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II. 중국 정치운동 속의 신앙 1. 확고한 신앙 2. 전국기독교 회의와 ‘기독교계 선언’ 3. 신앙의 보존 4. 박해 속 침묵 5. 질그릇에 담긴 보배
II. 중국 정치운동 속의 신앙
1. 확고한 신앙 1949년부터 1950년까지 자오쯔천의 주요한 초점은 기독교가 어떻게 개혁되어 정치와 사회 대변혁의 도래에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였다.1) 동시에 중국기독교 교리신학의 발전에 대하여서도 높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새로운 상황에서 기독교는 공산주의의 도전을 피할 수 없었으며, 중국의 신학자들은 새로운 사상과 ‘조화’하는 것도 배워야 하지만 자신의 ‘독립’도 견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2) 무신론의 충격 앞에서 많은 기독교 신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有神論)를 증명할 것인가에 관심을 두었다. 이때 자오쯔천은 시편 139편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제기하였다. 그는 무신론자와 유신론자는 비록 상반되는 견해를 가졌지만 오히려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명백히 지적하였다. 그것은 바로 ‘이지(理知)’로써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증명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자오쯔천은 “지식이 신앙을 증명할 수 있으며 신앙이 지식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그 정도로 미련하지는 않다. 지식의 그물로 하나님을 잡을 수 있는가? 만약 잡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는 것인가?”3)라고 반문했다. 이어서 40년대 이후 자기 깨달음에 대하여 말한 자오쯔천은 사람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고, 단지 탐구하고 모색하는 것뿐이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는 시점’에 신앙의 ‘은사(恩賜)’를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고, 하나님이 사람을 붙잡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잡으면 사람은 말할 수도 없고 전할 수도 없는 종교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를 깨닫게 된다. 나는 이성적으로 말함으로 사람을 얻고, 종교 신앙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미련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확신한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시시각각 나와 함께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의 경험과 생활 속에서 나는 하나님께 붙잡혔다는 것이다.4)
자오쯔천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다면 “결국 일부 공동의 논증만 얻을 것”을 확신하고, 중국 신학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은 모든 범주를 초월하여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지,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도리는 없다”라고 각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 이것이야말로 중국기독교 교리신학이 확립해야 할 이론의 기초이며,6) 동시에 중국 신학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격(경건과 순종하는 신앙)’이다.7) 마지막으로 자오쯔천은 다음과 같이 기대하였다.
오늘 이후 40년은 중국교회가 이미 범위를 축소했기 때문에 경험을 심화하고 누룩의 역할을 하여 많은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 진리의 기준, 도덕의 근본, 가치의 보장, 자아의 실현, 인생의 의의, 심령의 의탁(依託)을 찾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정권과 과학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종교는 이미 보유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전할 준비를 하고 있다.8)
2. 전국기독교회의와 ‘기독교계 선언’ 자오쯔천의 중국 교회개혁의 구상은 전국협진회가 전국회의(全國會議) 개최를 준비하면서 제출한 것이다. 하지만 전국회의의 준비공작은 갖은 좌절에 부닥쳤다. 먼저 1950년 4월 대회 준비위원회는 “준비공작이 시간의 촉박으로 미비하기에” 대회 개최를 연기한다고 선포하였다.9) 이에 자오쯔천은 실망감은 있지만 그래도 “충분한 준비가 없이 그대로 개회하기보다 적극적인 공작을 통하여 준비를 다그쳐야 한다”라고 동의하였다.10) 7월 대회 준비위원회 총무인 우가오쯔(吳高梓) 목사가 사표를 제출하였는데 상임위원회가 사표를 수리하였다.11) 8월 중국협진회는 또 전국회의가 그해 제14회 연회와 가까운 연고로 간편과 절약의 원칙에 따라 전국회의에 합병을 결정하였다.12)
이 결정은 교회 각 계층의 주목과 관심을 끌었다. 옌징(燕京)대학 종교신학원에서 출판하는 잡지 ‘언유(恩友)’는 사설을 통하여 놀라움, 의문, 걱정, 실망 등의 표현으로 자신들의 심경을 밝혔다. 특히 전국회의의 특수 사명과 중국협진회 연회의 사명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질의하면서 “전국회의는 중국협진회 연회와 합병한 것이 아니라 취소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네 개의 준비 소조(小組)의 연구 성과에 관심을 두면서 중국협진회가 정리하여 발표하고 이후 토론에 참고할 수 있게 하라고 촉구하였다.13) 전국대회(全國大會)의 개최가 이처럼 중국교회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공산주의 이념의 새로운 정권이 수립된 시대 상황에서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두가 관심을 둔 문제이며, 또한 각자 대응책이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 교회의 단일한 견해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국기독교협진회가 전국대회를 계획한 배경도 목적도 여기에 있었다.
