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년 천진 교안(天津 敎案) 1860년 영불연합군이 천진으로 진입한 후 프랑스는 해하(海河)변 망해루(望海樓)를 점령하여 영사관으로 삼았다. 천진에 진출한 프랑스선교회는 1862년 천진 동문 밖에 고아원인 ‘인자당(仁慈堂)’을 세웠고, 1869년에는 망해루 옆에 부지를 확보하여 서양식 교당(敎堂)을 세우고 인자당을 이전하였다. 인자당은 중국 평민 고아들을 거두어 돌보면서 세례도 주었다.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는 중국인들에게 교회에서는 약간의 사례를 지급하였는데, 아이들을 유괴하여 고아원에 보내거나 거의 죽어가는 아이들을 맡기기도 했다. 선교사들은 맡겨진 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수시로 성찬 예식을 했는데, 이러한 의식에 대한 이해가 없던 민간에서는 선교사들이 아이들의 피와 살을 먹으며, 아이들의 안구와 심장을 꺼내어 약재를 만든다는 풍문이 생겨나 빠르게 퍼져 나갔다.
1870년 6월, 천진에서 전염병이 창궐하여 고아원에서도 전염병으로 죽는 아이들이 30∼40명이나 되었다. 이런 흉흉한 상황에서 어린아이 유괴 혐의로 잡힌 무란진(武蘭珍)이란 인물이 심문 중 교당 문지기 왕삼(王三)의 지시를 받아 어린아이 한 명을 교회에 보낼 때마다 5원의 보수를 받았다고 진술하면서 교회 관련 유언비어가 마치 사실인 것처럼 확산하였다. 이에 천진 신사들이 공묘(孔廟)에 모여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숙의하였고, 거리에서는 교회를 반대하는 격문들이 널리 나붙게 되었다.
6월 19일 천진 도대(道臺) 주가훈(周家勛)이 프랑스 영사관의 퐁타니에(Henri Victor Fontanier, 1830∼1870)를 찾아가서 왕삼 관련 사건 조사를 요청하였으나, 퐁타니에는 날조된 일이라고 답하며 조사를 거부하였다. 얼마 뒤 천진 지현(知縣) 유걸(劉杰)도 영사관을 방문하여 풍문 관련 인자당과 교당 조사를 요구하였으나 역시 퐁타니에는 거절하였다. 이후 삼구통상대신(三口通商大臣) 숭후(崇厚)가 퐁타니에를 방문하여 조사 요청을 하자 마침내 인자당과 교당 조사를 허락하였다.
6월 21일 천진 도대 주훈광(周勛光)과 지부 장광조(張光藻) 그리고 지현 유걸이 유괴범 무란진을 데리고 교당으로 가서 선교사 쉐브리에(Claude Marie Chevrier, 謝福音, 1820∼1870)를 만나 진상 확인에 나섰다. 그러나 교당에는 그가 거론한 왕삼은 없었고, 유괴의 뚜렷한 정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날 오후 교당으로 군중들이 모여들었는데, 교당 사람들과 언쟁이 일어났고, 군중들이 벽돌을 던지고 구타하는 등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 영사관의 영사서리 퐁타니에는 비서장 시몽(M. Simon)과 함께 대신 숭후의 관아로 찾아가서 중국 관원들이 교회를 보호하지 않은 까닭에 교당에서 소란이 일어났음을 항의하였다.
퐁타니에는 숭후에게 호통하고 총을 발사하는 등 소란을 벌인 뒤 관아를 나왔는데, 이때 문 밖에 모여 있던 수화회(水火會) 군중들이 퐁타니에와 시몽 두 사람을 타살하고 시체를 강물에 버렸다. 이후 군중들이 천주 교당과 인자당 그리고 프랑스 영사관을 불 지르고 선교사와 중국인 교민들을 공격하여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프랑스인 선교사 쉐브리에, 영사관 번역관(多瑪三) 부부, 프랑스 상인(沙爾昧松) 부부, 러시아 상인(巴索福, 博羅特頗頗福) 부부 그리고 인자당 수녀 10명 등이 사망하였고, 외국인 20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천진 교안 처리 천진 교안 소식을 접한 영국, 미국, 프랑스, 벨기에, 러시아, 프러시아 그리고 스페인 등 7개국 북경 주재 공사들은 6월 22일 연명으로 공친왕 혁흔(弈訢)에게 공문을 보내어 항의하였다.
숭후는 6월 23일 천진 교안의 경위를 청조에 보고하였고, 청조는 증국번(曾國藩)을 천진으로 보내어 사건 진상을 조사하게 하였다. 6월 25일 청조는 사건 책임이 있는 숭후와 천진 도대 주가훈, 지부 장광조, 지현 유걸 등을 소환 처결하였고, 28일 각 성(省)에 유지를 내려 교안이 확산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증국번(曾國藩)
현장 조사를 맡은 증국번은 7월 26일 상주를 올려 “서양인들이 눈과 심장을 빼낸다는 설은 모두 유언비어여서 전혀 근거가 없으므로 저 사람들이 그로 인해 욕을 많이 당하여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라고 하였고, 교민들이 “사람을 유괴하였다는 것도 증거를 찾을 수 없으므로 없는 일”1) 이라고 하였고, 이후 추가 보고와 수습책을 제시하였다.
10월 5일 동치제(同治帝)가 유지를 반포하여 “천진 백성들이 무리 지어 일으킨 사건은 금지해 마땅한 일이다. ······ 책임이 있는 장광조와 유걸은 흑룡강으로 보내고, 범인 풍가자(馮瘸子) 등 15명은 의법 처리하고, 범인 소추(小錐) 왕오(王五) 등 21명은 군대 충원하도록 ······” 처결하였으며, 10월 7일에 다시 추가 혐의자들에 대한 처결도 지시하였다.2)
청조는 프랑스가 제시한 요구에 따라 각국 영사관, 천주교당과 인자당 등 재산 손상액 백은 21만 량과 보상금 25만 량을 배상하고, 사죄 특사로 숭후를 프랑스로 파견하였다.
천진 교안은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반기독교운동이었으나 외국 공사관의 압력을 받은 청조에 의해 평정되었다. 그러나 이후 각지에서 반기독교 투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1973년 봄 사천성 검강(黔江)현에서 프랑스 선교사 후에(Jean Hue, 余克林)와 중국인 교사 대명경(戴明卿)이 피살되는 사건을 비롯하여 남충(南充), 영산(營山), 인수(鄰水), 강북청(江北廳), 내산(內山), 부주(涪州) 등지에서 잇달아 교당과 선교사나 교민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산동, 복건, 광동, 광서, 서장(西藏), 운남(雲南), 대만(臺灣), 절강 그리고 흑룡강(黑龍江) 등의 성에서도 크고 작은 규모의 교안이 이어졌다. ▤
[미주] 1) 中國第一歷史檔案館, 《淸末敎案》 第1卷 (中華書局, 1996), 833쪽. 2) 中國第一歷史檔案館, 《淸末敎案》 第1卷, 933쪽.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망해루(望海樓) [https://wapbaike.baidu.com/tashuo/browse/content?id=aaf4a9d8d1a0267f82861550 2025.2.23. 접속함] (아래) [사진 출처 | 위키백과]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