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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3  통권 272호  필자 : 김영철  |  조회 : 1896   프린트   이메일 
[중국 영화]
《연소일기 (年少日記, Time Still Turns The Pages)》
_수렁 속 소년의 외침

홍콩 신예 감독 줘이쳰(卓亦謙, 1987〜 )이 각색하고 연출한 첫 장편 영화이다. 2023년 대만 영화제 진마장(金馬獎)에서 신인 감독상을 수상하였으며, 2024년 홍콩 영화제 진샹장(金像獎)에서는 12개 부문 수상 후보 명단에 올랐다. 중국의 소셜네트워크 더우반(豆瓣)에서 8.4점의 높은 평점을 기록하며, 2024년 한 해 최고의 중국어 영화 중 하나로 손꼽힌다.

줘이쳰 감독은 홍콩성시대학교(香港城市大學, City University of Hong Kong) 크리에이티브 미디어대학(創意媒體學院, School of Creative Media)을 졸업하였고, 본인이 연출, 각색, 촬영, 편집까지 도맡아 만든 첫 단편 영화 《지소재몽리(至少在夢裏, Waiting to Drown)》를 2011년에 상영하였다.

홍콩의 한 고등학교에서 미화원이 교내 쓰레기통에 버려진 자살을 암시하는 쪽지를 발견한다. 교장과 교사와 상담교사 등이 모여서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한다. 교사 정유쥔(鄭有俊, 盧鎮業 분)은 반장 황자이(黃家怡, 吳冰 분)와 상담교사 샤제(蝦姐, 邵美君 분)와 함께 학생을 찾는다. 이런 과정에서 정유쥔은 어린 시절 형 정유제(鄭有傑 黃梓樂 분)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 정쯔슝(鄭自雄, 鄭中基 분)은 공부에 전념하지 못하는 맏아들 정유제를 욕하고 때리고, 아내 정리자신(鄭黎嘉欣 韋羅莎 분)에게도 손찌검하여 결혼생활이 파탄에 이르고, 정유제는 구불구불한 계단을 지나 옥상으로 올라갔다. 원가정(Family of origin)에서 아픈 상처를 겪었던 교사 정유쥔은 아내 린셰얼(林雪兒, 陳漢娜 분)의 출산에 반대하며 이혼의 위기에 직면한다.

영화는 교복을 입은 10살 정유제가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옥상 아래에 돌출 구조물이 있어서 살았다. 정유제는 열심히 공부해서 최고의 명문대인 홍콩대학에 들어갈 거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는 옅은 미소를 짓는다. 

홍콩의 한 초등학교 강당에 선생님들과 전교생이 모였다. 고사리손으로 피아노 연주를 훌륭하게 끝낸 정유제의 남동생 정유쥔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함께 참석한 부모님과 형 정유제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둘째 아들 정유쥔의 피아노 연주가 끝나자, 변호사인 아버지 정쯔슝은 “사람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지만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것을 늘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학교에 10만 홍콩달러를 기부한 아내 정리자신도 일어나 박수를 받았다. 

귀가한 남편은 아내에게 왜 자신의 동의도 없이 고액의 기부금에 서명했냐고 따지면서 폭력을 행사하였다. 이를 보고 기겁한 정유제는 얼른 침대로 숨어들었다. 폭력과 금전·성공 만능주의가 난무한 이 부부 가정의 현실은 화려한 쇼윈도 부부였다.

학교에서 부모님이 교장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때, 형은 컵에 물을 담아서 엄마에게 건네면서 “Mom, your cup of water”이라고 했다. 가족과 함께 귀가하는 차에서 아버지는 “glass of water”이라고 제대로 된 영어를 구사하지 않았다고, ‘쓰레기’라고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큰아들 정유제의 피아노 진도가 지지부진하고, 음이 자꾸 틀리면서 한 곡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다고 투덜댔다. 정유제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던 여자 피아노 선생님을 해고하였다. 새로 모신 남자 선생님은 정유제에게 메트로놈에 박자를 맞추어 피아노를 정확하게 치라고 가르쳤지만, 정유제는 실수를 반복하면서 끝내 어머니를 붙들고 울어 버렸다.