1949년 9월 21일 공산당 정부의 제1회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이하 인민정협)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종교단체 대표가 7명 참석했는데 그중 기독교 대표가 5명14) 이었다. 이 회의는 ‘공동강령(共同綱領)’을 통과시켜 인민민주주의(人民民主主義)를 중화인민공화(中華人民共和國)의 정치기초(政治基礎)라고 규정하였다. ‘공동강령’은 국가의 임시헌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목표는 “인민민주정치를 실행하고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관료자본주의를 반대한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강령의 제5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사상, 언론, 출판, 집회, 결사, 통신, 인신(人身), 거주, 종교 신앙과 시위행진의 자유권이 있다.”15) 인민일보 사설은 여기서 말하는 종교 자유권은 “종교를 신앙할 자유도 있고 종교 신앙을 거절할 자유도 있다는 뜻이며, 이 두 방면의 자유는 모두 법률의 보호를 받으며”16) 정부도 “간섭할 수 없다.”17) 공산당 정부 초기에 적지 않는 교회 지도자들도 이러한 종교 자유의 약속 때문에 흥분하였다. 자오쯔천도 “공동강령이 규정한 각종 자유는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공산당의 위대함과 중국인의 용인(容忍)을 표창(表彰)하였다”라고 보았다.18)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정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 성립을 선포하였다. 교계 인사들이 공산주의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든 간에 중국공산당의 통치는 이미 눈앞의 사실이 되었고, 중국교회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국기독교 안에서 가장 대표성을 지닌 중화전국기독교협진회는 먼저 인민 정부의 성립을 인정한다고 표시하고 다음과 같이 성명을 발표하였다.
오늘날 새로운 중국 시대에 교회는 사회와 인민에게 매우 큰 공헌을 할 것은 의심할 바 없다. 본회(本會)는 일관되게 기독교 교회 합작의 입장에서 왔고 더욱이 이러한 새 국면을 맞이하여 응당 감당해야 할 임무가 중대함을 인식한다. 한편으로는 견고한 기독교 신앙을 이어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정협(人民政協) 공동강령이 우리에게 준 권리와 의무 준수에 힘쓰고, 신중국의 각종 건설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한다. 이후 우리는 더 많이 교회 협력을 강화하여 정부의 각종 호소(號召)에 협력하며, 우리의 사회와 국가를 잘 건설하는 데 우리 교회의 공헌을 다 할 것이다.19)
제1회 인민정협이 끝난 뒤 우야오쭝을 중심으로 한 다섯 명의 기독교 대표들은 중국협진회의의 정신과 결의를 각 지역의 교회단체에 전달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우야오쭝의 영도 아래 ‘기독교방문단(基督敎訪問團, 이하 방문단)’을 조직하여 1949년 11월부터 순방을 시작하였다. 순방의 주요 내용은 인민정협의 통전의식(統戰意識), 공동강령의 목표, 교회혁신 자립(敎會革新自立)의 요구 등을 전달하는 것이었다.20) 방문단이 1950년 4월과 5월 베이징에 머물 때 이들은 정부 총리인 저우언라이와 세 차례 접견을 통해, 기독교가 신중국의 전망에 대한 문제를 상의하였다. 회담의 주요 결과는 ‘중국기독계 선언(中國基督敎界宣言)’ 초안을 작성한 것이다.21) 6월 30일 초청을 받은 일부 서방 선교사와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상하이청년회(上海靑年會)에서 우야오쭝과 정부의 협상 과정을 보고받았다. ‘기독교계 선언’ 초안은 여덟 번의 수정을 거쳤는데 “이는 중국기독교의 역사적 의의가 있는 문건으로써 중국기독교의 전망과 발전과도 중요한 관계가 있다.”22) 이 선언문의 정식 명칭은 ‘중국기독교가 신중국 건설 중 노력해야 할 경로(途徑)’이고, 그 총체적인 임무는 다음과 같다고 지적하였다. “중국기독교 교회와 단체는 철저히 공동강령을 옹호하며, 정부의 영도 아래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를 반대하며 독립, 민주, 평화, 통일과 부강한 신중국 건설을 위하여 분투한다.”23)
선언의 내용을 보면 공산당 정부가 기독교를 처리하는 방법이 잘 드러나 있다.
■ 교회는 정부의 영도에 완전히 복종하며 신중국을 공동 건설할 책임을 진다. 교회는 하나의 초연(超然)한 단체가 아니다. 정교(政敎)는 반드시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 교회는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년간의 제국주의와 관계를 절단하고 국내에서 반동 세력 조성하는 제국주의에 이용당하지 말아야 한다.
