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의미에서 역사란 인류가 지구상에서 걸어온 여정의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걸음 속에는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전진이나 발전도 있지만, 그 반대로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인류가 막심한 피해를 보는 일이 허다합니다. 비록 그 시대를 살지 못했어도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여러 가지 기록물과 기억의 연대를 통해 후세대까지 이어집니다.
인문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신중국 전후 시기를 중심으로 외세의 침략, 5·4운동, 항일전쟁,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 반우파 투쟁,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등 채 100년 남짓한 짧은 기간에 대격변의 시대를 살아갔던 중국인들의 집단기억을 살펴봅니다.
저자가 중국인들의 집단기억을 들여다보는 도구로 사용한 것은 포스터입니다. 포스터는 우선 눈에 잘 띕니다. 이미지가 함축성이 있습니다. 아울러 포스터에는 그것이 제작된 시기의 정치·사회적 현상이 그대로 담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저자는 포스터는 어느 특정 시기 역사의 축소판이자, 동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의식이 응축된 결정체라고 합니다. 공감합니다.
하긴 제 기억창고에도 80년대 초반 산아제한에 대한 포스터가 뚜렷이 담겨 있습니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까지 기억하는 포스터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는데, 80년대 중반이 가까워지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로 바뀌었습니다. 남아선호 사상이 지배적인 때라서 아들 낳겠다고 계속 아이를 낳는 가정에 주는 경고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다음 표어는 ‘한 집 건너 하나만 낳자’가 되지 않을까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자는 포스터 중에서도 특히 선전화(宣傳畵)를 중심으로 논점을 전개해 나갑니다. 선전(宣傳)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기도 합니다. 대중을 대상으로 체제나 정책 등을 선전할 목적으로 공공장소, 즉 관공서, 학교, 공장, 거리 등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눈에 쉽게 띄는 곳에 부착해 사용되는 회화적 수단을 선전화라고 부릅니다.
9·18사변과 항전의식(抗戰儀式) 일본 군부와 우익 세력은 일찍부터 만저우(滿洲)의 이권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품습니다. 일본의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만저우에 대한 점령 작전을 감행합니다. 관동군은 닷새 만에 랴오둥(遼東)과 지린(吉林)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고, 이 지역 군벌들에게 압박을 가해 두 성의 독립을 선언하게 합니다. 이어 11월에는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고, 1932년 3월 1일 마침내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합니다. 내륙에서 거주하던 중국인들의 가슴에는 동북 지역의 함락을 의미하는 날짜인 ‘9·18’이라는 숫자가 날카로운 비수처럼 꽂힙니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담배 생산 기업들이 국가적 위기에 처한 국권을 회복하고, 서양 제품을 배격하며, 국민의 애국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앞다투어 애국심을 고양하는 담배를 시장에 선보인 것입니다. 상하이의 복창연초공사에서는 ‘9·18담배’를 출시합니다. 담배 광고 포스터에는 ‘9월 18일은 동북이 함락된 날, 이 담배를 피워 광복의 뜻을 세우자’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러한 이미지가 담긴 담배가 많이 출시됩니다. 당시 담배 광고에는 중국이 처한 현실적 위기 상황을 잊지 말자는 각오를 표현한 내용 외에도 비행기를 주제로 설정해 항공구국(航空救國)을 선전하는 내용들도 자주 등장합니다. 항일전쟁이 격화되면서 포스터도 과격해집니다. 중화민족의 항일 총동원을 촉구해 전방에서는 전투하고, 후방에서는 지원해 끝까지 항전한다는 결의가 내용의 핵심입니다. 거리마다 항전벽화를 제작하고 전단을 살포하는 작업 외에도 만화를 게재한 간행물을 보급하는 일 역시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주요 수단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1958~1962) 결과적으로 크게 실패한 운동이긴 하지만, 마오쩌둥(毛澤東)과 공산당 지도부는 대약진운동으로 사회주의 건설 속도를 올리며, 인민공사를 통해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하고자 하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웁니다. 대약진운동과 함께 선전 포스터 역시 외래의 소련식 모델에서 탈피하여 중국의 전통적 가치를 통한 민족화를 이루려는 경향이 대세를 이룹니다. 동시에 당과 최고 지도자 마오쩌둥의 정책을 선전하는 정치선전 포스터가 눈에 띄게 많아집니다. 공업과 농업생산에서의 대약진을 주제로 사회주의 건설 의욕을 고취하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대약진, 인민공사, 농업생산, 철강 증산 등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중국의 문맹률이 높았던 현실을 고려하면, 단순한 그림과 구호를 통한 강렬한 시각적 호소는 인민대중들에게 그 어느 매체보다 대약진운동의 선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즉각적이고도 강력한 전달 수단이었습니다.
