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중점의 변화
1860년 북경조약을 통해 천주교가 선교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이제 마테오 리치의 중국 문화를 존중하는 적응성 선교와 과학 기술을 앞세운 선교 방법은 더 이상 중시되지 않고, 오로지 천주교회의 내실을 지향하게 되었다. 천주교도들이 있는 마을 단위로 신자 중 한 명을 세워 신부가 없을 때 교회의 각종 의례를 주관하고 신자들을 돌보게 했다.
외국인 신부들은 신자들이 있는 마을을 방문하여 미사와 고해 등 성사를 행하고 교리들을 가르치고 교회의 현안들을 돌보았다. 신자들이 늘어났으므로 이제 신자들이 없는 마을로 들어가서 교리를 전하는 일은 외국 신부들의 업무에서 우선순위가 낮아졌고, 관련 교무는 중국인 신자 중 일정한 교육을 받은 교리 교사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천주교회는 교도들의 가정에는 그리스도, 마리아 및 사도들의 성상(聖像)을 모시고 있었는데 성상 참배 역시 교우들의 의무였다. 외국 신부들이 각 촌락으로 들어가서 성사를 베풀고, 미사와 강론 및 고해성사를 시행하고, 아동들에게 기본 교리를 가르치고, 가정이나 마을 사이의 분규를 조절하기도 했다. 선교사는 보통 교우들이 없는 마을로는 가지 않았다. 교우들이 살지 않는 지방을 통과해야 하는 경우 그들은 중국인의 의복을 입거나 상인처럼 꾸미고는 했다. 제일 먼저 교우가 없는 마을과 접촉하는 자는 보통 중국인 선교 선생이었다.
천주교회는 중국 교우들의 도덕과 풍속을 바로잡는 노력도 함께했다. 아편 흡연은 교회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금지하였고, 자녀 매매도 금지하였다. 누습(陋習)에 해당하는 조혼(早婚)이나 민며느리제 등도 고치려고 노력하였다. 각종 금령과 개선 요구를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교회가 경고 또는 성사 참여 배제 등의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교육 선교 19세기 후반 천주교회가 세운 교육 체계는 중요한 선교 방법의 하나가 되었다. 천주교회는 학교 교육의 확충에 나섰는데,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운 이냐시오 로욜라 공학(依納爵公學, 1850)과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들 학교에서는 주로 신자들의 자녀를 입학하게 하여 교리와 보통 교육을 시행하였다. 교인이 아닌 경우 입학을 하려면 선교사들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교과서에는 미신적 내용이나 천주교에 유익이 없는 내용은 배제되었다. 교구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주로 소학교였지만, 중등학교나 대학교도 세워서 운영했다. 일부 학교에서는 프랑스어 등 외국어 교육도 포함하였다.
천주교 신학 교육과 성직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수도원도 증설되었다. 대목구마다 최소한 하나의 수도원이 세워져서 운영되었다. 수도원에는 일반적으로 10-12세에 입학하여 대략 20여 년의 교육을 받고 30대 중반에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수도원에서는 신학과 라틴어뿐만 아니라 중국 선교에 필요한 중국 전통 문화, 역사, 의례 등도 학업 영역에 포함되었다. 과학 기술 부문 아편전쟁 뒤 중국에 온 서양 선교사들은 이전과 달리 과학적 소양의 수준은 크게 낮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에도 역시 선교사들이 과학 기술 부문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견사회 선교사 데이비드(譚圍道, Armand David, 1826-1900)는 중국의 동식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으며, 대량으로 각종 표본을 채집하여 프랑스 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는 특히 중국 조류 연구에 집중하여 640종의 조류 표본을 채집하였는데, 그중 504종은 유럽에서 발견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는 연구 결과를 《중국 조류》라는 저서로 집성하였고, 수집한 표본으로 북경 북당에서 박물관도 열어 큰 관심을 끌었다.
1872년 예수회는 강남교구에서 전반적인 과학과 문화 연구를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서가회를 과학 연구의 중심으로 삼기 위해 천문대도 세웠다. 천문대의 업무가 늘어나게 되자 1889년에는 지금의 상해천문대 서가회 분부(分部) 자리로 옮겼다. 서가회 천문대는 천문, 자기(磁氣), 기상(氣象)과 지진학 등 4개 부로 운영되었다. 천문학부는 1889년 여산(余山)으로 옮겨 천체 관측과 촬영을 할 수 있는 천체망원경 등 기기를 갖추어 천체 연구를 전담했는데, 지금의 상해천문대 여산분부로 운영되고 있다. 자기부(磁氣部)는 부근으로 궤도전차가 통행하게 되면서 관측에 영향을 받게 되어 1908년 곤산(昆山)으로 옮겼다.
서가회 천문대는 근대 과학 연구 기구의 체제를 갖추고 있어 중국 근대 천문학과 기상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1883년 정확한 시간을 알리기 시작하였고, 1914년 무선으로 시보를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매일 일기예보를 언론으로 보내었고, 4종의 천문 기상 분야 잡지를 발간하였다. 천문대의 기상 소식은 선박들의 안전 항해에 도움이 되었으며, 상해의 도시 현대화를 촉진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되었다.
자선과 구제 구제와 자선 사업 역시 천주교 선교 활동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육영당과 고아원의 운영은 천주교회가 중점을 둔 자선 사업이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영아들에게 영세를 받게 하면 모두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장성하면 훌륭한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영아들을 거두어 양육하는 사업을 적극 전개했다. 그러나 영아들의 사망률이 높았기에 민간에서 천주교회가 아이들의 피와 살을 먹고 약을 만든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난무하여 교회를 공격하는 빌미로 작용하기도 했다. 육영당의 영아들이 어린이로 자라면 고아원으로 옮겨서 교리 교육뿐 아니라 수예 등 실무 교육도 실시하였기에 이들이 장차 독립하여 사회 생활을 해 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천주교회가 경영하는 무료진료소는 빈곤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용을 받지 않고 진료해 주었기에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빈민 구제 역시 천주교의 주요 사업의 하나였다. 1849년 5-6월간 강남 지역 대홍수가 났을 때 예수회 선교사들이 상해로 몰려드는 이재민들에 대한 구제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것 그리고 1877년 산서 지역에서 전염병이 대유행하게 되었을 때 프란체스코선교회 모카가타(江類斯, Aloysius Moccagatta, 1809∼1890) 주교의 주도로 적극적인 방역 구제 활동을 전개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천주교회의 자선과 구제 활동은 천주교회의 명성을 좋게 퍼져 나가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선교 성과를 올리는 데도 좋은 영향력을 미쳤다.
사진 설명 및 출처 | 데이비드(譚圍道, Armand David) 위키피디아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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