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장로회의 본격 선교 개시
리처드 콜(Richard Cole, 谷玄) 선교사는 1844년 7월 21일 중국에 도착하여 마카오에서 화화성경서방(花華聖經書房)을 설립하고 문서 선교를 위한 인쇄 출판을 주도하였다. 콜 선교사의 부인은 1846년 선교부에서 세운 진광서원(眞光書院)을 맡아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고, 1847년에 철수하였다.
맥카티(Davie B. McCartee) 선교사는 콜 선교사와 함께 1844년 7월 21일 중국에 도착하여 영파에 진료소를 열고 의료선교를 전개하였다. 1845년에는 인쇄소를 설립하여 문서선교에도 힘을 쏟았다.
라이트(J. K. Wright) 선교사 역시 1844년 중국에 도착하여 상해에서 선교 활동을 개시하였고, 1860년에는 상해장로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상해 인근의 항주, 소주 등지로도 진출하여 순회 선교를 진행하였다.
앤드류 하퍼(Andrew P. Harper) 선교사는 신학과 의학을 전공한 뒤 컬버트슨(M. S. Culbertson), 루미스(A. W. Loomis), 웨이(R. Q. Way) 선교사와 함께 1844년 중국으로 파송받아 마카오에서 중국선교의 기반을 닦았다. 그는 1845년 선교부에서 세운 남학교를 맡아 1846년 합류한 존 프렌치(John B. French) 선교사와 윌리엄 스피어(William Speer) 선교사와 함께 이끌었고, 1851년에는 진료소를 개설하여 의료 사역도 본격 전개하였다.
윌리엄 마틴 윌리엄 마틴(William A. P. Martin, 丁韙良, 1827-1916) 선교사는 인디애나의 목사 집안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한 뒤 중국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850년 부인과 함께 홍콩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미국의 중국선교 전진 기지였던 영파선교단에 합류하였다. 그는 1863년 북경으로 사역지를 옮긴 뒤 남자 기숙학교 진리의 전당(Truth Hall)을 개설하여 교육 선교에 헌신하였고, 하북 보정(保定) 선교 기반도 닦았다. 마틴은 중국의 실정에 대한 평가와 서양 기독교의 우위 선양을 위해 중문 저술도 다수 남겼는데, 그의 저서 《The Evidence of Christianity》를 중문으로 번역 출간한 《천도소원(天道溯原)》(1854)은 중국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서양 종교와 과학을 격조 있는 문장으로 집필한 선교 저작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권선유도전(勸善喩道傳)》(1858)도 그의 대표적 저술로 알려진다.
그는 영국 선교사 조셉 에드킨스(Joseph Edkins, 艾約瑟) 등과 함께 재화실용지식전파회(在華實用知識傳播會) 조직을 주도하고, 기관지 《중서문견록선편(中西聞見錄選編)》을 1872년 8월 창간하고 주편을 맡아 문서 사역을 이끌었다. 1878년에는 다른 선교사 6명과 함께 상해성교서회(上海聖敎書會)를 조직하고 성경과 전도 문서 및 각종 서적의 인쇄 출판을 통한 문서선교에 힘을 쏟았다.
그는 국제법에도 능통하여 헨리 휘튼(Henry Wheaton)의 《국제법의 기초(Element of International Law)》를 중문으로 번역하여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여 중국에 ‘주권’, ‘인권’, ‘자유’, ‘민주’ 등 근대적 사상의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이후 북경 동문관(同文館)에서 국제법 교수로 초빙받아 중국에 서양 지식을 전하는 데 힘을 보태었고, 1898년 북경대학의 전신인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 개교할 때 양무 관료 이홍장(李鴻章)의 추천으로 초대 학장을 맡아서 북경대학으로 발전하는 데 초석을 놓았다. 1900년에 사임하고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초빙되어 중국 정부의 고문을 지냈다.
존 네비우스 존 네비우스(John L. Nevius, 倪維思, 1829-1893) 선교사는 뉴욕 출신으로 유니온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한 뒤 1854년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영파에서 6년간 선교 사역을 전개하였다. 선교부의 요청에 따라 그는 햅번 선교사와 함께 1861년 6월부터 일본선교부로 파송되여 일본선교에 힘을 보태다가 1861년 2월 영파로 복귀하였다. 그해 5월 18일 영파를 떠나 산동성 지부(芝罘)로 사역지를 옮겼고, 이어 이웃한 등주(登州)에 정착하여 산동제일여학교(山东第一所女子学校)를 여는 등 산동선교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1864년 1월 헌터 코르벳(Hunter Corbett)과 칼빈 매티어(Calvin W. Mateer) 선교사가 합류하면서 등주는 미국 장로회의 산동선교 거점을 이루었다. 1871년에는 연태(烟台)에 과수원을 마련하고, 미국에서 과일나무를 중국에 들여와 현지 교회가 자립 방안을 모색하는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현지인의 실력 신장을 기반으로 선교 성과를 제고하려고 시도한 그의 선교 전략은 네비우스 계획(The Nevius Plan)이라고 알려진다.
네비우스는 1877년 산동 지역에 심각한 대기근 사태가 발생하자 빈민 구제 사역에 앞장섰다.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중국의 대기근 사태의 실정을 보고하면서 도움을 호소하여 모인 헌금으로 산동 지역의 빈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구제 사역을 전개했다.
존 커 존 커(John G. Kerr, 嘉約翰, 1824-1901) 선교사 부부는 1854년 5월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광주에 도착하였다. 그는 중화의약전교회(中華醫藥傳敎會)에서 운영하고 있던 진료소에서 의료선교에 동참하였다. 커 선교사는 미국 공리회 파커 선교사가 은퇴한 1855년부터는 그가 운영하던 박제의원(Canton Hospital)의 원장을 맡아 의료 사역을 이어갔다. ▲존 커(John G. Kerr) 선교사 [출처/바이두] 그는 제2차 아편전쟁 기간 중 전란으로 사역지가 크게 피해를 입게 되자 피난차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859년 중국으로 복귀하여 박제의원 사역을 이어갔다. 1862년부터 서의학교(西醫學校)도 개설하여 중국인 의사 150여 명을 양성하였는데, 중국 혁명 지도자 쑨원(孫文)도 이에 포함된다.
1866년 병원 부지를 넓히고 새 건물을 지어 의료선교의 규모를 크게 확장하였다. 그는 박제의원을 통해 대단히 많은 환자 치료를 하였는데, 그의 생애 중 이 의원을 통해 70만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5만여 차례 수술을 했다는 통계가 소개되고 있다. 특히 방광결석 수술만 헤아려도 1,300건이나 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는 풍전환자(간질병)를 집중 치료하기 위해 1898년 풍전의원을 추가 개설하기도 하였다.
커 선교사는 1880년에는 중국 최초 의료 잡지인 《서의신보(西醫新報)》를 창간하며 편집을 맡았고, 의학 관련 각종 서적의 중국어 번역에도 힘을 쏟아 30여 종을 출판 보급하여 중국에 서양 근대 의학을 보급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
▩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출처/바이두 캡처] ▩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