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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3  통권 262호  필자 : 사무엘  |  조회 : 2385   프린트   이메일 
[선교일언]
인자한 부처와 일그러진 예수

구약성경에서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만국을 통치하는 절대 주권자로 등장한다. 비록 근대 민주주의 제도가 성경과 종교개혁에서 발달했지만 성경은 신정주의를 말하지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야훼로부터 위임된 권력을 행사했던 모세와 아론 그리고 12지파의 지도자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조차 모두 자신의 행위를 이스라엘 공동체 앞에서 고백하기 전에 하나님께 먼저 고백해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행위를 야훼께 고백하고 야훼가 주신 율법을 따라 속죄와 심판을 받았던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 있는 인격체로 야훼는 인간을 창조하셨고 또 대우하셨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는 회개와 용서 그리고 심판은 그 행위자 위에 절대 주권자가 있어야지 성립되는 개념이다. 후기 현대사회에 들어서서 신(야훼)을 대신해서 국민(인간)이 그 절대 주권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의 기초는 나라의 절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장에 있다. 그리고 정부의 권력은 국민에 의해 위임받은 것이기에 그 위임된 권력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며 그에 상응하는 심판을 절대 주권자인 국민으로부터 받는다. 

그런데 신정국가와 민주국가를 구분 짓는 가장 중요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그 절대 주권자에 의해 세워진 대리 통치자가 만들어 낸 결과들을 절대 주권자가 책임을 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먼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결과가 좋은 것이라면 몰라도 나쁜 것이라면 사실상 절대 주권자인 국민이 책임을 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거니와 설령 책임을 진다고 해도 마치 IMF 사태처럼 수동적으로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형국이 된다. 심지어는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지도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한 나라가 큰 내전을 겪거나 지구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신정국가의 경우는 절대 주권이 신에게 있기에 신의 섭리에 따라 그 국가의 지도자와 국민이 잠시 잠깐 신이 내리는 심판관 훈련 아래 놓여 있을 수는 있어도 결국 자신의 대리 통치자가 만들어 낸 결과에 대해 그 신이 최종 책임자로 전면에 나서서 문제를 해결한다.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하겠지만 최종 책임자라는 측면만을 놓고 본다면 민주국가를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그리고 신정국가를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로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부처와 예수의 모습 속에서 찾아보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편안하게 가부좌를 튼 자세에서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일반적인 부처상이다. 반면 예수상은 일그러진 얼굴로 거친 나무토막 위에 고통스럽게 걸려 있다. 부처는 자신을 따르는 중생들이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가르침과 바른 수행법을 말하지만, 결코 그들의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중생을 선도하는 선생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향해 진리의 가르침 그 이상의 것, 다시 말해 자신의 생명과 사랑을 내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낳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선생은 자신이 줄 수 있는 것만 제자들에게 내어 주지만 부모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그 이상의 것, 심지어 주어서는 안 되는 것, 설령 그것이 자신의 생명이라 해도 내어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러 세대를 지나는 동안 진화를 거듭하며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고 있는 라마(티베트)불교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싶다. 한때 티베트고원에는 중앙아시아를 호령했던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토번(티베트)왕국이 있었다. 그러나 8세기부터 시작된 지나친 숭불정책과 그로 인한 내전으로 토번왕국은 멸망하였다. 그 후에도 각 지역의 토후 세력과 결탁한 여러 불교 종단 사이의 끝없는 내전으로 인해 티베트의 혼란한 시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던 14세기 무렵부터 몽골제국의 군대를 빌려 타 종단을 무력으로 정복한 ‘겔룩파’의 수장이며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자처한 달라이라마(지혜의 바다)가 다스리는 신정국가가 시작되었다. 

