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에 뿌리를 내린 지 111년 된 화교교회,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마이너리티다. 서울 정동 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다 경향신문사 건너편,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여한중화기독교 한성교회(旅韓中華基督敎 漢城敎會)’. 이 교회는 1912년 YMCA에서 사모 선교사 C. S. 데밍(Deming, 戴德明)과 중국인 처다오신(車道心)의 만남이 예배로 이어지며 시작됐다. 당시 조선에 거주 중이던 화교는 1만7000여 명. 그중 서울에 2500명, 인천 제물포에 1500여 명이 살았다.
산둥(山東)성 하이양(海陽) 출신 처다오신은 미국선교사 헌터 코벳(Hunter Corbett, 1835∼1920)이 설립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신앙 때문에 부친에 의해 산 채로 매장을 당할 뻔했다가 어머니와 외삼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망쳐 옌타이(煙台)에서 중의학을 배운 뒤 조선으로 건너왔다. 한의사로 활동하며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한국인과 결혼한 그는 중국인 전도활동을 할 수 있는 적임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인도로 저장(浙江)성 진화(金華)에서 태어나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관심이 많았던 데밍 사모 선교사도 조선 거주 중국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적합한 중국인을 찾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기도응답이라고 상대를 바라보게 됐고, 함께 노력한 끝에 1912년 5월 YMCA의 방 한 칸을 빌려서 모임을 시작했다. 집회에 참석한 대부분은 처다오신을 통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었다. 예배를 드린 지 반년쯤 지났을까, 자신들만의 예배 장소가 필요하다고 느껴 교회 건축과 목회자 청빙을 위해 기도했고, 그 결과 서소문에 있는 대사관 주방장 푸저우(福州)인 소유의 신축건물을 성도들의 헌금으로 임대하게 됐다. 산둥 장로교 선교부 산하 교회들을 돌보던 중국인 전도자 리커펑(李可風)이 한성교회의 1대 목회자로 정식 부임했다. 1914∼1915년 매주일 예배 참석자는 30∼40명에 이르렀다. 1915년 11월 중국 칭저우(靑州) 신도(神道)대학 출신인 위신민(于新民) 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부임했지만, 교회 내부 분열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어 원산으로 목회지를 옮겨야 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도 서울 이외 지역에 있던 화교들을 위한 교회 설립이 이어졌다. 원산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찾아다니며 기독교 서적을 배포하고 복음을 전했던 위신민 목사에 의해 조선의 두 번째 화교교회가 원산(1917년)에 설립된 이래 인천(1917년), 평양(1923년), 부산(1929년) 등에 화교교회가 각각 세워졌다. 인천 유일의 화교교회인 인천중화기독교회의 시작은, 데밍 사모 선교사와 중국 기독인 쑨라이장(孫來章)이 1917년 6월 개인 집을 예배당으로 임차해 화교 대상으로 사역한 것이 계기다. 1922년에는 고풍스러운 예배당을 지어 차이나타운의 명물로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쑨라이장은 자신 재산을 기부하고 중국 난징(南京)에서 신학공부를 한 뒤 1925년 목사안수를 받고 인천중화기독교회에서 7년간 목회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화교교회들의 유지 자체가 어려워졌다. 조선 화교교회를 대표하는 중국인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생존을 위해 일제에 타협해야 했다. 국방헌금을 거둬 서대문서에 바치면서 자신들의 조국인 중국을 침략한 일본 황군 덕분에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고백해야 했다.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조국과 동족을 배반하는 치욕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두 개 국가 사이에서 정체성의 갈등을 겪었던 조선 화교 성도들은 6·25(한국)전쟁으로 사방으로 흩어졌고 설상가상 예배당까지 파괴돼 더 이상 모일 수 없었다.
