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시작한 지 11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 강점기 하,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12년 9월 창립총회를 갖고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결의했다. 하지만 실제 선교사를 파송하기까지 약 1년의 기간이 필요했다. 1912년 6월 30일 제2회 황해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당시 대형교회인 성도 1000명의 재령읍교회 위임목사로 시무 중이던 박태로 목사가 선교사로 추천됐다. 1912년 12월 5일 소래(松川)교회에서 열린 제3회 황해노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회 서기였던 박태로 목사는 선교사로 중국으로 갈 수 있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재령읍교회 위임목사가 된 지 6개월도 안 된 상태였지만 박 목사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였다. 박 목사는 평양신학교 5회 졸업생이었다.
이에 앞서 한위렴(韩韦廉·William Blair Hunt) 선교사는 산둥(山东)성으로 가서 중국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중국 주재 미국선교사들과 더불어 선교 가능지역을 논의했다. 1913년 5월에는 박태로 목사가 평남 안주교회 김찬성 목사와 함께 산둥장로회와 선교지를 정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옌타이(烟台)로 떠났다. 산둥성 내 몇 고을을 직접 순례하던 이들은 옌타이 남서부에 위치한 라이양(莱阳)에 선교부를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받았다. 선교지를 확정하기 위해 정탐여행을 떠났던 박태로 목사의 첫 번째 선교편지를 읽다 보면 자신의 형편보다 중국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리저리 생각하니 죄 없이 정배 온 모양이나 이것저것 덮어 놓고 신령계로 생각한즉 감사하고 기쁜 마음 태평양도 부족이라 시시마다 홀로 앉아 동천 향해 기도하며 삼위 주께 통정하나, 이곳 인생 형편 보면 가긍하고 가련하오, 많고 많은 숫한 인종 박의박식 가련하되, 동네마다 좋은 집은 우상 봉사하는 묘요, 부녀들의 정형 보면 가련한 중 극하도다. (…) 여보 우리 부형 자매님네들 본방에 역사하는 형님들이여 일일시시 곤고할 때 이 형편을 생각하고 우리 조선 받은 복은 특별한 줄 깊이 알고 특별하신 성력으로 이곳을 위해 기도하며 진심 감사드립시다. (…)”
40여 세에 선교사로 부름 받은 박 목사는 중국어를 배우려니 기억력이 따르지 못할까 염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당면한 모든 일에 대한 답을 하나님 말씀 안에서 찾으려고 했다. 박 목사는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는 말씀으로 자신감을 회복했다. 고향과 부모, 형제 생각이 나고 거처가 곤란해질 때, 음식이 달라 어려울 때도 하나님 말씀으로 위로받고 소장했던 사진들을 보고 안식을 찾았다.
1913년 9월 하순 드디어 박태로·사병순·김병훈 목사는 가족과 함께 안둥현(安东县·현재 단둥(丹东))과 다롄(大连)을 거쳐 옌타이에 도착했다. 이때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평양 장대현교회를 출석한 적이 있었던 중국인이었다. 사역지인 라이양은 옌타이에서 161㎞ 떨어져 있는 변두리였다. 라이양은 선교사와 가족들에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식습관도 바꿔야 했다. 구할 수 있는 곡물은 밀가루, 소미(좁쌀)뿐이었기에 쌀 대신 소미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초기 한국교회는 선교사 파송 규칙이나 규정, 선교사자녀 교육, 안식년 제도 등에 대해 준비하지 못했다. 1912년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창립총회나 1913년 선교사 파송 이후 각종 회의에서 선교사 파송 규칙이나 규정이 문서화가 됐다는 기록이 없다. 물론 선교사 안식년 규정도 없었다. 훗날 2명의 선교사가 총회 전도국의 허락도 없이 사역지를 이탈한 지 1년이 지났을 때도 선교사 안식년 제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안식년 규칙이 마련된 것은 1918년이었다. 선교사자녀 교육에 대한 우려 섞인 한 서양선교사의 지적이 있다. “동료(조선) 선교사의 자녀들이 거리로 나가 싸우기도 하고 저속한 말을 배워도 별다른 교육 방안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선교사자녀 교육 문제가 총회 차원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15년 제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선교사자녀 교육 문제가 제기됐지만 구체적 방안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매월 선교사자녀 교육비 항목을 두고 비용 지출을 가능하게 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산둥성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선교 재정을 전국 교회의 감사헌금과 헌물로 충당했다. 당시 사회 여건상 감사절에 가장 많은 헌금과 헌물이 걷혔다. 1년 교회경상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액수였다. 각 교회의 감사절 헌금은 노회 담당자에게 보내졌다. 담당자는 그것을 총회 전도국으로 보내고, 선교 예산 책정 및 집행이 이뤄지게 했다. 선교사들은 정해진 예산 범위 내에서만 재정 사용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 간 갈등이 생길 요소가 적었다.