■ (중국)교회는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의 윈칙을 실행하여 진정으로 본색의 노선을 걸어가며, 하나의 신중국교회를 건립해야 한다.24)
선언의 최종안이 공신력을 갖게 하고 일반 신자들도 기독교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발기한 것으로 인정하기 위하여 우야오쭝은 당시 중국교회에 영향력 있는 교회 지도자 40명을 발기인으로 초청하여 서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7월 28일 전국의 천여 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발송하여 이 선언에 대해 찬성한다는 서명을 요청하였다. 8월 5일 잡지 ‘톈펑(天風)’은 “전국기독교회의 개최 취소를 결정하였다”라는 소식을 발표하였다.25) 그리고 2주 후 ‘우리 기독교계의 대외 선언에 관한 소식’이라는 문장을 발표하고 선언문을 첨부하면서 서명을 요청하였다.26) 9월 23일 인민일보는 선언문 전문을 게재하면서 첫 번째로 서명한 천 5백여 명의 기독교 인사의 명단과 통계 숫자를 공개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 인사들의 애국운동’이라는 사설을 통하여 이 서명운동은 “제국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종교의 정도로 가는 애국운동이다”라고 격려하였다.27) 9월 26일 공산당 중앙정부가 ‘기독교, 천주교 중에서 ‘기독교선언’ 서명운동에 관한 지시‘를 발표하자, 이 서명운동은 급속하게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1950년 8월부터 1951년 4월까지 8개월 동안 서명한 수가 18만 명으로 증가하여 ’전체 기독교 신자의 18%‘에 달했으며,28) 1954년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41만 7천여 명이 된다고 하였다.29)
결국 우야오쭝은 공산당 정부의 지지 속에서 선언 서명운동을 추진하면서 1950년 10월 18일부터 25일까지 상하이에서 중화전국기독교협진회 연회를 개최하였다. 이 연회는 사실상 협진회파와 우야오쭝파 간에 기독교 대표권과 교회혁신 방향을 쟁탈하는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협진회는 연회에서 우야오쭝의 영향력을 견제하고, 이미 발표한 선언에 대립하는 새로 선언문을 발표하여 ‘종교적 견해에서 삼자혁신’을 강조하기로 계획하였다.30) 하지만 중국공산당 화동군정위원회(華東軍政委員會)의 적극적인 간여(干與) 아래 연회는 우야오쭝을 반대하던 것에서 옹호하는 것으로 극적인 반전을 가져왔다. 연회 개최 전야에 화동군정위원회는 좌담회를 소집하고 협진회 인사들을 초청하였다. 정부 대표 진영은 과히 양적으로 그 기세를 알 수 있었다.31) 좌담회에서는 연회에 대한 두 가지 규정을 세웠다. 첫째, 협진회 집행위원 중 외국 국적(外國籍) 위원은 회의에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연회는 마땅히 기독교 삼자혁신 선언을 주지로 해야 한다.32) 연회에서 우야오쭝은 전국협진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중국교회가 어떻게 혁신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것인가 하는 논쟁은 결국 강력한 정치적 압력 아래에서 공통인식(共識)을 달성하였다.
자오쯔천도 처음부터 저우언라이 총리 좌담회에 참석했기에 정부가 기대하고 요청하는 중국교회의 견해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미 공산당 정부가 우야오쭝의 혁신 선언을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으로 감지했고, 중국교회 개혁의 방향은 정부가 주도할 것으로 예견했다. 그리하여 태도에 있어서 극에 달하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최근 마음은 “심사가 많고, 심정이 최악이며”, “마음도 피로하고, 힘도 나약해져 인생이 초초(草草)하다”라고 말했다.33) 자오쯔천은 당면한 형세의 발전을 투시하고 있었고, 특히 공산당 정권이 우야오쭝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중국교회의 혁신 구상에서도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대개 할 말들을 다한 것 같다. 이후로 나는, 다시는 중국기독교의 교회개혁에 관한 문장을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마음도 힘도 부치고, 근심 걱정이 태산이다. 이제 이후로는 반드시 주님만 따르고, 하나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면서 나의 여생을 마쳐야 할 것이다.”34)
3. 신앙의 보존 하지만 사실상 자오쯔천은 중국교회의 장래를 위한 관심과 사색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다소 비관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견해를 드러냈지만 그는 더욱더 주의력과 관심을 교회 내부에 두었다. 그는 계속하여 추호의 거리낌도 없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파의 난립, 목회자와 신자 간 불화, 영성의 침체, 전도의 미진 등 누적된 폐단들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문제점들의 해결을 고민하였다. 우야오쭝 등 교회 개혁파와 자오쯔천의 교회에 관한 이해는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교회에 있었다. 따라서 자오쯔천의 신학은 철저한 교회론이라고 할 수 있다.35) 그리고 교회가 새로운 시대적 도전에 대응해야 할 근본적인 자체 개혁 사상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36)라는 것으로써 철저히 종교적이지, 정치적이지 않았다.
1950년 7월 21일 자오쯔천은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글을 써서 9월에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자오쯔천은 다시 한번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기독교는 오늘날 중국에서 엄중한 시련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시험은 바로 ‘보배’를 교회라는 이 질그릇에 담고 있느냐,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이 보배를 얻을 것인가?”37) 자오쯔천은 신학이 과학이나 철학을 좇아가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이는 오직 “종교적인 인문주의만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신학자는 반드시 성령의 감동을 간구하면서 삶 속에서 그 보배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38) 확실한 것은 이 시기 자오쯔천의 관심의 초점은 이미 ‘혁신에서 견수(堅守)로 전환되었다’라는 것이다. 자오쯔천은 교회가 장차 더 큰 충격을 받을 것으로 감지하였다. 그렇다면 문제의 중점은 이미 교회 전체가 아니라 하나하나 신자들의 견지와 증인이었다. 불신자들이 신자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이 시대에 한 사람의 신자마다 모두 질그릇이고 책임은 바로 보배를 질그릇 안에 보존하는 것이다.