몽골의 뒤를 이은 명나라와 청나라와의 상호 호혜적인 관계(황제의 스승)는 계속되었지만, 청나라 중기에 이르면 독립 국가라기보다는 외교권과 군사권이 없는 준 복속관계가 되어 버렸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청나라가 멸망한 틈을 타서 잠시 독립 국가임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이내 1949년에 설립된 ‘중화인민공화국(이하 중공)’에 의해 다시 복속되었다. ‘달라이라마’ 측과 ‘마오쩌둥(毛澤東)’ 측 사이에 여러 번의 협상을 통해 이전에 청나라와 가졌던 관계로 복원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1959년 중공의 지나친 폭압과 강탈에 시달린 티베트 수도 라싸(拉薩)에서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났고, 그 혼란한 틈을 타서 달라이라마14세는 인도로 망명하여 현재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다. 50년 넘게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며 정치와 종교 권력을 독점해왔던 달라이라마는 한 사람이 정치와 종교라는 두 권력의 수장으로 있는 것은 비민주적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그리고 2011년 3월 그는 정치권력을 내려놓고 종교인으로 돌아간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그해 4월 직접 투표로 선출된 초대 국무총리 롭상 상가이(Dr. Lobsang Sangay)와 티베트 망명의회에 표면상으로나마 정치권력을 이양하였다. 티베트 역사에 견주어 보면 매우 때늦은 분리였지만 그럼에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 달라이라마14세의 매우 결단력 있는 훌륭한 면모였다. 

그러나 아직 달라이라마14세 ‘톈진 갸초’가 정리해야 할 한 가지 과제가 더 있다. 1935년 달라이라마의 스승 격인 ‘판첸라마’에 의해 전통적인 티베트불교의 독특한 환생제도를 따라 그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달라이라마13세 ‘툽텐 갸초’의 환생자로 택정되었다고 해도, 중세와 근현대 600백여 년의 티베트 역사를 좌지우지했던 달라이라마의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권력과 그에 따르는 역사적인 책임에서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가 진정으로 민주주의제도를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 헌장에 따라 그는 자신의 절대 주권자인 티베트 국민에게 진실한 회개와 용서를 구하고 그에 따른 책임 있는 행동을 보였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1391년부터 시작된 달라이라마1세 ‘겐뒨둡바’의 환생자이며, 한때 역사적으로 찬란했던 ‘티베트’를 신정(불교)국가로 만들어 정치, 예술, 교육, 과학, 국방 등등의 모든 사회 문화를 사원 안에 가둬버린 관음보살의 화신이며, 중공군에 의해 티베트 민족 3분의 1이 학살당할 때, 중공에 의해 주권국의 지위를 상실할 때, 그는 전대 달라이라마들의 환생자로서 그 모든 역사적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600백 년 동안 이어진 14명의 달라이라마(대부분 젊어서 요절하거나 암살당하였다)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행위들의 결과 때문에 티베트 민족은 지금도 티베트 본토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 흩어진 난민으로 가장 고통받고 억압받는 민족 중의 하나로 힘겹게 살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달라이라마14세가 민주주의를 버리고 다시 신정주의 길로 회귀한다 해도 역시 자신의 책임에서 결코 조금도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지난 600백여 년의 시간 동안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정치와 종교의 힘으로 티베트고원을 지배하는 절대 주권자였으며, 티베트인들에게 살아 있는 부처로 숭배받으며, 포탈라왕궁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면서도 정작 티베트인들의 삶에는 전혀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야훼와 같은 절대 주권자라면 그는 단정하게 옷을 입고 편안한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지혜로운 가르침을 베푸는 석가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발가벗겨진 채 고통으로 뒤틀린 몸과 일그러진 얼굴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자신의 생명으로 그들의 생명을 대신한 예수의 길을 걸었어야 했다. 


하지만 실상 불교적 세계관 안에는 회개와 용서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불교적 세계관 안에는 회개를 받고 용서해 주시는 절대 주권자가 없기 때문이다. 티베트에 탄트릭불교를 전해준 ‘파드마삼바바’가 쓴 《사자(死者)의 서》라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고서가 있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이 책을 자신의 심리학 경전[Bible]로 삼았을 정도였다. 또 미국의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상징이었던 마약을 통한 유체이탈 경험의 근거가 된 책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죽은 자들(사실 불교는 영혼의 존재 자체도 부정한다)이 야마(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는데 그 앞에는 검은 돌과 흰 돌이 쌓여 있다. 흰 돌이 검은 돌보다 많으면 죽은 자는 좋은 환생을 하지만 만약 그 반대인 경우는 불행한 환생을 하게 된다. 선행의 증가 혹은 악행의 증가 법칙은 있어도 감소의 법칙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회개를 받으시며 용서해 주시는 절대 주권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티베트인 마을에 가면 흰 돌(공덕)을 쌓기 위해 하루 종일 쉼 없이 기도통을 돌리는 노인들과 수백 킬로를 ‘오체투지’하며 순례하는 티베트인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지금 달라이라마14세는 성경과 종교개혁에 의해 발전된 근대 민주주의제도를 티베트 망명정부의 정치제도로 받아들이는 자기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모순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티베트불교가 후기 현대사회에서 변함없이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북미에서 계속 성장해 가는 이유는 그 근본이 석가모니 사후 약 600년 뒤에 시작된 대승불교와 힌두교가 융합된 탄트릭(밀교)불교에 토속 종교인 ‘뵌교’가 융합되어 현대 후기 사회의 정신(개인주의, 물질주의, 상대주의)에 맞게 진화를 거듭해 가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티베트불교의 진화적인 양태는 사실 모든 불교(소승/대승/밀교)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징이다. 실상 석가모니가 설파한 원래의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는 불교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전이 하나뿐인 기독교에 비해 지금도 불교는 수많은 고승이 해석한 각기 다른 불교를 담은 수많은 경전을 만들어 내고 있다. 