선교사들과 가족들에게 중국어는 또 다른 장벽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박태로 목사는 “중국어 발음을 모르기 때문에 글자를 아는 무식자와 같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선교사들은 중국인 어학 선생의 도움을 받았는데, 특히 당시 라이양에서 사역하려면 현지 방언 또한 익혀야 했기에 산둥 출신 어학 선생에게 표준어와 사투리를 동시에 배워야 했다. 초기 선교사들을 돕는 어학 선생 월급은 본국 총회 전도국에서 세운 예산에서 지출됐다. 선교사는 어학 선생 월급 결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1920년 7월 20일에 발행된 ‘신학지남’ 제3권 제2호에서 1917년 라이양으로 파송된 홍승한 목사는 이같이 밝혔다. “세상에 학(學)키 용이한 문자는 별무(別無·없으되)하되 중국 한문자란 것은 자수(字數, 글자의 수효)의 번다(繁多, 번거롭게 많음)와 자의(字義, 뜻)의 변동과 성음(聲音)의 분별이 천태만상이라 학키 심난(甚難, 매우 어렵다)하여 10년 이상을 학습해야 서책을 간투(看透·알아차리고)하고 장구(章句, 문장의 단락)를 제작하는 고로 부가자제(富家子弟, 부잣집 자손)나 능히 입학하고 빈가자제(貧家子弟, 가난한집 자손)는 능히 배우지 못함으로 (…).” 선교사 사모들의 어려움은 더했다. 가사노동과 자녀양육 등으로 중국어를 제대로 익힐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커져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당시 라이양에는 의사가 한 명도 없어 질병에 걸리면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원래 라이양 사람들은 기독교를 ‘서양 오랑캐의 종교’로 간주하고 선교사들의 전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문맹률까지 높다 보니 선교사들이 설령 전도했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양육하는 것도 어려웠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라이양 사람들을 모으고 전도에 힘쓰자 당시 중국에서 전례가 없었던 주일 강론회와 수요일 기도회가 만들어졌다. 1915년 성탄절에는 라이양교회 성도 30명이 인근 교도소를 찾아가 죄수들에게 전도하기까지 했다. 당시 라이양교회는 완전한 조직교회가 아니었다. 전도실의 기능을 가진 미조직 교회로 ‘복음당(福音堂)’이라고 불렸다. 1916년 가을경의 교세를 보면 세례인 12명, 원입인 30명, 집회 참석 인원 40여 명에 매주일 헌금이 80∼90전, 1년 주일헌금 총계는 50원이었다. 여기서 선교사들이 헌금을 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교인들의 헌금으로 중국교회가 자급해 나가야만 자립할 수 있다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외국 자본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회 재정을 보조하는 것은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사역의 가능성이 점차 높아져 갔지만 내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첫 번째 균열은 1915년 봄, 박태로 목사가 기침과 고열 등으로 더 이상 사역하기 어려워 철수해야만 했던 것. 1916년 4월 26일 박 목사 가족은 김영훈, 사병순 목사 가족들을 뒤로 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박 목사의 병세는 더욱 심해져 갔다. 1916년 6월 초 경성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사는 병의 원인을 찾지 못하고 위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소견을 내놓을 뿐이었다. 두 번째 균열은 김영훈, 사병순 목사가 1917년 봄 총회 전도국의 허락도 없이 선교지를 이탈한 것이다.