외관상으로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간절한 기도와 인내하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곧 우리가 신앙하는 바는 성육신한 주 예수 그리스도이고 참으로 영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겉모습은 아마 영원히 하나의 질그릇에 불과할 것이지만 우리의 책임은 바로 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범사에 근신하고 범사에 원망과 미움이 없어야 하고 범사에 희망을 품어야 한다.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서 우리는 마치 아무런 작용도 일으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제도적인 개혁에도 효과를 낼 수 없고, 유행되는 사상에도 변화를 불러오지 못할 것이다. 중국 사회는 우리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는 필요 없을 것같이 여길 것이다.
노동 생산은 여러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교회가 없어도 이런 일들이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을 것이다. 사회봉사는 일시적인 것이고, 장차 국가가 영도하는 조직들이 직접 할 것이고 교회가 당장 무너진다 해도 국가는 표면상 아무런 손해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잘 입고 잘 살고, 모든 것이 갖추어질지라도 때가 되면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사람의 가치와 의미와 귀속은 무엇인가, 사람은 진실성이 있는 것인가, 세계는 종말이 있는 것인가, 진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도덕은 무엇을 기초로 하는가를 물을 것이다.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하고, 지식이 넘치는 사람일수록 자아의 고독과 인생의 공허를 경험할 것이다. 그때가 우리는 우리의 질그릇을 열어 안에 두었던 보배를 드러낼 기회이다. 우리의 오늘의 책임은 견수하고 보존하는 것이고 잠재적인 발전이다.39)
무엇 때문에 지금 이후 교회의 책임은 신자들의 ‘견수’와 ‘보존’이어야 하는가? 한 가지 생각은 기독교가 중국 사회에서 그 유구한 역사적·문화적 기초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자 숫자도 매우 적어서 근본적으로 종교가 극히 성행했던 소련이나 동유럽 등 공산주의 국가들과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40) 또 다른 생각은, 자오쯔천은 지금의 교회개혁이 엄청난 장벽에 부딪히고 있으며, 앞으로 형세가 변화할수록 그 중심을 잃고 원래 계획했던 개혁의 과제들이 결국 객관적 형세의 충격에 따라 좌우되고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중국)교회의 개혁을 크게 말할 필요가 없다. 서방의 선교사들도 이미 거의 다 떠났고, 달러도 파운드도 거의 공급이 중단되었고, 세계교회협의회와 연락도 거의 최소한으로 감소하였는데, 교회가 더 이상 개혁할 무엇이 남았겠는가? 교회는 더 이상 제국주의가 이용 가능한 도구로 의심받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조급히 제국주의 때문에 온 독소들을 제거할 필요도 없다. 교회의 예전(禮典), 전통, 신학, 교의(敎義)도 개혁할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개혁을 제창한다고 변경될 것도 아니다. 자양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고, 합일하지 않으면 연약할 수밖에 없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러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갈 것인데 우리가 더 이상 교회개혁을 제창할 것이 무엇이겠는가?41)
새로운 형세의 변화는 자오쯔천이 앞으로 교회 존재의 기초가 엄중한 위협을 받게 되고, 신자들도 충격과 투쟁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예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는 개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건설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교회는 개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건립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를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서 우리가 마땅히 제창해야 할 교회개혁은 바로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거듭남, 즉 중생으로 역시 교회 전체의 중생이다. 교회 신자의 숫자는 앞으로도 계속 감소하고 또 감소할 것이며, 또 교회의 일들도 손실되고 또 손실될 것으로 잘 알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기쁨으로 소수 중의 소수, 즉 전체 신자들 가운데서 온전히 책임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용히 침묵으로 사상적인 투쟁과 투쟁으로 인하여 올 수 있는 조소와 멸시 그리고 피해를 받아들여야 한다. 몇 년 동안은 새로운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우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질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철저히 전면적인 헌신을 해야 하며, 실천적인 행동과 거짓 없는 사랑으로 우리가 신앙하는 바는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임을 간증해야 한다. 우리의 앞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그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할 것이다. 우리 앞에는 어떤 공로도 세울 수 없고, 오직 고난만 겪을 중차대한 일들이 기다린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몸에 맡겨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사명을 짊어져야 한다. 이 사명은 곧 사람들이 모든 영화를 누리고 나서 인생이 의의도 없고 진실도 없고 가치도 없고 표준도 없고 기본도 없고 귀속도 없음을 깨닫고 생명을 위탁할 길을 찾을 때, 우리가 질그릇을 열어 그들이 필요로 하는 대가 없는 사랑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42)
자오쯔천이 이와 같이 주장하는 근거는 교회가 ‘영혼의 집’이고43) 또한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신뢰의 기준, 도덕의 기초, 가치의 보장, 자아의 실재, 인생의 의의, 영혼의 귀속’이며 ‘정권과 과학이 제공할 수 없는 보배’이기 때문이다.44) 중국 각 지역의 교회에서 모두 ‘우리’와 ‘우리의 질그릇’을 보존하여 ‘천천만만의 작은 불꽃’으로 만들 것이다. 혹시 이를 “역사는 홀시하고 사회는 무시하고 불신자들은 꼭 멸망할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래에 반드시 ‘중국 인민의 영혼의 영광’이 될 것이다.45) 1950년 연말에 자오쯔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46)라는 문장을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념하였다. 이때는 전국이 한국전쟁으로 인한 항미원조운동(抗美援朝運動)에 휘말리고 있었으며, 기독교계도 예외가 아닌 상황이었다. 동시에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말미암아 미국에서 오는 기독교 단체들의 자금 지원도 중단되어 극심한 경제적 위기에 빠졌다. 이렇듯 중국에서 기독교의 성장을 위협하는 위기가 겹겹이 쌓여 있음을 목격한 자오쯔천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인해 위로받았다. 그는 오직 기독교만이 ‘진리’이고 기타 철학과 과학 혹은 역사 모두 현실 세계에만 관심을 두는 ‘편의(偏倚)’라는 주장을 견지하였다.47) 그 밖에도 자오쯔천은 말씀이 성육신하였다는 낮아짐은 나중에 중국교회의 처지를 고려해 준다고 지적하였다.