결론적으로 다르마(법)와 까르마(업보) 그리고 삼사라(윤회)가 만들어 가는 기계적이며 인과응보론적 세상에는 인격적인 존재들 간에 주고받는 회개와 용서가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전생에서 쌓은 악업은 이생에서 지불하게 되며, 이생에서 다 지불되지 못한 악업은 다음 생에서 지불하게 된다. 불교는 다음 생애에 더 좋은 조건으로 환생하기 위해 고해(苦海)와 같은 이생에서도 끊임없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공덕(선업)을 쌓으라고 말하지만, 결코 사랑을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랑은 용납과 용서이며, 공장 하수구같이 쉼 없이 죄악을 쏟아내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를 자신의 어깨 위에 져주시는 예수의 자기 희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타인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 희생이지만 부처가 말하는 자비는 타인을 수단으로 하는 자기 완성이다. 사랑에는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그 이유이고 그 목적이기 때문이다. 

절대 주권자의 자리를 인간이 대신한 후기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다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더 많은 돈, 더 강한 권력 그리고 더 쾌락적인 성을 간절히 갈망하면서도 끊임없이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는 노래를 부르며 사랑을 주제로 하는 드라마와 책을 보는 정신 분열증 환자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메마르고 물질화한 후기 현대사회 속에서 절대 주권자인 창조주 하나님, 책임 있는 존재로서 영혼, 한 번뿐인 이 땅에서의 삶과 부활 그리고 심판을 부정하는 불교는 전세와 현세와 내세를 반복하며 진화하는 윤회론적 세계를 현대인들에게 약속하며, 힌두교와 불교 그리고 각 민족의 토속 종교를 융합하여 만들어 낸 세계관을 마치 노인의 얼굴에 피어나는 검버섯처럼 현대인들의 정신과 마음속에 살며시 그리고 지혜롭게 확장해 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사랑의 반려자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누군가의 수단이 되고 또 누군가를 수단으로 삼는 자비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내 모습 그대로 용납받고 보호받으며 또 누군가를 용납하고 책임져주는 자기 희생적 사랑을 갈망하는 성향이 우리의 DNA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깊은 갈망과 욕망은 오직 절대 주권자이시며 참 사랑이신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다. 


“나는 작은 여우야,” 작은 여우가 인사했다. 
“이리 와서 나랑 놀자,” 어린 왕자가 부탁하였다. 
“나는 너와 놀 수 없어, 왜냐하면 나는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작은 여우가 대답했다. 
“나에게 너는 다른 수많은 소년들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에게는 너가 필요하지 않아. 그리고 너의 입장에서 나도 수많은 여우들 중에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필요하지 않아. 하지만 나를 길들여 준다면 우리는 서로를 필요하게 될 거야. 나에게 너는 온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고 너에게 나도 유일한 존재가 될 거야…” 
“아!~ 이제 이해되기 시작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나에게도 꽃이 있어, 그녀가 나를 길들인 것 같아…”
“제발 나를 길들여줘, 누구든지 자신이 길들인 것만 이해할 수 있어.” 작은 여우가 말했다.
“너를 길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린 왕자가 말했다. 
“너는 매일 아주 많이 인내해야 돼…” 작은 여우가 말했다. _생택취페리의 《어린 왕자》 중에서 


오랜 세월 동안 인내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길들이기를 간절이 갈망하신다. 그리고 기꺼이 우리의 친구로 길들여지기 위해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셨다.

“Love is patient (…) and endures through every circumstance” (1 Corinthians 13) ▩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사무엘 |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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