산둥 라이양 선교프로젝트가 좌초 위기에 이르자 총회 전도국은 치료 중인 박 목사에게 방효원 목사와 함께 다음 총회가 선교사 파송을 결정할 때까지 임시로 라이양으로 다시 나가 줄 것을 요청했다. 병약한 몸을 이끌고 박태로 목사는 1917년 5월 7일 방효원 목사와 함께 고국을 떠난 지 9일 만에 라이양에 도착했다. 라이양의 중국인 성도들은 선교사들이 온다는 소식에 기쁜 나머지 10리 밖까지 나와 선교사 일행을 맞이했다. 다음 날에는 라이양 외촌(外村)에 있는 교우 43명이 모여 환영모임을 갖기도 했다. 성도들은 선교사들을 몹시 좋아했고, 존경했다. 박 목사는 또다시 전도에 힘썼다. 당시 라이양교회는 세례받은 성도 18명 등 53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박 목사는 서리집사 2명을 세워 교회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그러나 박 목사의 몸이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 옌타이로 떠나야만 했던 박 목사를 위해 교우 30여 명이 새벽에 모여 통곡의 기도를 했다. 박 목사가 옌타이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는 옌타이 출신 교우들이 간호를 맡았다. 박 목사는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걷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결국 귀국해야 했다. 곧바로 경성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6개월간 치료를 받고 세 차례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의사들조차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박 목사는 사리원 집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한 번 누우면 옮겨 누울 수 없을 정도였다. 1년간 몸 한쪽만을 의지한 채 누워 있어야 했다. 박 목사 부인의 주름살은 늘어가기만 했다. 자녀들도 한숨 속에서 지냈다. 1918년 9월 6일, 박 목사는 48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태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국적과 나이를 초월한 사랑을 보여준 참된 제자의 모델케이스다. 선교사란 과연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그는 복음전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아니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위해 스스로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에 매달려야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자기 몸을 아끼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박 목사는 느꼈을 것이다. 그는 목회자로서 총회의 요청에 철저하게 순종했다. 황해도 재령읍교회의 위임목사 직분에 안주하지 않고 개척 선교사가 될 것을 요청받고 중국복음화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드렸다. 박 목사의 개척정신과 희생은 동생 박태화 장로를 통해 가계 모두 목회자로 헌신하는 아름다운 열매로 이어졌다. 박태로 선교사의 동생인 박태화 장로의 장남 박경구 목사는 순교자로, 박경구 목사의 아들 박창환 목사는 신학자로, 박창환 목사의 아들·손자인 박호진·박범 목사는 목회자로 하나님께 헌신했다. 2012년 4월 17일 예장 통합측 평북노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5대 목사 가계’가 탄생했다. 박호진 목사의 아들 박범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편 선교지에서 무단이탈한 김영훈, 사병순 목사에 대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책벌하지 않았다. 두 목사는 고국에서의 목회활동을 포기하고 1917년 7월 20일 ‘차이나’호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간 뒤 반전의 사역을 해나갔다. 김 목사는 미주 한인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는 우리 민족의 활동과 중국 및 동양의 관계를 들어 강하면서도 간결한 중국어 문장을 작성, 샌프란시스코 지방 중국신문인 ‘중서일보’ 1919년 4월 30일자에 발표했다. 김 목사는 샌프란시스코 거주 중국인들에게 독립운동을 도와 달라고 호소한 뒤 6월 7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새크라멘토 거주 중국인들과의 교섭을 맡았다. 6월 15일 새크라멘토 지방 중화회당(中华会堂·현재 중화회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그는 중국어로 연설했다. 김 목사는 중화회당에서 100여 명의 중국인이 모인 1919년 6월 15일 행사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연설 뒤에는 중국인 각 단체 직원들의 요청으로 중화루(中华楼) 만찬에 참석, 마침내 중국인들로부터 국민회 활동을 돕겠다는 확답을 받아냈다. 김 목사는 1921년 10월에는 국민회 북미총회 총회장 후보가 됐다. 총회장 후보가 되기 전인 9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제10회 총회에 그는 청원서를 보냈다. 이때 회의록을 보면 김익두 목사는 “지금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김영훈 씨가 중국 산둥으로 다시 보내 주시기를 바란다는 청원을 전도부로 보냈다”고 밝혔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온 김영훈 목사는 고향인 평북 의주 의산노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의산노회장은 휘트모어(N. C. Whittemore, 魏大模) 선교사였다. 의산노회는 교인들로부터 불신임을 받은 의주읍 서교회 김창건 목사 대신 김영훈 목사를 임시목사로 파송했다. 김 목사는 1923년 2월 27일 의산노회를 통해 정식으로 서교회 담임목사가 됐다. 1년 뒤 그는 의산노회장이 됐고 1925년에는 의주 최초의 사립학교인 양실학교장이 돼 인재양성에도 앞장섰다. 김 목사는 1927년 9월 9일 원산부 광석동예배당에서 열린 제16회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총회장에 선출됐다. 그는 1928년부터 1932년까지 청산유아원장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1대 산둥성 선교사, 미주 독립운동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등의 이력에도 불구하고 김 목사는 매우 안타까운 말로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9년 소천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또한 정확하지 않다.
반면 사병순 목사는 비교적 소박하게 미국에서 활동했다. 1918년 9월 5일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사 목사는 김 목사와 함께 새크라멘토에서 남쪽으로 100㎞ 떨어져 있는 맨티카교회 건축을 위해 각각 5원씩 헌금했다. 그해 10월 24일자 신한민보에 따르면 사 목사는 다뉴바지방회 학무원으로 활동했다. “다뉴바지방의 한국어학교(1반 6명, 2반 4명, 3반 3명 총 13명)에서 ‘대한역사’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사 목사가 주로 활동했던 곳은 다뉴바였다. 그가 담임했던 다뉴바한인교회는 웨스트 O(오)스트리트와 알타 에비 교차로에 있었다. 현재는 더 이상 교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뉴바 경찰국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대신 교회 옛터 앞에 기념비가 있다. 선조들의 독립운동 역사를 보존하려는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노력의 결실이다. 사 목사의 활동 기록은 1921년 2월 17일자 신한민보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다뉴바 국민회 창립 12주년 기념식에서 대표기도를 했다. 그해 2월 27일에는 국민회 다뉴바지방회에, 3월 1일에는 독립만세운동 경축행사에 참석했다. 1921년 3월 1일 새벽 5시 30분 ‘새벽광복기도회’에서 사회를 본 데 이어 오전 9시 경축회에서 대표기도를 인도했다.
