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의 회복 의화단운동이 진압된 후 청조로부터 보호 정책의 적극적인 시행이 이루어지고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냄으로써 교회의 회복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중국 천주교회 교인 수는 영세를 받은 자들만 헤아려도 1901년 720,540명, 1903년 811,140명, 1906년 888,131명, 1907년 902,478명, 1910년 1,364,618명으로 늘어났다. 1912년에는 1,431,258명으로 증가하여 20세기 초 10여 년 동안 중국 천주교회의 교인 수는 배로 증가하였다. 1911년 당시 지역별로는 하북성(河北省)이 가장 많은 360,460명이었으며, 강소성(江蘇省) 160,280명, 사천성(四川省) 118,724명, 산동성(山東省) 104,790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교인 수가 이보다 비교적 적은 지역으로는 길림성(吉林省) 12,821명, 운남성(雲南省) 13,200명, 호남성(湖南省) 13,112명, 감숙성(甘肅省) 4,836명 등으로 통계 보고가 나오고 있다.
중국선교 수도회의 증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 중국 천주교회는 10개 수도회가 중국 교구를 맡아 선교 활동을 벌이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회(奧斯定會), 도미니크회(多明我會, 宣道會),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견사회(遣使會), 성언회(聖言會), 성모성심회, 파리외방선교회, 밀라노외방선교회, 로마 성베드로성바오로수도원 등이었다. 여기에 1902년 마카오에 도착한 자유회(慈幼會), 1904년 하남에 도착한 팔마(巴爾瑪, Palma) 성 아우구스티누스회 등 새로운 수도회가 중국선교에 가담하게 되었다. 또한 수녀회의 활약도 돋보이게 되는데, 1903년 사천 성도(成都)에 진출한 성 프란치스코 마리아(方濟瑪麗) 수녀회, 1904년 상해 선교를 시작한 안로회(安老會); 1905년 산동선교에 가담한 독일계 스타일 성신충복회(司代爾聖神忠僕會), 1909년 광동에 들어 온 캐나다 성모시잉무점회(聖母始孕無玷會) 수녀단, 1910년 호북에서 선교를 시작한 이집트 프란치스코 수녀회 등도 중국선교에 합류하였다. 대목구(代牧區)마다 적어도 1개의 수도원이 있었던 중국 천주교회의 수도원은 1906년 전국에 64개, 수도원생은 1,640명에 달하였으며 이들이 중국 천주교회의 성장을 이끌었다.
선교 방법의 다양화 지금까지 중국 천주교회는 교육, 의료 등 다양한 선교 방법을 취하던 개신교회와는 달리 복음 전파와 영세 교인 확장에 집중해 왔다. 그래서 교세 확장에 도움이 된다면 교인들의 소송에도 선교사들이 빈번하게 개입함으로써 민교 분쟁의 단초를 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1908년 로마 교황청은 중국의 교회와 선교사들이 정치, 외교, 소송에 개입함으로써 중국 일반인들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훈령을 내리는 변화를 보였다. 또한 입교한 신자들 신앙의 질을 높이기 위해 입교 이후 2년여 예비신자 기간을 가지도록 하는 등 교리 교육을 강화하면서 기존의 양적 확대 정책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또한 중국 천주교 신자들로 이루어진 수도회를 조직하여 천주교회의 신앙적 성숙을 지향하였다. 1910년 산동 남부에서 활동하던 성언회의 지도하에 성가수녀회가 조직되었고, 강서성에서는 견사회 페란트(Ferrant, 郞守信) 주교의 지도하에 성모선도수녀회가 결성되었다. 직예성 보정(保定)에서는 1910년 성요셉여아회(聖若瑟女兒會)가 조직되었고, 사천성 동부에서는 1910년 성심비녀회(聖心婢女會)가 출범하였고, 호북성 북부에서는 1908년 프란체스코 소형제회가 호북 북부에서 성영회(聖嬰會)를 성립시켰다.
그리고 그동안 육영당 운영 등에 중점을 두어 오던 자선사업 부분에서도 진료소 개설과 병원 개설 등 보다 다양한 선교 방식으로 확대가 이루어졌다. 20세기 초 중국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대표적인 의료 기관으로는 1901년 곤명에 개설한 법국의원(法國醫院), 1905년 전후 중경과 광주에 개설한 인애의원(仁愛醫院)과 도미의원(韜美醫院), 1906년 청도에 개설한 법국의원(法國醫院), 1907년 상해에 개설한 광자의원(廣慈醫院) 등이 있다.
일반 교육 부문에서도 그동안 개신교회에 비하여 뒤처진 면이 있었으나, 20세기 이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변화를 보였다. 1908년 내몽고 천주교회가 전문학교를 열어 서양 문화를 가르쳤고, 1908년 무창의 천주교회가 전문학교를 열어 영어와 불어를 가르쳤다. 복주의 성 요셉(若瑟)학원, 산동 성언회가 5개소에 세운 중덕쌍어중학(中德雙語中學), 1904년 상해 선교 거점 서가회(徐家匯)에서 여자중학의 개설 등은 천주교회의 새로운 교육 선교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1903년 3월 중국 천주교 신자인 마상백(馬相伯)은 상해의 서가회에 진단학원(震旦學院)을 설립했고, 예수회 신부 남종주(南從周)가 그 운영을 맡게 되자. 1905년 서가회의 이공사(李公祠)에 복단공학(復旦公學)을 설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복단대학(復旦大學)의 출발을 이루는 것이다.
천주교회의 이러한 다양한 부문에서의 선교 방식의 전환은 20세기 초 청조의 적극적인 교회 보호 정책과 더불어 민교 분쟁이 급격히 감소하게 되는 상황을 맞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