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교안(敎案) 중국교안사는 1870년대 초까지를 제1기, 1870-80년대를 제2기, 1890년대를 제3기로 구분할 수 있다. 1884년 청불전쟁 이후 프랑스는 중국 서남부 지역의 이권을 장악한 것을 바탕으로 장강 유역으로 선교활동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영국도 장강 유역을 세력 범위로 굳힌 바탕 위에서 선교 역량을 확대해 나가면서 이에 대한 저항이 각 지역의 교안으로 주목받았다.
1890년대 교안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교안이 장강 유역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나 서남부와 동북으로 확산하기 시작하였으며, 규모가 전보다 매우 커졌다.
둘째 지금까지는 주로 교당을 공격하였으나, 이 시기에 들어서는 서구 열강이 중국에 개설한 정치·경제 기구와 문화시설에 대해서도 함께 공격을 시도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셋째, 가로회(哥老會)를 비롯한 비밀결사 회당들이 교회 공격을 주도하기 시작했고, 교안을 저지하는 청군이나 민병 조직인 단련(團練)에 정면으로 무력 대결하는 모습까지도 일상화되었다.
호남 지역에서의 교안 1891〜2년 호남 영향(寧鄕) 출신 주한(周漢)은 섬서후보도(陝西候補道) 관직을 지내다 병으로 사직 귀향한 뒤 기독교를 공격하는 인쇄물을 대량 배포하면서 호남 지역 반기독교운동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반기독교 내용을 담은 서적, 게첩(揭帖), 가요, 그림 등 다양한 문건들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는데, 그중 《귀교해사(鬼敎該死)》는 호남에서 80만 부나 인쇄 배포되었고, 〈근준성유벽사전도(謹遵聖諭辟邪全圖)〉는 붉은색과 검은색의 2색 인쇄 선전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 외에도 《격천주(擊天主)》, 《품천주사교(稟天主邪敎)》, 《멸귀가(滅鬼歌)》 등을 제작 배포하였다. 이러한 문건들은 장강 유역 인근 각지로 퍼져나가 반기독교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이들 선전물의 유포를 막아달라고 청조에 요청하였고, 총리아문에서는 호광총독(湖廣總督) 장지동(張之洞)에게 조사와 처리를 지시하였다. 장지동은 이에 대한 금령을 내렸음에도 이를 막을 수 없었다.
강소 지역의 교안 1891년 강소(江蘇)성 양주부(揚州府)에서는 비밀결사 회당이 반기독교 문건을 게첩으로 배포하여 교당 공격을 주도하였다. 게첩에는 “입교자들은 필경 반란을 조장할 것”이라는 등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담았고, 지방관이 이를 금지하는 고시를 배포하였음에도 이를 찢어 내고 “관에서 뇌물을 받고 서양인을 보호하고 있다”라는 등 주민들을 선동하는 게첩을 붙이기도 하였다. 4월에는 5〜6천여 군중이 교당으로 몰려들어 교당을 포위하고 담장을 부수며 소동이 일어났고, 관병이 출동한 뒤 해산하는 일도 있었다.
1891년 4월 강소성 단양(丹陽)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운영하던 육영당(고아원)과 교회학교에서 아동을 폭행 학살한다며 군중들이 몰려들어 교당을 수색하는 사태로 발전하였고, 관병이 출동하여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병사들과 군중들이 다수가 다치는 사건이 있었고, 이후 인근에서 교회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무석(無錫)에서도 1891년 5월 프랑스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육영당에서 어린이를 유괴한다고 항의하는 군중들이 삼리교(三里橋) 천주교당으로 몰려들어 교당을 불 지르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어 인근의 언교(堰橋), 서장(西漳), 양항(楊港) 등지의 교당도 불태워졌고, 단양과 무석 등 6개 현에서 전개된 교안에 대한 사후 처리 과정에서 주도자 21명을 검거하고 은 116,300량을 배상금으로 지급하였다.
안휘 지역의 교안 안휘성 무호(蕪湖)는 1876년 ‘중영연대조약’으로 개항장이 되면서 이를 교두보로 안휘성 각 지역으로 영국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대거 진입하여 선교가 진행되었다. 1891년 장강 유역 천주교회에서 어린이를 유괴하여 안구를 빼내어 약을 만든다는 등 유언비어가 널리 퍼지면서 서양 세력과 서양 교회에 대한 반감이 빠르게 높아지고 있었다.
1891년 5월 무호에서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육영당에서 어린이를 유괴한다고 항의하는 군중들이 교회 건물, 육영당, 학당, 선교사 주택 등의 건물들을 공격하여 불 지르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어 군중들이 해관(海關)으로 몰려가 포위 공격하려 하자 해관 내 요원들이 총을 발포하여 부상자도 발생하였다. 무호 도대가 관병을 이끌고 와서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폭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졌고, 관병이 발포하고 나서야 군중들이 해산하였다. 무호 교안은 안경(安慶) 등 인근 각지로 확산하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호북 및 기타 지역으로 확산 1891년 6월에는 호북성 광제(廣濟)현에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유아를 학살한다며 몰려든 군중 1천여 명이 교당을 불 지르고 영국인 선교사를 살해는 사건이 일어나 청조에서 주도자 2명을 사형, 7명을 도형에 처하고 배상금 65,000량을 지급하였다.
1891년 9월에는 호북성 의창(宜昌)에서도 천주교 성모당에서 아동을 유과한다며 항의하며 몰려든 군중들이 교회 수색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나 교당이 불태워지고 선교사가 다쳤다. 사건이 일어난 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 등 9개국 공사들이 연대하여 청조에 항의하였고, 각국 군함이 한구(漢口), 의창으로 출동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호광총독 장지동이 나서서 주도자 12명을 도형에 처하고 175,771량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타결하였다.
이어 강남의 구강(九江), 강음(江陰), 여고(如皋) 등지에서도 교안이 발생하였고, 상해(上海) 등 동남 연해 지역뿐만 아니라 북방의 열하(熱河)에서도 반교회 선전물들이 출현하는 등 교안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하게 되었다.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