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예술작품에는 작가의 심상과 창의력이 담깁니다. 아울러 그것이 음악이든 조각이든 회화이든 문학작품이든 간에 작가가 살았던 시대정신이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개개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대를 뛰어넘는 사념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물론 작가들은 단순히 그 당대의 사건이나 정신적 흐름에만 치우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신화나 설화에도 관심을 두고 그것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인문학자인 나카노 미요코 교수는 이 책 《소설로 보는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통해 중국인의 대표적인 소설 작품 속에서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들여다봅니다. 저자의 시점은 이야기의 구조에서 인간 인식의 방법, 비극과 희극, 허구와 현실, 작자와 독자 그리고 저자가 일본인이다 보니 일본인과 중국인의 사고방식 차이까지 이어집니다.
시대구분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중국 근대소설이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습니다. 다소 지엽적인 느낌도 들지만, 문득 중국에서는 근대, 현대, 당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자료를 찾다 보니 중국의 역사학자 저우빈 교수의 논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근대, 현대, 당대 중국 사회의 비교연구〉입니다. 저우빈 교수에 의하면 근대, 현대, 당대는 엄연히 다른 시간개념이라고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요. 근대 중국은 1840년부터 1949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중국 역사적 시기로 구분하자면 아편전쟁부터 신중국 수립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현대(現代)란 기본적으로 고대(古代)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쓰입니다. 고대 중국은 기원전 221년부터 17세기까지로 보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이 시기 중국은 봉건국가의 수립, 문화부흥 시기를 거치게 됩니다. 현대는 일종의 문화개념이기도 합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과 문화 사상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중국 사회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당대(當代)는? 당대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부터 현재까지의 중국 역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현대와 당대의 구분에 관해선 중국 내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엇갈리고 기준이 모호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경화연(鏡花緣)》과 《걸리버 여행기》 중국에는 고래로 저명한 대여행가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대의 장쳰(張騫), 진대의 파셴(法顯,) 당대의 쉬안좡(玄奘), 원대의 츄추지(邱處機), 명대의 정허(鄭和) 등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삼장법사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쉬안좡은 인도 불전을 구하러 창안(장안, 長安)을 떠난 뒤 중앙아시아를 오가며 18년의 세월을 여행했다고 합니다. 18년! 대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는 매력 있는 여행 문학이 없다는 점이 궁금해집니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요. 파셴의 《불국기(佛國記)》, 쉬안좡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리즈창(李志常)의 《장춘진인(長春眞人)》, 《서유기(西遊記)》도 각각 귀중한 기록이긴 하지만, 여행 문학이나 모험 문학의 범주에 넣을 경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이븐 바투타의 《삼대륙 주유기》에는 한참 못 미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청대 후반 리루전(李汝珍)이 쓴 《경화연(鏡花緣)》을 소개합니다. 저자는 이 소설을 예로 들면서 참으로 재미없다는 말을 먼저 꺼냅니다. 소설의 줄거리를 보니 그 말이 이해됩니다. 탕아오(唐傲)라는 남자가 50세가 넘어서 겨우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리가 되지만, 공연한 누명을 쓰고 은퇴를 해야 할 곤란에 처합니다. 그러던 차에 꿈에 선인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앞서 측천무후의 명령에 따라 눈 내리던 날 철에 맞지 않은 꽃을 피웠던 천상의 백 개의 꽃들이 천제의 노여움을 사 하계에 떨어져 백 명의 아가씨로 전생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여든여덟 명은 우리 중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열두 명은 이방에 있어 영락했다고 합니다. 그대가 해외를 돌다가 열두 명을 구한다면 큰 공덕이 될 겁니다.”
주인공 탕아오는 무역상을 하는 처남 린즈양의 배를 타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둘러본 30여 개의 나라들은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나라들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경화연》을 《걸리버 여행기》와 비교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그 가운데 여든여덟 명은 우리 중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열두 명은 이방에 있어 영락했다고 합니다.”라는 부분을 주목합니다. 영락(零落)은 초목의 잎이 시들어 떨어짐 또는 세력이나 살림이 줄어들어 보잘것없이 됨을 뜻하지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부각하는 대목입니다.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중국인들도 ‘우리 중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비극을 싫어하는 중국인 《홍루몽(紅樓夢)》이 성립된 것은 18세기 중엽인데, 인쇄되어 널리 유포된 것은 19세기 들어서라고 합니다. 그 뒤로 이 소설은 ‘홍미(紅迷)’라 불릴 정도로 열렬한 독자를 낳는 한편, ‘음탕함을 가르치는 책’으로 관에 의해 금서가 되기도 합니다. 왕궈웨이(王國維)는 《홍루몽》이 비문학적인 것으로 천대받던 존재에서 문학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중국인들의 국민성은 현세적이고 낙천적이다. 그런 까닭에 이 정신을 대표하는 희곡과 소설은 그 어떤 것도 이런 낙천적인 색채를 띠지 않는 것이 없다. 슬픔에서 시작해서 기쁨으로 끝나고, 이별로 시작해서 만나는 것으로 끝나며, 곤경에서 시작해 형통으로 끝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독자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그러나 왕궈웨이가 《홍루몽》의 결말이 비극으로 치닫는 내용인데도 문학적인 가치를 부여해 준 점은 아이러니합니다.
허구와 현실 중국인들은 대체로 허구를 싫어하고 사실을 숭상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허구 문학으로서의 소설은 문학으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의미에서 소설이 되고, 또 문학으로 간주하게 된 것은 문학혁명 이후입니다. 저자는 중국인이 인식의 경계를 촉감이 확실한 관능의 영역으로 제한했다고 합니다. 그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문명권을 세계(전체)로 여기다 보니 그 경계를 넘어 인식을 비상시키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따라서 그들은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데 흥미가 없었습니다. 시간상으로는 “아직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말한 쿵쯔(孔子)의 유명한 말로 상징됩니다. 중국인들은(근대까지로 국한할지 모르지만) 사후세계에 대한 사색을 거절했다는 점에 관심이 갑니다. 그들은 오관의 감각이 미치는 촉감이 확실한 관능의 영역으로부터 밖으로 인식이 비상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악으로 치부되고 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보니 이상세계를 꿈꿔보게 되지요.
중국인의 이상세계 도원경(桃源境)이란 단어 아시지요? 무릉도원처럼 속세를 떠난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으로 선경(仙境) 또는 파라다이스를 말합니다. 중국에도 도원경을 상징하고 묘사하는 소설이 제법 있습니다. 공통된 점은 성경에 나오는 좁은 문처럼 가는 길도, 들어가는 길도 만만치 않은 것이지요. 저자는 이상세계를 그린 몇몇 소설들의 공통점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도원경이란 의심할 나위 없이 현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거기에 이르는 협로는 유교적 현실주의나 합리주의가 설파하는 매일 매일의 끊임없는 자기 수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은 ‘일본인과 중국인’입니다.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을 비교합니다. 각기 받아들이는 외래문화, 나아가서 문화 일반에 대한 양자의 사고 방법의 차이를, 즉 양자의 언어 감각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그중 코카콜라를 중국어로 ‘커커우커러’라고 부른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뜻이 막연히 코카콜라를 중국식으로 발음하는 것으로만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 뜻이 ‘可口可樂’이라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입에도 맞아야 하고 즐겨야만 한다’라는 뜻이군요. 막연하긴 하지만 ‘뭔가 즐거운 음식물’이라는 뜻은 전달되네요. 재밌습니다. ▩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