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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츨라프의 선교여행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郭實獵, 郭士立, 1803-1851)는 프로이센 제국의 북동부 힌터포메른(Hinterpommern) 지역의 퓌릿츠(지금은 폴란드 땅)라는 작은 도시 출신이다. 루터파 신앙과 독일 경건주의 배경의 가정에서 자란 그는 18세에 독일 최초의 선교학교인 베를린선교학교(Missionsschule in Berlin) 왕립장학생으로 진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베를린 보헤미아 베들레헴교회의 담임목사이자 교장이었던 요하네스 예니케(Johannes Jänicke, 1748-1827)의 지도를 3년간 받은 뒤 베를린대학교(현 베를린 흄볼트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하면서 선교사 헌신을 결심하였다.
귀츨라프는 1826년 네덜란드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자바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런던선교회 메드허스트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중국어를 익히면서 중국 선교에 꿈을 가지게 되었는데, 네덜란드선교회가 중국 선교를 반대하자 1829년 네덜란드선교회를 탈퇴하여 독립 선교사로 일하였다. 그는 광주 동인도회사의 통역도 맡았으며, 1843년부터 홍콩 정부의 중국어 전문비서로 일하다가 1851년 병으로 사망했다.
귀츨라프는 정주 선교보다는 여행을 통한 문서 선교사역에 힘썼다. 그는 1831년부터 1833년까지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하며 선교사역을 이어갔다. 그의 1차 선교여행(1831. 6. 3–12. 13)은 부인 뉴엘과 사별한 뒤 중국 상선 순리호(Shunle)를 타고 방콕에서 동남아와 중국 발해만까지 연안 도시들을 두루 거쳐 마카오로 복귀하는 노선을 밟았다.
이듬해의 제2차 선교여행(1832. 2. 26-9. 5)은 로버트 모리슨의 권유에 따라 런던선교회 선교사의 자격으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로드 애머스트호에 올라 의사이자 통역관의 임무도 겸하였다. 2월 26일 마카오를 출발한 일행은 대만, 영파(寧波), 상해(上海), 숭명도(崇明島), 산동 유공도(劉公島)와 위해(威海), 조선 황해 연안의 장산 등 연안의 섬들과 일본 연안 도시까지 순례하였다. 이 기간 중 우리나라 충청 연안의 고대도에 한 달여(7. 17-8. 17) 머물며 문서 선교를 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선교 문서를 배포하고, 감자 재배법과 포도 음료 제조법을 전수하였으며, 감기 환자를 치료해 주고 주기도문을 한글 번역한 것으로 인해 한국 개신교 역사의 서막을 연 것으로 평가된다.
제3차 선교여행(1832. 10. 20-1833. 4. 29)도 중국 연안 도시들을 두루 방문하고 마카오로 복귀했다.

귀츨라프의 선교 사역
귀츨라프는 1829년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로서 말라카 여학교를 담당하고 있던 마리아 뉴엘(Maria Newell, 1794-1831)과 결혼하였다. 그녀와 함께 귀츨라프는 1831년까지 성경을 샴어, 라오스어, 캄보디아어로 번역하고 관련 사전과 문법서도 출판하였다. 뉴엘과 사별한 뒤 귀츨라프는 고아원 사역을 하던 메리 완스톨(Mary Wanstall, 1799-1849)과 재혼하였다. 귀츨라프는 그녀와 함께 1835년 마카오에서 동양여자교육협회학교(Eastern-Female-Education Society School), 광주에서 모리슨교육협회학교(Morrison Education Society School, 1838년 마카오, 1842년 홍콩으로 이전) 등을 세워 교육 사역에도 힘을 썼다.
귀츨라프는 선교사역 초기에는 중국어 실력 연마와 출판 사역에 역점을 두었다. 전도용 교리 서적의 출판 간행에 힘을 쏟았는데, 1834년에 《속죄지도전(贖罪之道傳)》, 1836년에 《마서언행전전(摩西言行全傳)》, 《복음지잠규(福音之箴規)》, 《야소강세지전(耶蘇降世之傳)》, 《구세주야소지성훈(救世主耶蘇之聖訓)》 등 70여 권의 기독교 서적을 출판하였다.
귀츨라프는 메드허스트, 브릿지만, 존 모리슨 등과 함께 성경의 중문 번역 작업을 시작하여 구약성경은 1836년에 《구유조서(舊遺詔書)》로 싱가포르에서 출판했고, 신약성경은 1823년판 로버트 모리슨 번역본을 수정 보완하여 1837년에 《신유조서(新遺詔書)》로 바타비아(현 자카르타)에서 출판하였다.
귀츨라프는 2차 선교여행 때 류큐 일대를 거치면서 만난 일본 선교를 위한 노력도 전개하였는데, 1837년 미국 선교사 윌리엄스, 미국 의료 선교사 파커, 일본인 표류 어부 7명 등과 함께 미국 선적의 모리슨호를 타고 에도(지금의 도쿄), 가고시마 등을 방문하였으나 포격을 받아 상륙하지는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표류 일본인 어부들에게서 일본어를 배워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를 번역하여 1837년 5월 싱가포르에서 출간하여 일본 선교에 사용하게 하였다.
귀츨라프는 중국인 복장을 하고 능숙해진 중국어를 바탕으로 중국 내륙 선교에도 나섰으며, 아편전쟁 이후에는 홍콩에 신학원을 설립하여 중국인 선교사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중국 선교를 위해 중국복음화선교회(The 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 조직하여 이끌었는데, 뒤에 중국 선교에 크게 기여한 허드슨 테일러 등이 이 선교회의 파송 선교사였다. 그는 중국인 전도인을 통한 중국 선교를 위해 1844년 복한회(福漢會, Chinese Union)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의 회원 1844년 21인으로 출발하여, 1847년 300명, 1850년 1,871명으로 회원이 급증하였다.
귀츨라프의 문화 사역
귀츨라프는 선교여행 중 언어와 문자에 대한 연구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832년 11월 브릿지만이 간행한 《The Chinese Repository(中國叢報)》에 ‘한국어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이란 소논문을 발표하여, 한글 자모에 대한 분석을 한 바탕 위에 조선이 한자문화권이면서도 고유의 음성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음을 서방에 전파하였다. 또한 1833년 11월 《Das Ausland(외국)》이란 잡지에도 ‘한국어에 관하여(Über die Koreanische Sprache)’라는 글을 실어 한글을 독일 사회에도 알렸다.
그는 자신의 동아시아 각국 여행기를 1833년에 《두 번의 중국 연안 여행기(The Journal of Two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 1832)》(New York: John P. Haven)로, 1834년에는 《세 번의 중국 연안 여행기(The 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 1833》(London: Frederick Westley and A. H. Davis)로 간행하였고, 1835년에는 독일어판을 간행하는 한편 각종 잡지에 자신이 방문하면서 얻은 동아시아 각 지역의 지리와 문화 그리고 풍습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그는 서양 문화를 중국에 소개하기 위한 노력도 크게 기울였다. 그는 1833년부터 광주에서 1837년부터 1839년까지 싱가포르에서 《동서양고매월통기전(東西洋考每月統紀傳, The Eastern Western Monthly Magazine)》을 간행하여 서양 문물과 과학 지식을 중국인들에게 전파하였다.
♣사진 설명 및 출처 | (위) 칼 귀츨라프 [위키피디아]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