북한에 있던 화교교회들의 소식도 완전히 끊어졌다. 당시 성도들의 생존 여부조차 알 수 없다. 전쟁 이후 서울을 떠났던 화교들이 다시 돌아오고 서구선교사, 화교교회 사역자, 한국교회 목회자들로 중화기독교 재건위원회가 구성되면서 화교교회의 예배가 속속 회복됐다. 1960년 중화기독교 한국노회가 창립되고 1962년 대만에서 청빙한 목회자 5명이 중화기독교회에 배치되고 화교교회에 대한 지도력이 이양되기 전까지는 중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한국인 목사들이 화교교회를 적극 섬겼다. 부산과 수원은 중국인 사역자들에 의해 교회가 움직였다. 서울의 경우 YMCA를 빌려서 모임을 재개했다가 피어선 성경신학교 건물을 빌려서 모임을 이어갔다. 헬렌 맥클레인(Helen McClain, 梅凱蘭) 선교사가 앞장서서 해외 모금을 통해 1958년에 정동 25번지, 현재의 교회 터전을 매입해 1960년 예배당을 완공했다. 수원(1955년), 대구(1957년), 영등포(1958년), 군산(1959년) 등에도 화교교회를 설립했지만 1960년에 세운 대전 화교교회는 1968년을 이민자들의 급격한 감소로 문을 닫아야 했다. 현재 재한 중화기독교연합회에 속한 교회는 서울, 인천, 부산, 수원, 대구, 영등포, 군산에 있는 일곱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시절부터 우리나라 정부의 차별적인 제도로 인해 한국화교들은 위축된 삶을 살아가야 했다. 취직도 쉽지 않았고, 땅 한 평 매입하는 것도 어려웠던 시절이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러다 보니 요식업을 선택해야 하는 화교들이 많았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 등지로 이민을 떠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야 했다. 화교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한국을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화교의 경우 해외로 출국할 때나 한국에 거주할 때 여간 번거롭지 않다. 중화민국 대만 여권을 갖고 있지만 이 여권은 대만 현지인의 여권과는 다르다. 대만과 사증 면제 국가가 100여 개에 달하지만 한국화교는 대만 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비자가 필요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살아간다고 해도 한국 국적이 없기 때문에 영주거주권을 받으면 만기 만료 후에는 반드시 연장 신청을 해야 하고, 기한 이후 연장 신청을 잊었을 땐 100만 원 이상 과태료를 내야 한다.
중국을 여행할 경우 중국 정부가 발급한 중국 여행허가증을 받을 수 있지만 대만 현지인 허가증과도 다르다. 여행허가증으로 항공기 국제선을 탑승할 수 있지만 국내선을 이용할 수 없다. 한국 화교로 살아가는 것은 상당히 불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국 화교 청년들 중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자, 선교사 등으로 헌신하도록 해 화교교회의 명맥을 이어가도록 하셨다. 1992년 한중수교 전후 일거리를 찾아온 중국인 노동자와 중국 유학생들이 늘어나면서 화교 사회도 점차 변화됐다. 중국에서 또는 한국에서 신앙을 접한 중국인들 가운데 한국교회 내 중국어 예배 처소를 찾는 이들이 점차 늘어났고, 한국교회 입장에서도 중국인들을 전도하고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관련 사역자를 세우고 예배 부서를 운영해나갔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온누리교회, 할렐루야교회, 사랑의교회, 부산 수영로교회, 대구 동신교회 등 유명 교회들마다 중국어예배를 진행하면서 화교교회를 찾는 중국인들은 오히려 많지 않았다. 기존 화교교회는 성장세를 보이지 않았고, 명맥만 이어갈 뿐이었다.
