945년 대규모 추모 예배가 열렸고, ‘에릭 리들 기념위원회’가 설립돼 장학금과 기념비가 세워졌다고 들었어요.
■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특별한 일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에릭 헨리 리들 네, 100m 우승자 앨런 웰스(Allan Wells)가 승리를 저에게 헌정했다고 하더군요.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 선수로서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리고 1981년 영화 <불의 전차>가 제작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됐죠.
■ 영화 <불의 전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릭 헨리 리들 놀라운 일이에요. 제가 살았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 사람들이 제 이야기에 감동을 받는다니…, 같은 스코틀랜드 출신이자 에든버러대학교 동문인 이안 찰슨(Ian Charleson)이 저를 연기했다는 것도 의미 깊었어요. 영화는 일부 각색된 부분도 있지만, 핵심은 정확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달렸다는 것 말입니다. ■ 2002년 스코틀랜드 스포츠 명예의 전당 첫 헌액자가 되셨죠? 에릭 헨리 리들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리고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중국 정부가 저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다고 하더군요.
■ 중국에서의 기념행사는 어떤 의미였나요? 에릭 헨리 리들 한때, 선교사들을 배척했던 중국이 저를 기억해 주다니…, 웨이팡(濰坊, 옛 웨이셴)에 1991년 기념비가 세워졌고, 거기에는 이사야 40장 31절 말씀이 새겨졌다고 들었어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는 것 같습니다.
■ 스코틀랜드에서도 많은 기념 사업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에릭 헨리 리들 1980년 에든버러에 ‘에릭 리들 센터’가 설립되었고, 2012년에는 제 이름을 딴 체육 장학금이, 2023년에는 ‘에릭 리들 체육관’이, 2024년에는 ‘브런츠필드 링크스’의 산책로가 제 이름으로 명명되었다고 하더군요. 정말 과분한 일들이에요.
■ 2024년 파리 올림픽 400미터 금메달 획득 100주년을 맞아 에든버러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추서했다고 들었습니다. 에릭 헨리 리들 네, 딸 패트리샤가 캐나다에서 와서 대신 받았다고 하더군요. 체육과 인류애에 대한 공헌을 인정해 준다니, 정말 감격스러운 일이었어요. 제가 그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렸을 뿐인데 이렇게 기억해 주다니요.
■ 현재도 세계 곳곳에서 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릭 헨리 리들 제가 바랐던 바예요. 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 사람들이 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보게 되길 원했거든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 핍박 중에 신앙 생활하는 중국 크리스천들에게 하실 말씀은? 엑릭 헨리 리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주지 않으십니다. 제가 수용소에서 뇌종양으로 고생할 때도,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어요. 시련은 우리를 더 강하게, 더 겸손하게,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요. 포기하지 마세요.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답니다. 지금 중국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어려움 속에 있는지 압니다. 교회 문이 닫히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가정과 생업을 잃는 분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눈물과 기도를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저 역시 중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수용소에 갇히고, 자유를 잃고, 마지막에는 생명까지 드렸습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제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은 경기장에서만이 아니라 수용소 안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은 끝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쇠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감당하는 눈물과 희생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두려움 대신 소망을 붙드십시오. 미움 대신 용서를 선택하십시오. 절망 대신 부활의 기쁨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은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중국 땅에도 봄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달리십시오. 영광의 면류관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현대 사회는 성공과 경쟁을 중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신앙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조언해 주신다면? 에릭 헨리 리들 진정한 성공의 기준을 바꿔보세요. 세상은 1등만 기억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세요. 얼마나 빨리 뛰었느냐가 아니라 왜 뛰었느냐를 물으시죠. 경쟁도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는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나은 내가 되는 경쟁을 하세요. 젊은이들이여,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발견하세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셨어요. 어떤 이는 달리기, 어떤 이는 음악, 어떤 이는 돕는 일… 그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때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요. 저에게는 “내가 달릴 때 나는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다”라는 말이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삶의 고백이었듯이요.
■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비결이 있다면? 에릭 헨리 리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저도 웨이셴 수용소에서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어요. 자유도, 가족도, 건강도… 하지만 거기서 진정한 사역의 의미를 찾았죠.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마저도 선하게 사용하세요. 포기하지 마시고 다시 일어서세요. 기도하세요. 하나님과 대화하며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거예요. 1924년 주일 경기를 포기할 때도, 중국으로 떠날 때도, 가족을 캐나다로 보낼 때도… 모든 결정을 기도로 했어요.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길이 보입니다. 때로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일지라도요.
■ 가족과 일, 그리고 신앙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은? 또 선교나 봉사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한 메시지가 있다면? 에릭 헨리 리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정리하십시오. 가족을 사랑하는 것도, 일에 충실한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에요. 어느 하나를 포기할 필요 없어요. 다만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시고, 하나님이 첫 번째 자리에 계시도록 하세요. 저는 달리기와 신앙, 가족과 사역을 모두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었어요. 꼭 먼 나라로 갈 필요는 없어요. 선교는 어디서든 할 수 있어요. 옆자리 동료에게, 이웃에게, 가족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작은 실천이 큰 변화를 만들어요. 저도 웨이셴 수용소라는 절망적인 곳에서 가장 의미 있는 선교를 했으니까요.
■ 긴 시간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을주께로> 독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은? 에릭 헨리 리들 제가 전하고 싶은 건 단순해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주어진 재능으로 세상을 밝게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각자의 경주로에서 최선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 모두 하늘나라 결승선에서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리세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딤후 4:7∼8) ♣
♣ 리빈 | 중국인 사역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