부모는 피아노도 잘 치고 성적도 상위권인 동생 정유쥔을 더 좋은 학교에 전학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성적이 부진한 형 정유제를 격려하기 위해서 정유제가 반에서 10등을 하면 온 가족이 미국 디즈니랜드에 다시 놀러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유제의 성적은 바닥을 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맏아들이 보던 만화책을 찢고, 아끼던 하마 인형을 쓰레기통에 내다 버렸다. 아버지는 또 형이 동생을 데리고 길가와 옥상에서 놀았다고 형을 호되게 야단쳤다. 한방을 쓰는 동생이 말동무가 되어 주지 않고 혼자 잠들자, 형은 외로워서 하마 인형과 혼잣말하며 이야기했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야단맞는 형을 부러 모른척하면서 공부에 집중하는 시늉을 했다.


정유제는 어느 날 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최소한 일기 속에서는 자기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였다. 어린 소년은 인생의 주인공이 되려고 노력했지만, 가족과 학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끝내 현실 세계의 좌절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맏아들이 죽고 난 뒤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아버지는 폭력이 심해지고, 재혼한다. 아버지는 맏아들이 처음으로 피아노로 전곡을 연주한 녹음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정유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홍콩 만화가 셰춰판(謝趠汎)의 만화책 《해적(PIRATE)》에 나오는 “언젠가 네가 되고 싶은 어른이 될 거니까 포기하지 말라”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꿈에 부풀어 살았다. 하지만 만화가 셰춰판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는 놀란다. 

이는 아버지 정쯔슝이 성공한 변호사로서 학생들 앞에서 노력하면 성공할 것이라고 말하는 장면과 교차한다. 성공한 변호사나 만화가가 개인 삶의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더 깊은 좌절을 안겨줄 수도 있다.

둘째는 형이 죽고 나서 아버지와 관계가 급격히 서먹해지고 역시 자책감에 시달리며 학창 시절 내내 방황하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병상에 계신 아버지의 위급한 소식을 받을 때만 가끔 찾아갔다.

원가정에서 아버지의 폭력과 형의 자살로 인해 아픔을 겪었던 정유쥔은 사랑하는 린셰얼과 결혼하였다. 아내 린셰얼은 임신 소식을 흥분해서 전했다. 하지만 남편이 임신 사실을 회피하자 아내는 낙태한다. 이에 신혼인데도 이혼 위기에 직면한다. 폭력 가정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아이 출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학생들은 정유쥔이 이혼했으면서도 결혼반지를 끼고 다닌다면서 위선자라고 놀렸다. 

교사 정유쥔은 유서 쪽지를 작성한 학생을 찾으려고 반장 황자이와 상담교사 샤제와 함께 다니던 중 상담교사는 반장을 의심하게 되는데, 그의 손목이 아닌 옷소매 깊숙한 곳에서 자해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반장은 유서는 자기가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유쥔은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좋은 곳에 차를 세우고 나와서 큰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상담사와 반장에게도 해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쌓인 게 뭐가 그렇게 많았는지 하는 눈으로 정유쥔을 바라보면서 그를 따라 해본다. 이 장면은 30세를 눈에 앞둔 두 명 여성의 서로 다른 인생 모습을 담은 홍콩 펑슈후이(彭秀慧) 감독의 2017년 영화 《나의 서른에게(29+1)》를 떠오르게 한다. 29세 여주인공 황톈러(黃天樂, 鄭欣宜 분)는 암을 앓고 있으면서도 죽마고우인 장한밍(張漢明, 蔡瀚億 분)에게 함께 환하게 크게 웃어보자고 권한다. 또한 일기를 주요 매개체로 사용하는 것 또한 이 영화와 닮았다. 평론가들은 줘이쳰 감독이 이와이 슌지(岩井俊二),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의 영화 《괴물》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한다.

시간은 여전히 페이지를 넘기고 있다는 의미의 영화의 영어 제목처럼, 원가정 청소년의 상처 일기는 진행형이다. 영화의 중국어 제목은 ‘소년(少年)’이 아니라 ‘연소(年少)’이다. 이는 청소년을 포함하는 범위의 폭넓은 세대를 아우른다. 영화 속 10살 어린 소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유쥔은 수업 중에 도대체 누가 유서를 작성했는지 생각하면서 교실 안 학생들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자살을 생각하는 학생은 얼굴을 보아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세상에 쓸모없는 존재이고 내가 사라지면 곧 잊힐 거야” 정유쥔은 고등학생의 유서에서 형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마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거야. 하지만 너와 함께할 수 있어.” 이는 감독이 교사 정유쥔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이다. 정유쥔은 칠판에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수업을 끝내고 반 학생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러주며 인사했다. 영화의 끄트머리에 정유쥔은 유서를 작성한 학생과 대화를 나눈다. 카메라는 학생의 얼굴을 노출하지 않았다.