사 목사에게 예상하지 못한 고통이 찾아왔다.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던 부인 송수은 사모가 1921년 일경에 체포된 것. 송 사모는 1919년 3·1 만세운동 후 ‘반석대한애국부인청년단’에 가입했다가 군자금 모집과 배일사상의 선전 및 불온문서의 배포 혐의로 체포됐다. 송 사모의 징역형 선고 소식은 1921년 11월 10일자 신한민보에 게재됐다. 여성으로서 독립자금을 거둬 임시 정부에 보내는 일에 깊이 관여했다. 송 사모는 일경에게 모진 고문을 받았다. 송 사모가 감옥생활을 하던 시절 사 목사는 미국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애썼다. 1921년 6월 다뉴바 교민들에게 구미위원부 경비를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해 8월 5일 대한여자애국단 다뉴바 지부 창립 기념식에 참석, 대표기도를 맡았다. 사 목사는 다음해 갑작스럽게 다뉴바한인장로교회 목사직을 내려 놓았다. 그해 출옥한 송 사모가 고문의 후유증 탓인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 듯하다. 그때 사 목사와 송 사모 사이에는 9살 된 어린 딸 사인애가 있었다. 사 목사는 고국의 고아원에 후원금을 보내는가 하면 한인의 장례 및 하관식 예배를 주관하며 1924년까지 다뉴바에서 활동했다. 1924년 로스앤젤레스 3·1절 행사를 끝으로 그의 미국 행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는 1930년대 잠시 중국에 나타났다. 1935년 8월 톈진(天津)에 머물던 사 목사가 교역자 공석인 톈진한인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다. 사 목사는 1944년 8월 9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에서 67세의 나이에 소천했다. 이와 관련해 사 목사의 외손자 김희준 권사가 이런 말을 남겼다. “외조부(사병순 목사)는 사망 1개월 전 강원도 금화경찰서 고등경찰계에서 혹독한 고문조사를 받으신 뒤 풀려났어요. 우리 집에 오셨는데 그때가 저와의 첫 대면이었습니다.” 사 목사가 소천 전까지 독립운동에 관여했음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한국교회는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에 이어 5명의 목사 선교사를 라이양에 더 파송했다. 방효원(1917년부터 1935년까지 활동), 홍승한(1917년부터 1924년까지), 박상순(1918년부터 1939년까지), 이대영(1922년부터 1948년까지), 방지일(1937년부터 1957년까지) 목사 등. 이밖에 최초의 여성선교사인 김순호(1931년부터 1939년까지)를 파송했고 선교사자녀학교 교원으로 김윤식 의사의 부인인 대구 신명여학교 교사 출신 박희복 씨를 비롯해 조소임, 이영애, 편순남 등이 활동하도록 했다. 한국교회는 최후의 중국선교사 방지일 목사가 1957년 불가항력적으로 철수해야만 할 때까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선교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국교회는 이처럼 초기 믿음의 선배들의 구령 열정을 잊지 말고 중국인을 위한, 중국인에 의한 중국교회가 세워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미지의 땅을 향해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의 정신으로 떠날 수 있었던 선진들의 유지를 받들어 선교사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파송하고 지원하는 데 결코 인색해서는 안 된다. 선교사들 또한 똑같은 사람이기에 넘어질 수 있음을 이해하고 어떠한 난관에도 주님의 제자된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 하나님의 메시지 자체가 될 수 있도록. 현재 한국교회는 20∼30대 선교사가 전체 선교사의 8%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10년 내 은퇴 연령을 맞이하는 선교사의 비율이 50%를 넘을 것이라는 통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선교가 단순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이 서 있는 그곳을 ‘땅끝’이라고 여기고 소금과 빛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해나가되 타문화권에 대한 부르심을 확인한 성도들이라면 파송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잘 훈련하여 현지인들과 ‘융합 선교’를 해나갈 수 있도록, 장기 선교사로 헌신했을 경우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것도 준비할 수 있도록 ‘선교적 토탈케어’ 관점을 갖고 선교정책을 펼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도들이 일상의 삶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가도록 교회와 목회자들이 도전하고, 지도자들이 실질적인 모범 사례가 되는 데도 적극성을 보여야 한다.
사진 설명 | 황해지역 교역자들과 함께한 한위렴 선교사(세 번째 줄 맨 우측) 사진 출처 | 평양대부흥 왕빈 | 중국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