대약진운동이 왜 실패했을까요? 농업과 공업의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가 한 마리도 못 잡은 셈입니다. 그 당시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토지개혁과 인민공사로 중국인들이 잠시 먹고사는 문제가 그럭저럭 해결되어 가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미국을 15년 안에 따라잡겠다는 흐루쇼프의 말에 자극받은 마오쩌둥이 중국을 15년 안에 영국을 뛰어넘는 산업 강국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호언장담을 하면서 인민들에게 부여될 노동의 무거운 부담이 증가합니다. 이 당시 포스터를 보면 거의 환상적입니다. 수많은 중국 인민이 각기 말을 타고 하늘을 나릅니다. 그리고 그 포스터에는 ‘대약진 만세’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진) 철 생산에 지나치게 편중되다 보니 농촌에서는 수확하지 못했고, 때마침 흉년이 들어 중국 전역이 대기근 상태로 빠져듭니다. 이 시기 대략 4천 (또는 기록에 따라 5천만) 명이 기근으로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 기반을 잃은 마오쩌둥은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국가주석직을 내어놓고 권좌의 뒤로 쓸쓸하게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1966~1976) 1959년 4월 마오쩌둥이 국가주석 자리에서 물러난 뒤 류샤오치(劉小奇)가 그 뒤를 잇습니다. 류샤오치는 당시 베이징 시장이던 펑전(彭眞), 당 총서기 덩샤오핑(鄧小平) 등 실권파와 함께 표면적으로는 마오쩌둥에게 협조했지만, 실제로는 대약진운동에 대한 조정 정책에 들어갑니다. 우선 시급한 농업 생산력 회복에 주력하게 됩니다. 1962년부터 1966년까지는 주로 농업생산을 주제로 한 선전화가 다수 제작됩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종종 문화대혁명에 관한 책과 글을 올렸습니다만, 이 책에서도 문화대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제법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의 야심이 일으킨 큰 사건이기도 합니다. 마오쩌둥은 비록 권좌에서 물러났지만, 쉽게 모든 것을 내려놓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마오쩌둥의 눈에는 새로운 지도자들이 중국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부활시키려는 주자파(走資派)로 보였고, 그들로 인해 중국에서는 과거 자신이 일구었던 혁명의 열정이 사라졌다고 믿게 됩니다. 그는 이제 자신이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한 명분을 찾게 되었고, 결국 광란의 세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됩니다. 마오쩌둥이 신격화하고, 폭력선동이 그려진 선전화가 눈에 많이 띕니다. 그 시절을 겪은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청년들의 몸과 마음은 성인이 되어서도 회복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지식인들, 부모들은 더욱 안타깝습니다. 가해자 역시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동시에 문화대혁명의 열기는 급속히 냉각됩니다. 혁명의 광기에서 깨어나면서 사람들은 무질서하던 자신들의 파괴적 행위들을 반성하고 차츰 일상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개혁개방으로 인한 경제의 급속한 발전은 포스터에서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색채를 걷어내고, 정치적 구호보다는 경제적 풍요를 부각하게 됩니다. 시장경제를 통한 경제적 발전은 국민의 생활 수준을 향상했고, 과거 집단의 생존을 위한 분투보다는 개인의 가치와 개성을 중시하는 생활 형태로 변화됩니다. “과거 획일화한 정치의식과 심미 기준에서 탈피해 개성화하고 다원화한 중국의 현실은, 포스터라는 형식으로 고스란히 녹아들었습니다. 따라서 선전화를 비롯한 다양한 포스터는 중화의 대륙에서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간 중국인들의 집단기억을 담지하는 하나의 사회적 표상이라고 하겠습니다.” ▨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