중국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성탄절은 그처럼 미천하게 대접받을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마스트리도 가질 수 없고, 자기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 수 없을 것이다. 또 친구들과 값비싸고 화려한 선물도 교환하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교회 바깥에 성탄 장식도 하지 못하고, 다채로운 성탄극도 하지 못하며, 장중한 성탄예배도 드리지 못할 것이다. 성도들은 친밀한 공동체 안에서만 혹은 홀로 차가운 방에서 구주의 오심을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삶을 통해 마음과 몸이 곤고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하늘에 속한 따스함을 전해 줄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강생하여 우리의 몸속에도 말씀이 성육신한 빛을 지니고 가장 미천하지만, 가장 구체적인 일을 통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강생한 복음을 간증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48)
자오쯔천 신앙의 복원주의(restorationism) 사상은 교회를 위한 자아 보존적 결론이었다. 그는 공산정권 아래서 능동적이든, 아니면 피동적이든 교회 자체를 유지하고 지켜왔던 많은 인위적인 수단, 즉 교리, 예식, 조직 등의 구조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서방교회에서 온 정치적인 보장도 잃은 채 기독교와 우의적이지 않은 정권 아래 놓이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앞으로 더 이상 ‘기독 장군(基督將軍)’처럼 대규모 전도 집회나 수련회 등 독재적인 수단으로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믿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49) 자오쯔천의 사상에는 복음 그 자체만이 정복되지 않고 생존할 능력이 있어서 어떠한 외적인 침입도 극복할 수 있으며, 어떤 시대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다.50)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다.
4. 박해 속 침묵 1951년 3월 자오쯔천은 옌징대학 전체 사생(師生)들 앞에서 비판받기 시작하였다. 그는 종교의 허울을 쓰고 미국 제국주의의 문화 침략에 종사하였다고 질책받았다. 당국자들은 자오쯔천이 미국의 명령에 따랐다고 승인하면서도 자신은 ‘좌경 종교자’라고 규정하는데 불만을 품고 자오쯔천이 항미원조운동 중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며 헌금도 하지 않은 엄중한 비애국(非愛國) 행동’을 지적하면서 최종 자오쯔천의 태도는 ‘완고’하다고 판결하였다. 결국 3월 10일 옌징대학은 ‘절약검사위원회(節約檢査委員會)’라는 기구에서 “종교를 이용하여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신중국을 파괴하는 독소를 전파하였고, 세계반동종교단체(世界反動宗敎團體, WCC를 가리킴, 저자 주) 책임자의 한 사람이었고, 중국정치협상위원회 대표로서 정부 정책에 대해 암암리에 반대하였고, 삼자혁신을 저항하고 파괴하고 원수를 친구로 삼기를 원하는...” 등 죄명으로 “당장 군중들의 요구에 따라” 옌징대학 종교학부 학장의 직무를 직위 해제한다고 공포하였다. 3월 17일 중화성공회(中華聖公會) 화북교구(華北敎區) 링셴양(凌賢揚) 주교도 성공회 화북교구에서 자오쯔천의 모든 직무를 취소한다고 공개 선포하였다.51)
자오쯔천이 받은 핍박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외적으로는 50년대 반제투쟁(反帝鬪爭)은 그 속에 기독교 지식 계층의 사상을 개조하는 목적이 주된 것이기도 하다. 옌징대학은 미국의 중국 내 본거지이기도 하고 종교학부는 더구나 그 중심이기에 자오쯔천이 제일로 가는 전형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내적으로는 자오쯔천이 제출한 교회개혁 노선은 정부가 원하는 그 주류를 이루어야 하는 제국주의와 단절하고 투쟁하는 노선과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자오쯔천이 삼반운동(三反運動) 가운데서 타격을 받은 것은 삼자혁신 조직에서 자오쯔천의 영향력을 완전히 근절하고 자오쯔천에 대한 공소와 비판을 통해 종교학부에서 삼자혁신 조직의 절대적인 통제권을 확립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로써 자오쯔천은 반동분자로 확정되었고, 교회 인사들은 분분히 그와 관계를 단절하였다. 심지어 누군가가 “자오 선생님은 괜찮은 분이다”라고 해도 비판을 받는 정도였다.52)
