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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5  통권 267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2293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선교 자유 공인 이후의 중국 개신교회 (3)

허드슨 테일러
제임스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戴德生, 1832–1905)는 영국 출신으로 중국내지선교회를 창설하여 중국선교의 새로운 장을 연 인물이다. 그는 1832년 5월 21일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Yokshire)주 반즐리(Barnsley)에서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를 중국 선교사로 보내기로 서원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신앙 훈련을 시켰다. 그는 17세이던 1849년 세례를 받고 선교사로 헌신을 결단하였고, 런던선교회 선교사 메드허스트(Walter Henry Medhurst)가 저술한 China: It’s State and Prospects를 읽고 중국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소명을 갖게 되었다.

그는 중국선교를 위해 중국어와 의학 공부를 시작하였고, 마침내 런던의 중국복음선교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의 파송을 받아 1853년 9월 19일 중국으로 향하였다. 1854년 3월 1일 중국 상해에 도착한 그는 비밀결사 소도회(小刀會)가 태평천국의 흥기를 틈타 상해에서 소요를 일으키는 혼란한 가운데서도 런던선교회 선교사 로크하르트의 도움을 받아 상해에 정착하였다. 이후 그는 중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성경과 선교 문서를 배포하였으며, 스스로 중국어 학습에 정진하였다. 그는 중국인 복장에 변발까지 하고 선교 여행도 여러 차례 나섰으나, 목사안수를 받지 않은 데다 고등교육도 마치지 않은 그가 중국 선교현장에서 입지를 확보하기 어려워 1857년 5월 29일 중국복음선교회 소속 사역자 직을 사임하였다.

그는 건강이 나빠져서 1860년 영국으로 일시 귀국하였고, 당시 영국에서 교회부흥운동이 일어나 선교 열정이 높아지고 있는데 힘을 얻어서 1865년 ‘중국의 영적 필요와 간구(China’s Spiritual Need and Claims)’라는 제목 아래 중 선교 헌신 참여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호응 열기를 기반으로 1865년 6월 27일 중국내지선교회(The China Inland Mission, 內地會)가 조직될 수 있었다. 그는 부인의 도움을 받아 그해 10월 China: It’s Spiritual and Claims 라는 선교 가이드북을 발행하였는데, 이 책자는 중국선교를 위한 필독서로 1890년까지 8판 출판이 될 정도로 널리 보급되어 읽혔다.

1866년 5월 26일 허드슨 테일러 부부를 포함한 내지회 선교사 17명이 런던에서 출발하여 9월 30일 중국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절강성 항주(杭州)로 사역지를 결정하고 선교를 시작하였고, 1년 만에 항주에 교회를 세웠으며 신자 수는 1,500명에 이르렀다. 그들은 항주뿐만 아니라 인접한 영파(寧波), 소흥(紹興), 상주(常州), 대주(臺州) 등지로 선교 활동 영역을 넓혀 나갔고, 1867년에는 서쪽 내륙에 있는 강소성 남경(南京), 진강(鎭江) 등지, 1868년 6월에는 양주(揚州)로 진출하였다. 이후 내지회는 본부를 상해로 옮겨 초교파적 중국 선교사역을 역동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내지회는 기존의 선교회와는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째, 선교 거점 중심이 아니라 미전도 지역 선교에 중점을 두었고, 
둘째, 교육·의료·구제 중심보다는 복음 선교를 우선하였으며, 
셋째, 출신 국적이나 소속 교단과 무관하게 선교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결집하였고, 
넷째,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생활을 중국인과 같이하였으며, 
다섯째, 선교 자금은 자유 헌금을 기반으로 조달하였으며, 
여섯째, 본부를 모국에 두지 않고 중국에 두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내지회의 중국선교에는 각국의 후원과 많은 헌신자의 참여가 이어져서 1893년까지 중국 14개 성에 123개 선교부를 개설하였다. 1895년에는 614명의 외국인 선교사, 462명의 중국인 협력자가 소속되어 사역에 참여하였으며, 260개 전도소가 개설되고, 신도 수는 5,200명을 헤아리기에 이르렀다. 

그는 중국선교에 온 힘을 다하는 동안 어려운 과정도 많이 겪었다. 초기에는 선교회의 후원 중단과 현지 선교사들에게 무시당했고, 건강이 나빠져서 귀국 길에 오르기도 했다. 

중국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바로 1867년 8월에 딸 나리아 그레이스가 폐렴으로, 1870년 2월에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아들 새뮤얼이 장염으로, 그해 9월 해로 태어난 아들 노엘이 20일 만에 죽는 아픔을 겪었고, 13일 뒤 아내마저 결핵으로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당하였다. 자기 자신도 결핵과 이질로 계속 고통을 당하였지만, 중국선교에 헌신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힘을 기울였다.

1900년 5월에 절정을 이룬 의화단운동이 중국에 널리 확산하는 가운데 내지회 소속 선교사들이 특히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이때 죽임을 당한 외국인 선교사가 135명, 선교사 자녀들이 53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특히 내륙 깊이 들어가서 사역하고 있던 내지회 소속 선교사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였는데 그 아픔을 그 스스로 크게 졌다. 


허드슨 테일러는 1902년 내지회 대표의 자리를 사임하고 귀국하였다가 1905년 가족들과 함께 중국을 방문하여 사역지들을 둘러보던 중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세상을 떠났다. 대학 졸업장도 없이, 목사안수도 받지 않은 그가 중국 선교현장에서 이룩한 업적은 괄목할 만한 것이며, 그의 헌신은 내지회 선교 사역지마다 그를 ‘중국의 은인’이라 칭송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허드슨 테일러[바이두>사진 [https://image.baidu.com/search]  (아래) 중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의 생애와 사역을 기념하는 화보집의 중국어판 표지.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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