청력이 좋지 않은 빈센트(Vincent, 周漢寧 분)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단가오(蛋糕, 케이크라는 의미,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의 중국어 梵高와 발음 유사)’라고 불리며 놀림을 받았다. 어느 날 학생들에게 구타를 당하던 빈센트는 피하려다가 가해자를 밀어 계단 아래로 넘어지게 하였다. 빈센트는 교사 정유쥔이 사과문을 쓰라고 했지만 거부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정유쥔은 ‘단가오’라고 별명으로 빈센트를 불러 오히려 빈센트의 반감만 샀는데, 더 이상 별명을 부르지 않고 이름 빈센트로 불러서 화해한다.

줘이쳰 감독은 대학 다닐 때 한 친구에게서 자살 하루 전에 편지 한 통을 건네받았는데, 이런 기억이 그의 2011년 첫 단편 영화 《지소재몽리》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홍콩중문대학교(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와 생명의 전화가 2024년 9월에 공동으로 발표한 자살 데이터에 의하면, 15세 이하의 청소년 자살률이 1년 만에 3배 이상 증가했는데 최근 10년 동안 최고 수치라고 발표했다.

홍콩청년협회(香港青年協會, The Hong Kong Federation of Youth Groups)가 2024년에 발표한 데이터에는, 과반수 이상의 상담교사가 정서 교육의 부족, 학생 상담 공간의 부족, 학생의 정서 문제를 해결할 관련 지식과 기법의 부족 등을 토로했다고 밝혔다. 영화에서 이런 현실을 고스란히 꼬집었다.

교내에 자살을 예고하는 쪽지가 발견되고 긴급회의를 소집했지만, 교사들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상담교사도 학생을 찾기 전에는 학교가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다고 말한다. 부교장은 이 일이 교내에 알려지면 학생들의 성적이 하락할 것에 대해 염려한다. 

교사 정여우쥔은 내심 이 말에 분노를 느꼈지만,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한다. 학교뿐 아니라 가정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어린 소년 정유제는 엄마에게 밤에 잠도 못 자고 낮에는 학업에 집중도 안 되니 정신과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들은 엄마는 미친 사람이나 가는 곳이라고 얼버무린다. 엄마는 시험을 보다가 구토한 정유제를 걱정하는 교사에게 아무렇지도 않으니, 재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약자의 위험신호는 태반이 알고도 모르는 듯 간과된다. 

교사 정유쥔은 17세 명문고 고등학생이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한 뉴스에 대해 달린 네티즌의 나약하여 동정할 가치도 없다는 악성 댓글에 화가 나서 우울증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는 말을 다급하게 녹음해서 올렸다. 

2024년 13년 만에 한국인 자살자 수가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특히 1~3월에 자살 사망자가 증가했다고 한다. 필자는 작년과 올해 3월 17일 동일한 날짜에 지인을 잃어 개인적으로 충격에 휩싸였었다. 자살은 남의 일이나 신문 뉴스에서 보는 일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효경(孝經)》에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아끼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 부모에게 같은 몸을 물려받은 형제자매는 서로 아껴주고 돌봐야 한다. 하지만 영화처럼 동생은 형의 고통을 방관하고 죽은 뒤에 형의 꿈인 교사가 되었다. 형제는 경쟁과 질투의 대상이기도 하다. 형제의 갈등은 성경에서 가인과 아벨로 시작하여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에게 받는 축복 경쟁으로 이어진다. 원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 미디어는 2025년 상반기 출산율이 9년 만에 반등했다는 소식을 다투어 전했다. 동시에 우리는 구직을 포기하는 청년의 수가 역대급으로 증가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되는 무한경쟁 사회 속에서 출산율만 진작시킬 수 없다. 아픈 가족과 사회에 관한 온정과 관심 그리고 유가족에 대한 돌봄 등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






▩ 사진 출처 | 바이두>사진(百度>图片)

▩ 김영철 | 한양대학교 중국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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