잠깐의 침묵 뒤에 1954년부터 자오쯔천의 이름은 다시 공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54년 7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60여 개 교회와 단체를 대표하는 232명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삼자혁신운동’을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으로 바꾸었을 때, 자오쯔천의 이름도 전체 위원 명단에 들어 있었다.53) 1956년 베이징시 삼자애국운동위원회가 설립될 때 자오쯔천은 옌징협화신학원 연구교수의 신분으로 베이징시 삼자애국운동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었다. 비록 자오쯔천의 공개적인 활동이 회복되고, 일부 직분도 담당한 것 같지만 그가 중국교회의 역할은 현저하지 않으며 대부분 시간이 매우 침묵하였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발생한 ‘문화대혁명’은 자오쯔천의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자오쯔천은 끊임없는 비판을 받았고, 집의 책자들과 재산들은 몰수당하고 늘 수색받았으며 체벌까지 받았다. 그 이후에는 강제로 ‘감독노동(監督勞動)’에 끌려갔으며 그 목적은 ‘사상개조’였다. 팔순의 노인이 매일 길거리를 청소해야 했으며, 거주지의 거민자치위원회(居民自治委員會)에 불려 가서 종이상자를 만드는 일도 해야 했다.”54)
5. 질그릇에 담긴 보배 박해 속에서 침묵하다가 자오쯔천은 16년 만에 다시 언론에 등장하였다. 1973년 중·미 외교 정상화 이후 서방 신학자가 방문하였을 때, 자오쯔천은 종교와 사회주의 중국의 의미를 언급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오늘날 종교는 중국에서는 이름도 없다. 종교는 교훈, 교리 혹은 가설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실천에 뿌리를 두고 있다.”55) 1976년 자오쯔천은 방중한 독일 신학자 글뤼어(古愛華, Winfried Glüer)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국에서 과거의 교회는 의의와 기능을 가진 적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이 모든 것이 아무 관계도 없게 되었다.”56) 그리고 1979년 7월, 소천하기 4개월 전 글뤼어에게 서신을 보내며 이렇게 개탄하였다. “나는 진정한 신학자가 아니었다. 나는 본래 나에게 주어진 나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다.”57) 자오쯔천이 진정한 신학자의 응당 감당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은 주요하게는 시대적 환경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한 것이고 관건은 그 자신의 내심적(內心的) 종교 세계가 여전히 신앙을 견지했는가에 있었다.
가령 자오쯔천 초기의 종교 경험에 대한 탐색은 고독한 과정이었다면 40년대의 탐색은 자신을 교회 전통과 교회 공동체에 근거해 믿음의 의탁을 찾고, 교회론적으로 문제의 기초를 찾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50년대 이후의 정치적 타격은 자오쯔천을 교회 생활에서 벗어나게 했다. 50년대부터 소천까지 오랜 세월 동안 자오쯔천은 교회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였는데, 특히 중국공산당의 교회개조와 문화대혁명이 가져다준 장기간의 고통은 그가 응당 감당해야 할 책임과 그에 대해 일을 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신앙적 몸부림을 쳤다. 이것이 그에게 준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의무에 대한 평가에서 회심까지 하였다.
50년대 이후부터 자오쯔천은 ‘순교적 영생’을 택한 것이 아니라 ‘머리 숙인 노예’,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기계’가 되었다. 그는 견수와 보존의 목적으로 순교자적 전통을 내려놓고 정치적 압력 앞에 침묵하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교회와 사랑’이 가장 필요할 때가 바로 교회가 가장 심각한 파괴를 당하고 있을 때였다. 중국교회 상황의 악화뿐만 아니라 자신이 수년간 경영해 왔고, 종교 경험의 요람이었던 옌징대학과 학생단체들과 친구, 후배, 학생들도 정치운동의 공소(控訴) 대열에 합류하고 해체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자오쯔천은 교회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최후 승리의 신앙’까지 지키기 어려웠다.58)
자오쯔천의 마지막 자료는 1979년 7월 26일 그의 수제자 뤄전팡(駱振芳)에게 보낸 한 장의 편지이다.
보내온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다. 나는 이미 92세다. 매우 쇠약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너희들이 난징(南京)대학과 합병한다니 이는 아주 중대한 일이다. 너희들은 지나온 과거를 다시 중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3년 동안 집 밖을 나가지 못했다. 하루에 오백 보 이상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9월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부터 신구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신약 성경은 다 읽었고, 구약 성경은 이미 이사야서까지 읽었다. 종교 역사의 과정을 보려고 한다. 무궁한 우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으로 진행하는지 말이다.
사람들은 나를 백 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너무 늙을 때까지 살기 원하지 않는다. 갈수록 멈추어야 하며 혹은 멈추고 혹은 천천히 해야 한다. 시를 쓰지 못한다. 며칠 전에 칠율(七律) 한 수를 지었다.
