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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2  통권 261호  필자 : 변성래  |  조회 : 2125   프린트   이메일 
[책 속의 중국]
《중국근현대사 1 - 청조와 근대 세계 19세기》 | 중국근현대사 1
_요시자와 세이이치로 / 삼천리


청조는 18세기 말부터 여러 가지 정치적 곤란과 사회적 모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 모순이 극단으로 치달은 19세기 후반에는 연쇄적인 민중의 반란으로 이어집니다. 아울러 청조는 근대 세계 그중에서도 서양 제국의 패권과 떠오르는 일본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이홍장은 태평천국과 염군(捻軍) 등 반란 세력을 진압하면서 권력을 잡은 뒤 청조를 근대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는 일을 일생의 과제로 삼게 됩니다.

* 이홍장(李鴻章, 1823. 2. 15~1901. 11. 7)은 청조 말기의 한족계 거물급 중신 정치가로 부국강병을 위하여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 국가를 현대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몇몇 주요 반란들을 진압했으며, 서방의 권력과 함께 청나라의 관계에서도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30세의 영국 육군 장교 찰스 조지 고든의 지휘 아래 ‘상승군’의 지지와 함께 태평천국의 난에서 다수의 승리를 거두었고, 허난(河南, 1865년)과 산둥(山東, 1866년)에서 일어난 염군의 난을 진압하였다. 1870년 그는 직례총독(直隷総督)으로 임명되어 상업과 산업을 발전시키는 계획들을 착수하였다. 그리고 중국 해군을 현대화하고, 포트아서(Port Arthur, 현재 뤼순커우구(旅順口))와 다구포대(大沽砲台)를 요새화하는 데 많은 돈을 썼다.


청조는 본래 북방 유라시아 전통이 강한 국가였습니다. 하지만 근대 세계 속에서 존속을 꾀하기 위해서 타협과 자기 변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담긴 고뇌와 고통, 노력과 도전은 어떠한 것이었을까요? 인문사회계 연구가이자 문학부 교수인 이 책의 저자 요시자와 세이이치로는 이 책을 통해 모순으로 가득 찼지만, 그럼에도 창조적인 과정에 주목하면서 주로 18세기 말에서 1894년 청일전쟁 전야까지 청조의 역사를 재조명합니다. 

아편전쟁 (1, 2)
청조에서 아편전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일면 청조의 상황은 아편전쟁 전과 후로 나뉠 수 있습니다. 양귀비는 이미 당송 시대부터 약재로 사용되어 중국 대륙에서 재배되고 있었지만 아편을 흡입하게 된 것은 17세기부터라고 합니다. 1792년 옹정제는 아편 판매와 아편굴(아편을 흡입하는 가게) 경영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인도에서 들어오는 아편의 양은 많아집니다. 청조의 관료와 병사는 아편 밀수를 단속해야 할 처지였음에도 뇌물을 받고 눈감아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1839년 7월 7일.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홍콩 바로 맞은편에 있는 주룽반도(九龍半島) 끝단 지역에서 영국 선원이 그 지역의 중국인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청과 영국 사이에 포탄이 오갑니다. 영국 정부 안에서는 전쟁을 벌이자는 측과 만류하는 측 간에 논쟁이 오가다가 결국 표결에 부친 결과 원정군을 파견하는 쪽으로 결정이 납니다. 

청조의 전쟁 패배는 후대에 ‘불평등 조약’으로 남게 된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마무리됩니다. “1) 다섯 항구(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를 무역을 위해 개항한다. 2) 홍콩을 영국에 할양한다. 3) 청조는 임칙서가 몰수한 아편을 변상하고 아울러 전쟁배상금을 지불한다” 등입니다. 

1856년에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같은 해 10월 8일, 광저우 거리 앞을 흐르는 주장강(珠江)에 영국 국기를 걸고 정박해 있던 화물선 애로호에 청조 관헌이 올라가 국기를 내리고 선원(중국인) 대부분을 해적 용의자로 체포해서 연행한 것입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납니다. 영국은 이제 프랑스까지 끌어들여 원정을 준비합니다. 제2 제정기의 프랑스는 가톨릭 선교사가 광시성에서 살해된 사건을 이유로 전쟁에 참여합니다. 청은 참패를 당합니다. 베이징에 있는 청조의 이궁(離宮)인 원명원이 파괴되고 불에 타 없어집니다. 

기독교의 포교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도 기독교가 전파된 기록에 관심이 갑니다(농민 출신 홍수전(洪秀全)이 창시한 배상제교(拜上制敎)라는 사이비 기독교 단체가 아닌). 19세기 초 청조는 기독교를 금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열정으로 포교를 시도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1807년 런던선교회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이 광저우에 도착합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금지된 종교를 설파하는 선교사가 청조를 자극하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모리슨은 번역 일을 하는 것으로 동인도회사에 취직할 수가 있었습니다. 

포교 방식은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모리슨은 우선 기독교 서적을 중국어로 간행해서 배포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쇄하고 출판할 곳이 필요했습니다. 포르투갈이 근거지로 삼고 있던 마카오는 가톨릭 색채가 강한 곳이었기에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모리슨은 말레이반도의 말라카를 거점으로 삼아 성서를 중국어로 번역 출판하고 교육기관인 영화서원(英華書院)을 설치했습니다. 

모리슨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은 1815년부터 13년 동안 마카오에서 간행한 사전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전은 대형본 6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한자를 영어로 설명한 자전, 한자의 다양한 서체를 모은 표 등을 담고 있었습니다. 영어로 중국어 숙어를 찾는 사전의 서문에서 모리슨은 13년 동안 어휘를 수집했지만 “다양하게 파생하는 어구가 너무 많아서 영어 표현에 정확히 대등한 중국어 어구를 완전히 모으라면 평생을 다 바쳐도 부족할 것이다”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모리슨의 가르침을 듣고 기독교 신자가 된 양발(梁發)은 광둥 출신이었습니다. 양발은 《권세양언(勸世良言)》이라는 책자를 제작하고 말라카에서 인쇄하여 광둥에 널리 배포하려고 했습니다. 《권세양언》은 주로 성서의 내용을 발췌한 것으로 유교에 대한 비판 등 중국 대륙의 포교를 위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다지 체계적인 저작은 아니지만 창세기 이래 구약성서의 주된 내용을 소개하고,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설명하는 등 기본적인 교리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아편전쟁 후 영국에 할양된 홍콩은 기독교 포교지로서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동남아시아 화교를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기독교 여러 교파는 홍콩에 시설을 만들고 입교한 화교 인맥을 이용해 중국 본토에 포교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때로 ‘역사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청조가 몰락하자 승리한 쪽의 관점에서 청조에 대한 여러 가지 평가가 내려집니다. 외국의 침략에 대해서 아무런 저항도 못한 부패하고 타락한 왕조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한편 패자의 입장에서 보면 신해혁명이 정당한 행위였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상대방의 정치성 강한 견해가 됩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청조 후반기의 시대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저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최대한 자제했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글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근대 중국의 기원으로서 청조 후반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늘날 해안지대의 호황과 내륙의 빈곤이라는 경제적 격차의 유래를 파악할 수 있으며, 해결이 쉽지 않은 민족 문제 같은 인류사적 물음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현대 중국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양상도 청조까지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볼 만한 갖가지 논점을 내포하고 있다.” ▦






♣변성래 | 중국을 알고 싶은 의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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