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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3  통권 272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1916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19세기 후반 중국에서의 교안 (3)

1870년대 사천 교안 (四川 敎案)
1870년 천진 교안이 외국 공사관의 압박을 받은 청조의 수습으로 타결되었지만 이후 여러 지역에서 교안이 잇달아 일어났다. 그중 사천성 지역에서 특히 교안이 빈발하였다. 

1860년대 말부터 서양 선교사들이 구 천주교 재산을 회수하여 사천 지역에서 적극적인 선교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1873년 이후 사천에서 반교회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검강(黔江)현에서 선교사 2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있었고, 남충(南充)현과 내강(內江)현에서 교당을 부수고 교민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으며, 영산(營山)현에서도 교당 파괴가 있었다.

1876년 이후 인수(隣水)현, 강북청(江北廳) 지역에서 교당 파괴와 교민 공격이 있었고, 부주(涪州) 여러 지역에서는 교당과 교민 가옥 여러 채를 소각하는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교회에 대한 공격은 사천 지역뿐만 아니라 광동의 용주(龍州), 호남의 광평(廣平)과 악양(岳陽), 호북의 효감(孝感)과 무창(武昌), 안휘의 영국(寧國)과 광덕(廣德), 강서의 서창(瑞昌)과 구강(九江), 절강의 처주(處州), 하남의 개봉(開封), 산동의 덕주(德州)와 즉묵(卽墨)을 비롯하여 전국적인 확산을 보였다. 

1870년 복건 교안 (福建 敎案)
1870년 복건성 건녕(建寧)에서는 신사들이 서양인에게 소작료를 내거나 가옥을 매도하지 못하도록 격문을 배포하였고, 1871년 고전(古田)과 복청(福淸)에서 교당 파괴가 있었으며, 1873년에는 복안(福安)에서 교당이 파괴되었다. 

1874년 연평(延平)에서 미국 선교회가 민가를 매입하여 교당을 세우려는 것을 저지한 데 이어 선교사들이 거주하고 있던 주택들을 부수고 선교사들을 축출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건안(建安)에서도 교당 파괴가 있었고, 1876년에는 건녕부(建寧府)에서 교당이 파괴되었다.

1878년 복주에서는 영국 선교사들이 성내 오석산(烏石山)에 건축한 서양식 건물 3채를 불 질렀고, 교당을 성 밖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1879년에는 복청과 건녕에서 교당 파괴와 선교사 구타 사건이 이어졌다.

1879년 봄에 미국 선교사들이 연평에서 서점을 개설한다는 명분으로 건물을 세운 뒤 ‘복음당(福音堂)’이라는 현판을 걸고 선교 거점으로 삼았는데, 12월 14일 예배 구경을 온 어린아이들이 떠드는 것을 조용히 시키려는 의도로 발사한 총이 행인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자 군중들이 모여 선교사를 구타하고 기물을 부수는 사건이 있었다. 

1880년대 교안의 확산
1880년 이후 광동성의 청원(淸遠), 화현(花縣), 대보(大埔), 광서의 남녕(南寧)과 오주(梧州) 등지에서 주민들이 교당을 부수고 선교사를 구타하고 교민을 몰아내는 일이 있었다. 

운남성에서도 1883년 낭궁(浪穹)현 교당이 공격을 받아 프랑스 선교사 떼라스(J. A. L. Terrasse, 張若望)를 비롯한 10여 명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교회반대운동은 영평(永平)현, 몽화(蒙化)청 등지로 확산하였다.

산동성에서는 1881년 제남(濟南)에서 미국 선교사가 건물을 매입하여 교당을 세우려다 주민들의 반발로 중단하는 일이 있었고, 흑룡강성에서도 1883년 호란(呼蘭)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땅을 구매하여 교당을 세우려다가 저지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1884년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동남 연해 지역에서 교회 공격이 급증하였다. 광동성 동완(東莞), 조주(潮州), 게양(揭陽), 불산(佛山) 등지 교당이 파괴되고 선교사들과 교민이 축출되었다. 광주(廣州)에서도 교당이 공격을 받아 훼손되었고, 절강성 온주(溫州)에서도 해관이 공격을 받고 교당 6개소가 파괴되었다.