‘사인방’을 분쇄한 이후(自從鎖絶四人幇), 다시 시작하는 대장정은 새로운 빛을 발하네(重起長征發異光), 한마음으로 나라를 건설하니 안정이 이룩되고(建國同心成穩定), 현대화 건설에 헌신하니 건강이 증강되네(獻身現化到剛强), 생기발랄 천지는 변화하고(蓬蓬勃勃霄壤變), 들썩들썩 우주는 번창하네(熱熱轟轟宇宙昌),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혁명을 계속하려 했더니(縱使艱難還革命), 혁명은 본래 개시되고 있었구나(本來革命正開張).59)
자오쯔천의 이 편지는 그의 만년의 두 가지 특징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그의 신앙 여정이다. 혹자는 자오쯔천이 만년에 신앙을 포기하였다고 말하지만 “광의(廣義)에서 말하자면 그는 신앙인이었고”60) “진리의 길에서 영원히 한 명의 탐구자였다.”61) 자오쯔천은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인생의 마지막 때에 신구약 성경을 택하였다. 그는 결국 세상의 천변만화(千變萬化)를 하나님이 주관하는지 아니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지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두 번째는 편지 마지막에 부쳐진 시이다. 정치적인 의미로 충만한 이 시는 서신의 앞부분과 어떠한 조화도 이루지 않는다. 끊임없는 정치운동과 박해는 자오쯔천에게 내적인 표현의 기교를 가르쳐 주었다. 30년을 지속하는 ‘전능 정치(全能政治)’ 아래서 정권의 힘은 어떠한 영역에도 바라는 대로 파급할 수 있어서 개인의 사상과 자기 보호적 본능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현상으로 되었다.
1974년 자오쯔천은 그의 제자 우즈팡(吳芷芳)에게 쓴 편지에서 이런 사실들을 밝혔다. 그는 대표적인 정치 간행지 ‘훙치(紅旗)’, ‘학습과 비판’, ‘인민일보’, ‘참고소식(參考消息)’ 등은 모두 “나의 요구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르크스 엥겔스 저작집》, 《고타 강령 비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등을 읽었지만 “머리가 현오(玄奧)하지 못하여 종종 멈추어지고 읽어 내려가기 어렵다”라고 했다.62) 비록 자오쯔천은 아직도 ‘하나님의 치리’에 대해 충분한 긍정을 하지 못한 듯 보이지만 그의 내심(內心)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신앙의 실재를 갈구하였다. 1979년 9월 25일에 뤄전팡이 베이징에서 자오쯔천을 만났었을 때 그는 제자에게 “만약 종교가 없으면 인생은 곧 꿈과 같은 것이고, 종교가 있으면 곧 달라진다”라고 말했다.63) 이는 자오쯔천이 여전히 신앙적인 침묵 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1950년에 그는 ‘질그릇에 담긴 보배’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의 겉모습은 아마 영원히 질그릇일 것이다. 우리의 책임은 이 질그릇에 담긴 보배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보배를 우리의 질그릇에 담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근신해야 하고, 모든 일에 원한이 없어야 하며, 모든 일에 희망을 품어야 한다. 배부르고 따뜻하고, 지식이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자아의 고독과 인생의 공허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질그릇을 깨고 그 안의 보배를 드러나게 될 것이다.64)
인생의 마지막 끝에 서서 자아의 고독과 인생의 공허를 충분히 경험하고, 삶의 의미에 대해 궁극적인 해답을 찾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몇 개월 동안은 자신의 종교 경험 중에서 평안을 찾았고, 신앙의 의의와 가치를 증거하였다. 마치 그 자신의 즐겨 인용하던 성경 말씀처럼 최후에 ‘질그릇’을 깨고 ‘보배’ 앞에서 마음과 영혼의 안식을 얻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마지막 편지를 남기고 3개월 뒤인 1979년 11월 21일 자오쯔천은 91세로 소천하였다. 깊은 침묵 속에 기독교 신앙이 중국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부흥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그날까지 이어졌지만, 자오쯔천이 50년대에 예견했던 것이 끝내는 역사 속에서 검증되었다. 개별적인 질그릇은 끝까지 보배를 보존하지 못하지만, 보배는 여전히 온전한 신앙 공동체 속에서 계승되고 있다. ♣