하지만 한국 화교교회는 중국선교와 선교중국의 모판이 되기 충분했다. 70년대 말 여한중국기독교 한성교회 류촨밍(劉傳明) 담임목사는 중국선교신학교를 설립해 한국 청년들이 중국선교의 꿈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도왔다. 한국OMF 대표를 역임한 김기문 선교사(대만) 등이 이 시절 학생이었다. 1984년에는 화교 청년들과 한국 청년들이 힘을 모아 중국선교 모임인 ‘띠지(地極)’를 설립했고, 1989년 중국복음선교회로 발전했고, 1994년 중국선교훈련원을 세워 선교현장을 선(先) 이해하는 선교사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애화도서관도 설립해 중국 관련 서적을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중국 민족의 복음화’, ‘중국교회의 하나님 나라화’, ‘중국문화의 그리스도화’라는 비전으로 활동한 중국복음선교회와 중국선교훈련원을 통해 배출한 선교사들은 중국과 대만 등지에서 사역을 펼쳐 나갔다. 중국선교 200주년을 맞이한 해인 2007년, 한국교회 안에 선교중국 운동의 불을 지필 수 있었던 것은 중국복음선교회 1대, 2대 총무였던 이상란 선교사(대만), 박화목 선교사(중국) 등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식년을 한 번도 갖지 않았던 이 선교사는 목회하던 대만 교회에 양해를 구한 뒤 한국으로 들어와 3개월여 중국복음선교회 사무실에서 상주하면서 무보수로, 오히려 자신의 재정을 써가며 미션차이나(선교중국) 2007 대회를 준비했다. 대회는 2007년 8월 20일부터 24일까지 경기도 분당 할렐루야교회에서 3박 4일 집회(20∼23일), 한국교회 리더십을 위한 중국선교전략회의(21∼22일), 국제학술콘퍼런스(23∼24일),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 중국선교 200년 기념 사진전(20∼24일) 등으로 진행됐다. 집회는 6개의 주제 강의와 30여 개의 선택 강의, 저녁집회, 선교사의 애환을 담아낸 토크쇼, 하스데반 선교사와 고형원 찬양사역자가 인도하는 경배와 찬양 등 다채롭게 꾸며졌다. 로버트 모리슨, C. T. 스터드, 허드슨 테일러 등 서양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어떻게 사역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 180여 점이 이때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대회를 위해 이 선교사는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의 화교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강사로 참여하도록 했다. 박 선교사는 중국 가정교회의 산증인인 볜윈보(邊雲波, 1925∼2018)와 중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선교사들을 섭외해 전문 사역분야를 강의할 수 있도록 했다. 류촨밍 목사는 토마스 왕(王永信, 1925∼2018) 목사가 주강사로 참여하도록 노력했다. 이 대회 참석을 위해 한국 화교들은 자체 하계수련회 개최까지 포기할 정도로 화교권 기독인들의 관심과 호응이 컸다.
미션차이나 2007 대회의 의미는 기존의 중국선교를 더 이상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중국선교를 향한 전 세계적인 선교적 에너지를 보다 정교하게 동력화, 동역화하고 선교중국으로 점진적으로 나아가게 하자고 역설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중국교회가 성장한 뒤 선교대열에 합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선교공동체로의 교회로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고, 교회의 모든 성도에게 자민족 복음화를 넘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화인들을 선교동역자로 세우도록 도전하고 일상의 삶을 선교적으로 살아가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선교하는 중국교회와 중국인 맞춤의 선교중국 모델이 만들어져 모든 민족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민족을 선교공동체로 전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모든 민족과 더불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라나타 운동을 펼치자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111년이 된 여한중화기독교 한성교회를 생각하면서 만감이 교차된다.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 복음의 전당으로서, 한국 화교기독청년들과 한국 기독청년들의 가교 역할로서, 중국선교훈련 기지로서, 미션차이나운동의 시발점으로서 제 역할을 충분히 해왔다고 본다. 화교교회들이 더 분발하고 한국교회와 선교적 연대를 맺어 미션차이나를 향한 또 다른 기여를 하기에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화교교회가 우리 주변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로 다가가는 노력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의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계기를 많이 만들어 나가기를 바란다.
사진 출처 | 여한중화기독교 한성교회 페이스북(위) 왕빈 | 중국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