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비공인교회인 가정교회에 대한 중국 정부의 박해는 해를 더할수록 그 강도가 심화하고 있다. 첨단 장비를 동원해 일일이 모니터링을 하는가 하면 가정교회 지도자들에게 횡령 등 범죄 혐의를 뒤집어씌워 사회적 지탄 대상으로 전락시키거나 사회로부터 무기한 격리하고 있다. 가정교회 기독교인들이 합법적인 여권과 비자를 소지하고, 출국하고 입국했음에도 불구하고 ‘밀입국(변)경죄’ 또는 ‘타인 밀입국(변)경 조직죄’로 고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여러 지역에서 동일한 죄명이 적용되는 것은 지방 정부 자체 조치가 아니라 중앙 정부 주도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 2월 13일 중국 민정부가 공포한 ‘불법사회조직단속방법(非法社會組織取締辦法)’이 5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2000년 4월 10일부터 적용돼 온 ‘단속불법민간조직잠정방법(取締非法民間組織暫行辦法)’을 대체한 것이다. ‘불법사회조직단속방법’ 시행으로 그렇지 않아도 여러 방법으로 탄압에 직면했던 정부에 미등록된 가정교회는 불법 사회 조직으로 단정될 여지가 더 커졌다. 이 때문에 중국 전문가들은 성직자와 성도들에 대한 핍박이 가중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필요한 교회 형태는 전 세계적으로 볼 수 있는 대형교회가 아니라 중국 실정에 맞는 가정교회라는 점에서 기존의 가정교회를 보다 성경적인 교회로 변화시켜 어떤 상황에서도 올바른 ‘에클레시아’가 되도록 하는 게 올바른 길이 아닐까 한다.
혹자는 가정교회를 단순히 가정에서 하는 교회로 생각한다. 가정교회를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목회 자료로 사용하고자 하는 목회자도 있다. 그러나 가정교회는 가정 중심 교회나 프로그램이 아닌 성경이 말하는 신약교회 회복운동의 일환이다. 바울 서신을 보면 초기 교회 공동체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등의 용어를 가정교회 안에서 사용했다.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교회가 몸으로서 유기체적인 관계를 맺도록 각자 받은 은사로 사역하는 역동적인 공동체였음을 알 수 있다. 평신도가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주체적으로 사역하는 교회가 바로 가정교회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4장 11∼12절).
1세기 교회 공동체의 모임에는 다양한 은사 나눔이 있었다. 능력 행함, 병 고침, 영 분별함, 위로하는 일, 구제하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과 같은 다양한 섬김이 있었다. 바울은 결코 고정된 예전 형태를 세우는 데 관심이 없었다. 초기 공동체 모임의 형식과 내용 중 어떤 것은 미리 정해져 있었고, 어떤 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모임 중에 결정됐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라고 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은사의 목적과 부합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장 7절) 여기서 유익한 것은 10장 23절에 따르면 덕을 세우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덕을 세우는 것은 교회 활동의 주된 목적이다.
공동체 지체들의 믿음과 지혜와 지식이 증가하고, 지체들 상호 간에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세움은 지체들이 자기 은사를 갖고 서로 섬기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 줄 때 성취된다. 그런데 섬김은 반드시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이 없는 은사 사용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각 지체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워야 한다. 공동체의 모든 지체는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짐을 서로 지며 서로 같이 돌보고 서로 덕을 세워야 한다(골로새서 3장 16절, 고린도전서 14장 31절, 로마서 15장 14절, 갈라디아서 6장 2절, 고린도전서 12장 25절, 빌립보서 3장 4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절). 만약 공동체에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 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은 공동체 전체에 있다. 심지어 예언을 판단할 책임도 예언자뿐 아니라 공동체에 있다(데살로니가후서 3장 14절, 고린도전서 5장 3∼5절, 고린도전서 11장 33∼34절, 데살로니가전서 5장 20∼22절).
바울 서신에는 선교적 활동을 고무하는 말씀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복음 전파와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에 교회에 부여된 본질적인 사명이라고 강조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을 전파해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게 하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계속 이동했다.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일루리곤에서 로마를 거쳐 스페인까지. 그 결과 복음은 로마 제국 전역에서 열매를 맺으며 퍼져나갔다.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기로 작정된 이방인과 유대인의 충만한 수를 채우는 데 집중됐다(로마서 11장 25∼26절). 성도들은 불신자들의 박해에 미움이 아니라 온유함으로 대응하며,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한다(로마서 12장 17절).
불신자들의 인정을 받고 그들과 화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행해야 한다(로마서 12장 18절). 원수들에게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어야 한다(로마서 12장 20절). 성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하거나 다투지 말고, 흠 잡힐 데 없고 순결한 삶이 되어 악한 세대에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어야 한다(빌립보서 2장 14∼15절). 우호와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하며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봐야 한다(빌립보서 4장 5절, 빌립보서 2장 4절). 예의 바르게 행하고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12절). 성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한다(골로새서 4장 5절). 성도들은 선한 일에 힘써야 하고 대적하는 자가 흠잡을 근거를 찾지 못하도록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한다(디도서 2장 8절, 빌립보서 1장 27절). 현재 중국의 가정교회가 바울의 이런 교회 비전에 일치하고 있는가? 과거 세계교회사에 따르면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시작되면서 만인제사장의 근원적인 의미가 사라지고, 리더십이 소수의 성직자에게 집중됐다. 성직자는 자기들만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성령이 일반 성도들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성직자는 섬기는 종이 아니라 군림하고 지배하는 특권층이 되고, 평신도는 자기 은사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능동적인 사역을 빼앗긴 채 예배에서 수동적인 관람객으로 전락했다.
필자는 중국교회는 복음과 교회의 근본 원칙에서 아직은 멀어져 있지 않다고 믿는다. 특히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정권 아래서 그럴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과거 개혁개방 이전 마오쩌둥(毛澤東)의 ‘적극적인 종교 소멸론’에 따른 정책 아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저항했던 시절보다는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교회의 성장세와 더불어 세속화의 속도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가정교회 모델은 어쩔 수 없을 상황이었다. 공인된 교회인 삼자회 소속을 거부한 채 생존할 방안이었다. 하지만 가정교회가 1세기 기독교 공동체가 애써 지키려고 했던 가정교회 그 모델인지는 묻고 또 점검하면서 새롭게 거듭나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성도 간 유기체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공동체다. 목회자는 제자훈련을 통해 헌신된 성도를 배출하고, 성도는 사역의 현장에서 영혼 구원과 제자 만드는 일을 목표로 삼아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힘차게 살아가야 한다. ‘진정한 가정교회’로 환난과 핍박을 극복하는 중국의 기독교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 쑨빈 | 중국인 사역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