미주 1) 邢福增, 《尋索基督敎的獨特性-趙紫宸神學論集》, 156-178. 2) 趙紫宸, “今後四十年中國基督敎敎義神學可能的發展”, 《金陵神學誌》, 第26卷 1, 2期(1950), 17. 3) 趙紫宸, 《我被逮住了》, 1. 4) 위의 글, 5. 5) 위의 글, 6-24. 6) 趙紫宸, “今後四十年中國基督敎敎義神學可能的發展”, 16. 7) 위의 글, 19. 8) 위의 글, 21. 9) “全國基督敎會議延開”, 《天風》, 第209期(1950), 12. 10) 趙紫宸, “用愛心建立團契”, 1. 11) “全國擴大籌備會議近訊”, 《天風》, 第221期(1950), 12. 12) “全國基督敎會議決停開”, 《天風》, 第225期(1950), 12. 13) “再退一步希望!”, 《恩友》, 第2卷 8期(1950), 1. 14) 이 5명의 기독교 대표는 吳耀宗, 鄧裕志, 張雪岩, 劉良模, 趙紫宸 등이었다. 15) “中華人民政治協商會議共同綱領”, 《中華人民共和國開國文獻》(文化資料供應社, 香港, 1979), 262. 16) “基督敎人士的愛國運動”, 《人民日報》(1950, 9, 23). 17) 陸定一, “在處理接受美國津貼的基督敎團體會議上的講話”, 《天風》, 第262-63期(1951), 6. 18) 趙紫宸, “論信仰自由”, 《天風》, 第209期(1950), 1. 19) 《中華全國基督敎協進會槪況》(上海: 中華全國基督敎協進會, 1950), 2-3. 20) 吳耀宗, “基督敎訪問團華中訪問記”, 《天風》, 第204期(1950), 5-7. 21) 會談에 참석한 사람들은 吳耀宗, 鄧裕志, 崔憲祥, 艾年三, 江長川, 劉良模, 趙紫宸 등 19명이다. 22) “文件發起人致全國同道的信”, 《天風》, 第233-234期(1950), 3. 23) 新華時事叢刊社編, “中國基督敎在新中國建設中努力的途徑”, 《基督敎人士的愛國運動》(北京:新華書店, 1950), 6. 24) 위의 글, 2. 25) “全國基督敎會議決停開”, 12. 26) “我基督敎界對外宣言訊”, 《天風》, 第227期 (1950), 12. 27) “基督敎人士的愛國運動”, 《人民日報》(1950, 9, 23). 28) 吳耀宗, “八個月來基督敎三自革新運動的總結”, 《天風》, 第262-263期(1951), 14, 16. 29) 吳耀宗, “中國基督敎三自革新運動四年來的工作報告”, 《天風》, 第425-427期(1954), 4. 30) 繆秋笙, “美帝怎樣通過基督敎協進會破壞三自革新運動”, 《協進》, 新1卷 1期(1951), 10. 31) 政府 대표는 舒同(華東軍政委員會 宣傳部將), 潘漢年(上海市 市長), 周而復(上海市 統戰部 副部長), 梅達君(統戰部 幹事), 周力行(華東宗敎事務處 處長) 등이고, 協進會 대표는 吳耀宗, 繆秋笙, 江長川, 吳高梓, 涂羽卿, 江文漢, 艾年三, 劉良模, 陳見眞, 邵鏡三, 鄭敬業 등이다. 32) 姚民權, 羅偉虹, 《中國基督敎簡史》(北京: 宗敎文化出版社, 2000), 265-266. 33) 趙紫宸, “今後四十年中國基督敎敎義神學可能的發展”, 14. 34) 趙紫宸, 《審判之下中敎會的革新》, 27. 35) 趙紫宸, 《基督敎敎會的意義》, 3. 36) 趙紫宸, 《審判之下中敎會的革新》, 1. 37) 趙紫宸, “寶貝放在瓦器里”, 《眞理與生命》, 第15卷 3期(1950), 1. 38) 위의 글, 2-8. 39) 위의 글, 9. 40) 趙紫宸, 《審判之下中敎會的革新》, 23-24. 41) 위의 글, 24. 42) 위의 글, 25. 43) 위의 글, 2. 44) 趙紫宸, “今後四十年中國基督敎敎義神學可能的發展”, 21. 45) 趙紫宸, “寶貝放在瓦器里”, 9. 46) 趙紫宸, “道成了肉身住在我們中間”, 《恩友》, 第2卷 12期(1950), 1. 47) 위의 글, 1. 48) 위의 글, 2. 49) T. C. Chao, “Christian Church in Communist China”, 4. 50) 趙紫宸, 《基督敎敎會的意義》, 32. 51) “趙紫宸嚴重喪失立場”, 《協進》, 6月號(1952), 42. 52) 鄭雲柱, “對‘多一個基督徒, 就少一個中國人’的看法”, 《天風》, 12月號(1988), 17. 53) “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委員會全體委員名單”, 《天風》, 425-427期(1954), 47. 54) 陳宣明, “紫宸遇紅兵-文革風暴中的揷曲”, 《福音文宣社雙月刊》, 第87期(1990), 12. 55) 胡仲揚, “另一次訪問中國”, 《景風》, 第16期(1973), 157. 56) Winfried Glüer, “T. C. Chao and the Quest for Life and Meaning”, China Notes, (XVIII:4, 1980), 129. 57) Winfried Glüer, 《趙紫宸的神學思想》, 308. 58) 邢福增, 《尋索基督敎的獨特性-趙紫宸神學論集》, 224-226. 59) 駱振芳, “趙紫宸博士給我的最後一封信”, 《金陵協和》, 第3期(1985), 34. 60) 위의 글, 35. 61) 위의 글, 34. 62) 吳芷芳, “趙紫宸與吳芷芳書”, 《文史資料選輯》, 第12卷(北京: 文史資料出版社, 1982), 90-91. 63) 駱振芳, “回憶趙紫宸老師和我最後一次見面”, 《天風》, 第12期(1986), 21. 64) 趙紫宸, “寶貝放在瓦器里”, 《眞理與生命》, 第15卷 3期(1950), 9.
♣ 문영걸 | 미도(美道)중국선교연구소 소장, 제주반석감리교회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