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특정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서 그 시대의 흐름과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같은 사건을 두고도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지요. 그리고 사람은 자신의 관심사가 아닌 한 고개를 돌립니다. 굳이 알 필요가 없다고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역사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학자 E. 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바이런은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이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감히 덧붙인다면, ‘현재를 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입니다.
이 책을 엮은이들은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을 통해 중국을 들여다봅니다. 100개의 사건을 추리는 데만 해도 쉽지 않았으리라 짐작합니다. 글의 순서는 ‘주나라부터 진나라까지(고대 중국의 국가들)’, ‘한나라부터 수나라까지(천하의 분열과 재통일)’, ‘당나라부터 송나라까지(화려한 문화가 꽃피다)’, ‘원나라부터 청나라까지(역사의 무대가 확장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혁의 물결과 현대중국의 성립’ 등입니다. 지면 관계상 몇 가지 사건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제자백가는 중국 춘추전국시대(BC 8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 중국 전통이 확립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기원전으로 올라갑니다. 기원전 551년에 유가를 창시한 공자가 탄생합니다. 기원전 320년경에 공자의 사상을 접하고 감화한 맹자가 여러 나라를 주유합니다. 기원전 233년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한비자가 생을 마감합니다. 이 당시 태동한 여러 사상은 오늘날까지 동아시아에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제자백가의 제자와 백가는 수많은 학자와 학파를 의미하지만, 기록에는 약 14개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제자백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사기(史記)》에 나타나며, 유가(儒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논리학파), 묵가(墨家), 종횡가(縱橫家: 외교술파), 잡가(雜家), 농가(農家) 등 9류에 소설가(小說家)가 포함됩니다. 이에 더해 병서가(兵書家), 수술가(數術家), 방기가(方技家), 병가(兵家), 의가(醫家) 등도 등장하기 때문에 이를 제자백가에 포함하기도 합니다. 이들 제자백가는 각자의 관점에서 사회와 인간의 삶에 대한 사상과 학문을 제기했고, 같은 학파조차 시대와 장소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들을 보였습니다.
과거제 시행 100가지 사건 중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란(亂)입니다. 정권의 속성이 그렇지요.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을 지혜롭게 쓰지 않으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물론 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욕심을 가진 자들이 뭉쳐서 나라를 뒤집어놓기도 하고, 외부의 세력이 치고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나라를 안정되게 운영해 나가려면 적재적소에 인재를 잘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과거제의 시행은 혁신적입니다. 최고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이들(오직 군주에 대한 충성심으로만 채워진)만 포진해 있는 국가는 쉽게 병이 듭니다. 그리고 무너집니다.
581년에 문제 양건(楊堅)이 수나라를 개국합니다. 문제가 위나라의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과거 제도를 통해 관원을 선발합니다. 621년 당나라가 건국 이후 처음으로 과거제를 시행합니다. 과거제는 신분에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입니다. 과거에 급제한 이들은 입신양명은 물론, 세금과 부역의 면제 등 여러 혜택을 받습니다. 또한 능력이 검증된 인재들이 관직에 진출하면서 원활한 국정운영이 이뤄졌습니다. 이로써 귀족들에게 독점된 관료 사회가 무너지고 황제 중앙 집권제가 완성됩니다. 수나라 때 만들어져 당나라, 송나라 때에 흥성한 과거제는 1,300년을 존속하며 중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대만 수복 중국 본토와 대만의 문제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합니다. 대만의 역사를 들여다봅니다. 대만은 원래 중국의 영토였으나 명나라의 무능과 부패로 1624년에 해상 패권자로 등극한 네덜란드가 팽호도(澎湖島)를 점령합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됩니다. 그러자 1662년 정성공은 군사와 전함을 거느리고 대만 공략에 나서 코예트(Coyett)가 통솔하는 네덜란드군과 맞붙습니다. 정성공은 대만성을 포위해 네덜란드군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여 결국 네덜란드의 항복을 받아 내고 대만을 되찾습니다. 당시 대만은 수많은 고산족과 한족들이 함께 생활했는데, 네덜란드의 가혹한 식민 통치로 고산족과 한족들은 종종 봉기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만 현지인의 봉기는 매번 네덜란드군에게 진압당해 정성공(鄭成功)(이름값을 하는 듯합니다.)의 대만 진군 이전까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정성공의 대만 수복은 명나라로서는 위국(衛國)하는 일이었지만, 청나라로서는 정성공 일족이 벌인 반청운동을 그저 두고만 볼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하여 1683년, 강희제는 시랑(施琅)을 복건수사제독으로 임명하여 대만 정벌을 명합니다. 시랑은 총공세를 펼쳐 팽호도와 그 주변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결국 정성공 사후 권력의 정상에 있던 정성공의 둘째 아들 정극상(鄭克塽)은 같은 해 청나라에 항복합니다. 이로써 대만은 청나라의 통치에 들어갑니다. 긴장 상태가 완화되지 않고 있는 중국공산당 정부와 대만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염려됩니다.