1886년에는 중경(重慶)에서 신축 교당을 비롯하여 영사관, 교회 서점이 공격을 받아 파괴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강북청에서도 교당과 교회와 병원이 파괴되었다. 

사천 대족현 교안 (大足懸 敎案)
1886년 중경 교안의 영향을 받아 사천성 대족(大足)현에서 영관묘회(靈官廟會) 때 모인 군중들이 용수진(龍水鎭) 등 교당을 파괴하였고, 중수된 교당을 이듬해 다시 파괴하였다. 용수진 교당은 1890년에 다시 세웠는데, 다시 영관묘회가 다가오자 선교사 판델레(Joseph Pandellé, 彭若瑟)는 지현 전보당(錢葆堂)에 영신새회(迎神賽會)를 금지하고 병사들을 파견하여 교당을 보호하게 하였다. 8월 4일 영관묘회가 지현의 공지로 취소되었으나 모여든 군중들은 영관묘회를 막은 것이 교당의 요청 때문임을 알고 교당과 공소와 병원을 공격하고 파괴하였다. 

선교사 판델레는 지현에게 범인들을 체포 엄벌할 것을 요구하였고, 지현 전보당은 사건 주동자로 신사 장찬신(蔣贊臣)을 지목하여 체포하도록 하였다. 장찬신은 사촌 형 여동신(余棟臣)의 집으로 피신한 다음 광산과 제지공장 사람들을 비롯한 백여 명을 모아 무장 대오를 결성했다. 이들은 8월 8일 용수진으로 진공하여 교민 11명을 죽이고 건물 200여 간을 파괴하였고, 교회 공격의 열기는 인근으로 확산하였다. 

사천 총독 유병장(劉秉璋)은 계천배(桂天培)를 대족으로 파견하여 진압하게 하였다. 계천배는 현지 단련 조직을 기반으로 안민국(安民局)을 개설하여 관군의 토벌 작전에 협조하게 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해산책을 동원하였다. 장찬신이 관군에게 투항 귀순하자 여동신은 산속으로 이동해 들어가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893년 중국 정부는 프랑스 주교(舒福)에게 피해를 본 교당을 수리하도록 5만 량을 배상하였다. 


그러나 1898년 여동신이 유인 체포되자 장찬신이 조직을 재건하여 이들을 탈옥시키고 재차 기의하였다. 이때 비밀결사 가로회(哥老會) 성원들도 가담하여 10일 만에 6천여 명이 결집하였다. 7월 1일 장찬신과 여동신 등은 파리외방선교회(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의 선교사 프란체스코 삼비아시(Francesco Sambiasi, 畢方濟)를 인질로 잡고, 청 정부군에 맞섰다. 이들은 한때 청군을 격파하고 동량(銅梁), 안악(安岳), 영천(永川), 강진(江津), 중경, 내강(內江) 등지로 이동하며 교당을 파괴하고 교민들의 재산을 탈취하였다. 그 여파로 인근의 30여 개 주현에서 교안이 일어나 교당과 병원 20여 개소가 파괴되는 등 파장이 심각했다. 청군은 강경 진압책과 회유해산책을 함께 동원하였고, 이듬해 1월 장찬신과 여동신이 부하들과 함께 투항하도록 함으로써 사태의 수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청 정부는 대족 교안의 피해 보상 명목으로 프랑스에 118만 량의 은을 배상함으로써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사천 총독 유병장(劉秉璋) [바이두>바이커 사진 캡처 (아래) 비밀결사 가로회(哥老會) [바이두>바이커 사진 캡처]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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