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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3  통권 275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1695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의화단전쟁과 중국교회

의화단운동의 확산
의화단운동이 확산하자 1900년 4월, 북경 주재 각국 공사들이 청조에 의화단운동 진압을 요청하였다. 5월에는 외국 군대가 의화단운동의 확산에 대비하기 위해 북경과 천진으로 진주하기 시작했다. 6월에는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독일, 미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8개국 연합군이 조직되어 천진을 출발하여 랑방(廊坊)으로 진군하다가 저지당하였고, 17일에는 방향을 천진으로 돌려 대고구(大沽口) 포대를 공격 함락시켰다. 이에 맞서 21일에 청조는 의화단의 애국적 역량을 과신한 나머지 서양 각국과 전쟁을 선포하였고, 의화단운동은 이후 크게 고양되어 북경, 천진에서 산서(山西), 섬서(陝西), 사천 등 각 지역으로 확산해 나갔다. 의화단운동이 일어난 지역에서는 서양교회가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고, 큰 피해를 보았다.

북경에 진출한 의화단에 의해 6월 13일 천주교회 동당(東堂)이 소각 파괴되면서 신부 두 명이 피살되었다. 14일에는 남당(南堂) 건물과 학교, 병원 그리고 고아원이 소각 파괴되었으며, 같은 날 서당(西堂)도 불에 타고 신부가 피살되었다. 교민들은 서십고(西什庫)의 신북당(新北堂)과 동교민항(東交民巷) 교당으로 피신하였는데, 북당은 독일 극동함대 사령관 하인리히(Albert Wilhelm Heinrich)와 파비에르(Pierre Marie Alphonse Favier, 樊國梁)의 주도 아래 무장 저항을 2개월여 이어 나갔다. 천진 의화단은 15일에 청군의 통솔 아래 창문구(倉門口), 서리문(西里門), 진전서(鎭前署), 천후궁북당(天后宮北堂), 망해루(望海樓), 마가구(馬家口) 등 교당을 소각 파괴하고, 많은 교민을 구금하였다.

북경과 천진 이외 각 성의 의화단도 폭풍처럼 거세게 일어났는데, 직예성 경주(景州) 주가하(朱家河) 교당에서는 두 명의 외국인 신부와 천여 명의 교민들이 피살되었다. 남피현(南皮縣)에서도 외국인 신부 두 명이 죽고 100여 명의 중국인 교민이 피살되었으며, 선화(宣化), 보정(保定) 등지에서도 선교사와 교민들이 다수 피살되었다. 

산서성 각지에서도 태원(太原), 분주(汾州), 흔주(忻州) 등 11개 주, 6개 부, 40개 현에서 의화단 활동이 전개되어 교당이 파괴되고 교민과 선교사들이 살해되어 교회가 크게 위축되었다. 

섬서성 영강(寧强) 연자폄(燕子砭)에서도 그라시(Gregory Grassi, 郭西德, 1833∼1900) 주교와 교민 4명이 구타 살해당하였다. 

하남성 경내의 교당도 의화단운동으로 십중팔구 파괴되었고, 요녕(遼寧), 흑룡강(黑龍江), 운남(雲南), 귀주(貴州), 하북(河北), 사천 등에서도 의화단에 의한 교회 공격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의화단전쟁과 신축조약
6월 21일 청조의 선전포고 이후 생명을 보전한 북경 주재 외국인들은 북경 공사관 지구로 피신하였고, 4,000여 명이 55일간 포위되었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미국, 영국, 일본 8개국은 독일군 알프레드 폰 발더제를 사령관으로 하여 50,000여 명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천진을 함락한 다음 의화단을 진압해 나가 8월 14일 마침내 북경을 점령하였다.

1900년 9월 7일 청조는 열강 11개국(8개국 외에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추가)과 북경의정서(신축조약)를 체결하여 의화단전쟁을 종결하였다. 조약에는 배상금(원금 4억 5천만 량, 연리 4% 39년간 총 9억 8,200만 량) 지급, 의화단운동 주모자 처벌, 외국군의 북경 주둔 허용, 총리아문 대신 외무부 신설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전쟁의 결과 중국은 막대한 배상금 압박으로 열강의 경제적 통제 아래 들어갔고, 수도에 외국 군대의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군사적 통제도 받게 되었으며, 청조의 권위는 심각하게 실추되었다.

의화단전쟁 이후 중국교회
의화단운동은 8개국 연합군의 진압으로 종결되었지만, 그것은 중국 기독교 특히 천주교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대략 4분의 3 정도의 천주교 교당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아주 많은 지역의 선교사 세력들이 거의 철저히 궤멸되었다. 의화단운동 이후 청조는 일련의 서양교회 보호 정책을 발표하였고 각 지방 정부 차원에서도 선교사와 교회 및 교회 재산을 보호하도록 했다. 

1901년 원세개는 산동에서 ‘보교간명장정(保敎簡明章程, 이하 장정)’을 선포했다. 모두 10조로 이루어진 이 ‘장정’의 제4조에서는, “관할 구역 내 교당의 선교사에 대해서는 해당 문무 지방관이 책임지고 수시로 주도면밀하게 보살피고 보호하도록 하며, 불태우고 창으로 찌르며 소동을 일으켜 교회에 해를 끼치는 중대 사안은 해당 관원의 해임이나 유임 조처로 끝나지 않고 규정에 따라 엄한 징벌로 다스리며”, “관할구역 내 교당의 선교사에 대해서는 각 해당 지방관이나 각 진영의 문무 관원이 자세히 살피고 보호하도록 하며, 1년 동안 교회와 서로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지낸 자(관원)는 각기 큰 공으로 3번 기록하고, 3년 동안 서로 다투지 않고 평화롭게 지낸 자에게는 그 사안에 따라 상금을 내린다.”라고 명시하였다. 

또한 의화단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배상금을 통해 재기의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이로써 중국에서 기독교회 세력은 청조의 공식적인 보호를 받으며, 다시금 역동적인 선교 역량을 결집할 수 있었다. ♣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북경 자금성에 입성하는 연합군 사진 캡처 https://namu.wiki/w/%EC%9D%98%ED%99%94%EB%8B%A8%20%EC%9A%
B4%EB%8F%99
[2025.7.3.접속함] (아래) 북경의정서(신축조약) 北京議定書(辛丑條約)的搜索结果_百度图片搜索 [2025.7.3.접속함]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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