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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3  통권 262호  필자 : 변성래  |  조회 : 2181   프린트   이메일 
[책 속의 중국]
《중국근현대사 2》 - 근대국가의 모색 1894-1925 | 중국근현대사 2
_가와시마 신 / 삼천리

중국의 1894년부터 1925년 사이 30년은 격동의 시간이자 근대국가의 모색을 하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청조의 마지막 15년과 중화민국 전기 (베이징(北京)정부) 시기)에 해당됩니다. 이 시기 중국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잠자는 사자’가 있습니다. 필자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잠자는 용’으로 기억됩니다. 잠자는 사자는 영국 주재 공사였던 증기택(曾紀澤)이 한 말에서 유래합니다. 서양에서 칭하는 ‘잠자는 중국’이라는 부정적인 표현에 대영제국의 표상인 ‘사자’를 조합하여 중국에 대국의 표상을 부여한 것입니다. 

또 1895년에는 사상가 옌푸(嚴復)가 동아시아의 ‘병부(病夫)’라는 말을 사용하여 동시대의 중국을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이 표현은 오늘날에도 중국 영화나 텔레비전 방송에 자주 등장하여 근대 중국을 표상하는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국가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신체에 비유할 수 있다. 오늘날, 육신의 안락을 탐하면 쇠약해지고 노고를 거듭하면 강해진다는 말이 당연한 이치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병부에게 한도를 지나치게 초과하는 일을 하게 해서 강해지기를 구한다면, 그 병부의 죽음을 앞당길 뿐이다. 지금 중국은 아직 그런 병부와 같은 상황이다.” (嚴復, 〈原强〉)

옌푸는 중국에 적합한 부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아울러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 근원으로부터 개혁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병부’라고 하는 중국에 대한 인식이 있으며, 여기서 ‘病’이라고 하면 아편 문제와 전족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 뒤로 중국에서는 외국인의 중국에 대한 인식으로써 동아시아의 병부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청나라 말기 유럽 강국의 압박과 홍수전이 주동한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청조의 지배체제는 위기에 처합니다. 이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됩니다. 서양식 무기의 도입과 함께 근대산업과 신식교육이 적용됩니다. 1840년에 일어난 아편전쟁, 1856년 애로호 사건 등 외세의 침입에 무기력한 청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신식무기의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습니다. 이홍장은 북양군과 함대를 창건하여 군사력 강화에 힘썼지만 결국 청일전쟁에서 패합니다. 이후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나 봉건 시대적 제도를 개혁하는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배신과 서태후 등 수구파에게 패배하고 맙니다. 이후 의화단(義和團)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조의 무기력함이 더욱 심화되자 청조의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민의는 더욱 강성해졌습니다. 청조 11대 황제인 광서제와 서태후가 사망하고 3살의 푸이(溥儀)가 황제로 등극하자 정치는 더욱 혼란을 거듭했고 국민의 생활은 고통이 가중되어 중국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창(武昌)에서 일어난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되어 1개월여 만에 거의 모든 성(省)에서 호응하기에 이릅니다. 1912년 1월 1일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南京)정부가 수립되어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그 지도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이 발족됩니다. 청조는 베이양(北洋) 군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위안스카이를 다시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령합니다. 청조의 전권을 위임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군을 진압하였으나 이들과 전투를 적극적으로 벌이지는 않고 영국의 중재로 화평을 추진하였습니다. 열강들이 압력을 가하고, 많은 지방에서 실권을 장악한 혁명정부의 내부에 숨어들어 간 입헌파의 책동도 있었으며, 또한 혁명파 내부에서도 세부 조직 간 대립이 있어서 혁명군은 북벌을 중지하고 남북화의(南北和議)가 진행됩니다.

* 의화단(義和團): 19세기 말 청나라 말기의 비밀결사 조직이다. 이들은 손오공이나 저팔계 따위를 신으로 숭배하면서 칼에도 피나 부상을 입지 않으리라 믿었다고 한다. 원래는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무술을 수련하던 권법집단이었다. 개항 이후에는 청왕조를 받들어 외세를 물리친다는 뜻의 부청멸양(扶淸滅洋)이라는 이름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식민제국 열강에 대항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온갖 잔혹 행위와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저지른 끝에 8개국 연합군에게 진압당했다. 당초에는 전형적인 반청복명으로 출발한 것으로 보이지만 지도층이 청나라 황족에게 포섭되면서 친청(親淸)으로 방향이 선회된 것으로 보인다. 백련교의 한 분파라는 설도 있다.

기독교 포교와 사회의 분열 

19세기 후반 중국에는 기독교가 급속히 보급됩니다. 외국인선교사들이 가져온 기독교는 늘상 ‘제국주의 앞잡이’ 따위로 칭해지고는 했지만, ‘침략과 저항’이나 ‘침략과 피침략’같이 단순히 이분법으로 다룰 수 없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청이 가톨릭의 포교를 국내에서 인정한 것은 1846년이고 이 무렵 기독교에도 포교를 인정했습니다. 제도적으로 선교사는 개항장에서 (중국인에게) 포교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내지에서 포교할 권리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물론 중국옷을 입고 내지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선교사도 있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도 배외(排外)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선교 활동에는 소극적이고 비판적이었습니다. 

제2차 아편전쟁 후의 톈진(天津), 베이징조약을 통해 선교사의 내지 포교권이 인정됩니다(거주권은 인정받지 못함). 그 뒤로 내지에도 여러 교회가 설립되고 포교가 활발해집니다. 19세기 후반의 중국 사회는 황허강의 범람에 따른 치수 문제, 대운하의 기능 불능 등과 함께 실업자 증가, 치안 악화, 기층 사회의 무장화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이런 사회적 동요에 따라 발생한 틈새로 깊숙이 파고듭니다. 그중에는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입교한 ‘라이스 크리스천(rice Christian)’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생활을 이어가려고 빈민들이 입교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항쟁에서 패배한 객가(客家)집단이 모조리 입교하기도 했고, 청의 탄압을 받은 백련교 신도가 집단으로 입교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정치적 보호막을 기대하며 입교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청조의 통치가 이완되면서 기층 사회에서는 기존의 질서 아래 있는 사람들(청조 통치 계통의 하부에 위치한 사람들)과 기독교회의 비호를 받는 사람들로 갈라지는 사태도 있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기독교회는 고아 구제, 빈곤 대책, 의료 사업, 학교 건설 같은 사회사업뿐 아니라, 지방관들이 실시하는 재판에서 때때로 베이징의 외교 루트를 통해 개입하면서 신자를 비호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쪽은 기독교의 ‘수상쩍음’을 ‘미신’이라고 이름붙이며 고발합니다. 이런 움직임들이 결국 교회와 선교사 또는 신자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폭력을 수반한 운동이나 사건이 벌어지는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1890년대가 되면 창장강 유역과 함께 의화단의 주요 무대가 된 화북의 대운하 연변을 따라 구교안(仇敎案)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대운하 연변을 비롯해 산둥(山東)에서는 독일 등의 교회가 증가했는데 여기에 자연재해로 대운하의 기능이 떨어지면서 실업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의화단은 교회에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룬 30년은 근대적인 의미에서 ‘중국’의 윤곽이 지리, 사람, 정치, 사상의 측면에서 형성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셔널리즘과 주권, 역사의 문제와 정의의 규정 그리고 이른바 민족 문제를 비롯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적인 사상(事象)들이 많이 보입니다. 또한 이 시기는 ‘구국(救國)’을 위한 다양한 구상과 실험이 넘쳐나고, 중국 사람들의 상상력이 가장 팽창했던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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