톈안먼 사건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건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중국 정부의 무차별 인권 탄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 우리나라의 5.18민주화운동이 광주학살, 광주항쟁 또는 광주사태라고 표현되듯이 톈안먼 사건도 톈안먼 사태, 톈안먼 대학살, 베이징 대학살 사건, 6·4 사건 등으로도 부르기도 합니다. 중국에 대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모두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톈안먼 사건에 대해 매우 민감합니다. 매해 6월 4일이 돌아오면 비상이 걸립니다. 인터넷 검열도 심해지고, 톈안먼 광장은 공안 요원들이 점령하다시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곤 합니다. 특히 6·4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합니다. 2023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열린 중국 항저우(杭州) 아시안게임에서 여자 육상 100m 허들 결승전에서 1, 2위를 한 중국 선수 두 명이 결승선을 밟은 뒤 포옹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이들의 골반 쪽에 트랙 번호 6번, 4번이 붙어있었고 이 사진은 6월 4일 톈안먼 사태를 연상시킬 수 있다고 하여 중국 모든 매체에서 이 사진을 급하게 삭제했다고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톈안먼 사건 이후 태어난 중국 세대들은 톈안먼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한국은 그나마 나은 상황이겠지요?
중국 현대사에서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톈안먼 사건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일어납니다. 학생, 노동자, 시민들이 정부의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 정부가 군사력을 동원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과잉 진압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냅니다.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된 화궈펑(華國鋒)이 덩샤오핑(鄧小平)을 공산당에 복귀시킵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도시와 농촌의 빈부격차가 심화하자 중국인들은 정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됩니다. 한편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만이 유일한 정치 세력이며, 공산당을 통한 개혁 추진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여깁니다. 이런 생각은 당과 당 간부들에게 강력한 권력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덩샤오핑은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운동은 중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라며, 정치 개혁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반면 후야오방은 언론의 자유화, 법치주의 보호, 사상 해방, 당내 민주화 등 민주주의 노선의 정치 개혁에 힘을 쏟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자유주의 노선을 걷는다는 이유로 당내 보수파의 의심과 불만을 초래합니다. 정치 민주화에 우호적인 인물이자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후야오방(胡耀邦)이 1989년 4월 15일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사망합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에서는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등의 지식인과 학생들이 후야오방의 총서기직 사퇴에 관한 진실을 밝힐 것과 그의 명예 회복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후 대학생들의 시위가 불길처럼 번집니다. 결국 10만 명의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으로 집결하여 후야오방을 추모하며 그의 이상주의가 현실로 실현되길 바라게 됩니다. 시위 군중은 더욱 늘어나, 수십만 명의 학생과 노동자, 시민이 참가해 정치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게 됩니다. 기록상으로는 시위대가 100만 명까지 불어났다고 합니다. 결국 공산당 지도부의 양상쿤(楊尙昆) 등의 강경보수파는 무력 진압을 실행에 옮깁니다. 인민해방군이 진주하여 학생, 시민 등을 상대로 무차별 발포해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집니다. 마침 이 무렵 중소(소련 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을 취재하기 위해 중국에 입국한 외신 기자들이 즉각 중국 정부가 초래한 이 유혈사태를 전 세계에 알립니다. 국제사회에서 중국 정부의 무차별적인 인권 탄압을 비판하는 여론이 빗발쳤고, 중국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됩니다.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