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후 샤크 선교사 미국 침례교회 조직들이 해외선교를 위해 협력하면서 이루어진 ‘미국 침례교 해외선교회(국제선교회)’가 1824년 ‘미국 침례교 총선교협의회’로 조직되면서 ‘3년 협의회(Trienial Convention)’로도 알려진다.
미국 침례교에서 중국으로 파송된 최초의 선교사는 제후 샤크(Jehu Lewis Shuck, 叔末士, 1812-1863, ‘샤크’는 ‘슈크’로 표기하기도 함)이다. 그는 1812년 9월 4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나이 4살 때 남편과 사별하고 버지니아 서부 루이스버그의 시골마을 그린브리어(Greenbrier)로 이주하였고,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내었다. 그는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루이스버그 학원(Lewisburg Academy)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시작하였으나 신학에 대한 관심이 커서 버지니아 침례신학교(The Virginia Baptist Seminary)로 학교를 옮긴 이후 해와 선교에 대한 헌신을 준비하였다.
그는 23세였던 1835년 9월 8일 헨리에타 홀(Henrietta Hall)과 결혼하였고, 같은 날 3년마다 열리는 미국침례교연합회의(The Board of the Baptist Trienial Convention)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중국선교사로 파송 하락을 받았다. 그해 9월 10일 리치먼드 제일침례교회(The First Baptist Church Richmond)의 파송을 받은 그는 9월 22일 부인과 함께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뉴욕을 거쳐 보스턴 항에서 로블(Louvre)호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
보스턴을 출발한 그는 인도의 캘커타, 말레이반도 중서부의 페낭을 경유하여 1836년 3월 29일 싱가포르에 도착하였다. 중국 입국 시도가 여의치 않자 그는 싱가포르에서 중국어와 말레이어를 익혔고, 반 년 남짓 뒤인 8월 29일 싱가포르를 출발하여 9월 1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는 9월 26일 이후 광주, 홍콩 등지를 오가며 선교 활동을 하였고, 1837년 2월 1일 마카오에서 중국인 청년 아로(阿盧)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다. 드는 또 양경(楊慶)이란 중국 상인을 입교시켰는데, 양경은 뒤에 목사가 되어 미국 침례교 소속 첫 중국인 목사가 되어 그의 이후 사역의 동역자가 되었다.
남편과 내지 선교 여행에 동행하지 못한 샤크 부인은 마카오에 머물면서 귀츨라프 부인이 세운 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도왔고, 이 학교가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스스로 여학교를 세워 여학생들을 가르쳤다.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이 홍콩을 차지하게 되자 1842년 3월 샤크 목사 부부는 홍콩으로 선교 거점을 옮겼다. 이곳에서 영국인이 출판하는 잡지 《중국의 친구(Friend of China)》 편집 일을 하면서, 황후대도(皇后大道) 해변에 교회를 개척하여 그해 7월에 예배당도 완성하여 영어·중국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중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빅토리아성 중앙에 세워진 이 교회 옥상에는 영국에서 만든 종을 달았고,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샤크 목사는 홍예서숙(宏藝書塾)이라는 학교도 운영하였다. 1842년 12월 19일 남경(南京)조약 체결 이후 서방 각국의 선교사들이 홍콩과 5개 개항장으로 진출하여 본격적인 개신교 선교가 전개되기 시작했다. 샤크 목사는 1843년 8월 22일 홍콩에서 열린 첫 선교사대회에도 홍콩 대표로 참석하였다.
1844년 11월 27일 셋째 아들 풀러(Henrie Fuller)를 출산하던 중 불행하게도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1846년 리지 세스턴(Lizzie Seston)과 재혼한 그는 새로 조직된 미국 남침례교 해외선교부(The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의 파송을 받아 다시 중국선교의 길에 올랐다.
1847년 8월 샤크 목사 가족은 토비(T. W. Toby) 목사 부부, 예이츠(Matthew T. Yates) 목사 부부와 함께 홍콩에 도착한 뒤 상하이로 옮겨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850년부터 구약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사역을 하던 중 두 번째 부인도 출산 중 사망하자 다시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미국 이주 중국인 선교 사역을 맡아 헌신하였고, 1863년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잇사칼 로버츠 선교사 잇사칼 로버츠(Issachar J. Roberts, 羅孝全, 1802-1871)는 자신의 헌금으로 로버츠중국선교기금회(The Roberts Fund and China Mission Society)를 설립하고 1827년 4월 27일 테네시주 쉐비빌(Shelbyville)에서 이 기금회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귀츨라프의 선교 보고를 접한 뒤 감동을 받은 바 있었던 그는 마침내 1836년 가을 정식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중국을 향하였고, 1837년 5월경 마카오에 도착하여 귀츨라프, 샤크 등 선교사들을 만나 중국선교 대오에 동참하였다. 마카오에서 나환자 선교와 개인 전도를 하다가 1842년 샤크 선교사와 함께 사역지를 홍콩으로 옮겼다. 1843년 8월 22일 홍콩에서 열린 성격번역회의에도 참석하였고, 1844년에는 광주에 월동침신회(粵東浸信會) 교회를 세웠는데, 중국 내지에 세운 최초의 침례회 선교 기지였다.
1847년 로버츠는 광주에서 홍수전(洪秀全)에게 두 달여를 만나 복음을 전했으나 침례를 받게 하지는 못하였다. 1849년 2월 귀국했다가 1850년 4월 다시 중국으로 온 그는 홍수전의 배려 태평천국의 수도 남경에서 선교하였고, 상해를 거쳐 1856년 광주로 복귀하였다. 1860년 홍수전이 그를 태평천국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여 남경으로 갔으나 태평천국의 실상에 실망한 그는 남경을 떠나 1862년 광주로 돌아와 사역하다가 1866년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뒤늦게 나병을 겪게 되었고 1871년 1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윌리엄 딘 선교사 윌리엄 딘(William Dean, 燐爲仁, 1807-1895)은 미국침례회 해외선교회(The American Baptist Board of Foreign Mission)의 파송을 받아 1835년 7월 8일 태국 방콕에서 교회를 설립하였고, 이곳에서 3명의 화교에게 세례를 주었다.
건강의 좋지 않았던 딘은 1837년 마카오 귀츨라프의 집으로 가서 요양하였다. 그는 마카오에서 1837년 마카오 최초의 중국인 교회를 세웠고, 1842년에는 광주로 사역지를 옮겨 5개 교회를 세워 사역하였다. 1842년에는 홍콩으로 이주하였고, 1843년 5월 28일 그는 홍콩 두 번째 교회를 세웠으며, 1843년 8월 22일 홍콩에서 열린 성경번역회의에 참여하였다. 1846년 휴가로 귀국했다가 1848년 9월 중국 상해로 돌아온 이후 선교 사역과 더불어 태국 등지를 오가며 미국 외교관의 통역도 맡았으며, 40여 년 선교 사역으로 500여 명의 중국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보고된다. 1895년 8월 13일 캘리포니아에서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설명 및 출처 | 잇사갈 로버트Issachar J. Roberts) 선교사 [바이두 바이커 캡처]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