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학부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던 중 2002년에 경북대학교에서 유학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IMF 금융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은 들어본 적 있었으나 붉은 악마의 월드컵 응원전은 한민족의 위대한 국민성을 피부로 실감하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몇 년간의 유학 생활과 연구원 생활을 통해 한국과 한국 사람은 나에게 참 좋은 인상으로 남았고, 귀국했다가 다시 2017년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제주에서의 삶은 장기 거주를 동경하기에 이르렀다.
마침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로 입학하게 된 딸이 “내가 중국인이라 다른 친구들과 다른 것이 싫다”라고 했던 말 한마디는, 등교를 눈앞에 둔 아이가 친구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지 걱정이었던 나에게 왕따와 학교 폭력에 관련된 뉴스를 떠올리게 했다. 아이가 건강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던 나는 결국 귀화 신청을 했다. 그리고 2년을 다 채운 2021년 초에 딸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감사하게도 딸은 외국인 신분일 때나 한국 국민일 때나 상관없이 친구관계도 좋았고 밝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다. 그렇다고 항상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학교 친구가 “네가 중국인이니, 네가 바이러스를 옮겨와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힘들다”고 했던 말이나, “중국 사람들은 아무 벌레나 막 먹는다”라며 일부러 딸아이 앞에서 했던 중국을 비난하는 말들은 아직은 어린 딸아이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힘들어하는 딸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문드러졌고 아파하는 딸을 품어주고 위로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급기야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가져오기도 하고, 손톱까지 물어뜯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를 찾았다. 다행히도 한국은 중국보다 복지사업이 더 잘 되어 있었다. 전문상담기관은 높은 비용 때문에 문을 두드릴 엄두도 못 내지만 청소년복지센터에서 20회기까지 무료 상담을 받았고 또 연계 프로그램인 멘토-멘티 과정을 1년 정도 참여하면서 아이도 큰 도움을 받았고 더불어 엄마도 아이와 함께 성장해 갔다. 정체성 확립과 자존감 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왔고 여러 도움 덕분에 지금은 내면이 단단하고 건강한 아이가 되어 있다. 이제 또 사춘기라는 과정도 지나게 되겠지만 이 또한 별 탈 없이 잘 지나가길 지켜볼 뿐이다.
우리는 중국과 한국 두 나라 국적의 다문화가정이다. 통계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다문화혼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10.3%, 다문화 출생아 비중이 6%로 이제 한국은 단일민족이라 할 수 없다. 우리 부부는 한국에서의 유학 경험이 있고 교포여서 한국 생활에 어려움이 별로 없다. 그러나 오리지널 외국인과 한국인으로 구성된 다문화가정들을 보면 문화 차이로 인한 부부관계나 고부간의 갈등, 외국인 엄마의 자녀양육 등 여러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게 된다. 정부나 지역 사회에서 다문화가정을 위해 큰 노력을 하고 있고 실제로 다문화가정은 일반 가정에 비해 여러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방학마다 지역 특성화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딸아이는 제주대학교에서 진행하는 영어와 말타기를 함께할 수 있는 어마어마(語馬語馬)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즐겁고 유익한 시간도 보내고 한국마사회에서 발급하는 기승능력인증 포니 3등급 인증서도 받은 아이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던 프로그램이었다.
제주시 평생학습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시민을 상대로 학기마다 적은 비용으로 평생학습을 지원하는데 나도 다문화가정에게 주는 혜택으로 무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적극적으로 찾아보면 보다 다채로운 활동과 도움이 가능할 것 같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나 외국인근로자센터 등 정부 지자체나 협회와 단체들이 다문화가족들이 정착하는 데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이다.
나는 중국 교포 3세다.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중국 내 민족의 수는 총 56개, 이 중 다수민족인 한족이 전체 인구의 약 92%를 차지하고 나머지 55개 소수민족이 전체 인구의 약 8%를 차지하고 있다. 동포들은 중국에서 조선족으로 불린다. 조선족은 한민족이 여러 가지 이유로 중국으로 이주한 이주민의 후손들이다.
조선족 이주의 역사는 여러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해방 이전까지 보면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1차로 19세기 후반에 함경도와 평안도 농민들이 기근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 지린(吉林)성 지역으로 이주했고, 2차로 1910년대에 독립운동가와 일부 농민들이 지린 지역으로 이주했다. 3차로 일제의 만주사변 이후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경상도 농민들을 헤이룽장(黑龙江)성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3차 이주 때 헤이룽장성 우창(五常)이라는 지역으로 건너가셨다. 그리고 1945년 해방이 되었을 때 이주민의 대부분이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가셨다는데, 조부모님들은 그곳에 남아서 조선족이 되셨고 우리 아버지도 나도 그곳에서 태어났다. 조부모님은 이주정책에 의해 강제로 이주하셔서 언어가 통하지 않던 중국에서 이주민의 서러움을 당하며 사셨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현재 조부모님의 고향에서 언어의 불편함이 전혀 없이 삶에 만족하며 이주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한국 사람들과 이질감이 거의 없이 잘 적응하며 살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중국에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우리 부부는 제주도에 오자마자 교회 공동체를 만났고 봉사하면서 만난 섬김이들과 구역원들과 소그룹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삶을 나누고 믿음을 키워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소속감이 생겼고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받으며 극복해 나갔던 것 같다.
한국교회에서 받은 넘치는 사랑을 우리는 중국어 예배를 드리러 오시는 분들께로 흘려보냈다. 중국어 예배부를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은 이국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외롭고 힘든 일들을 작은 공동체를 통해 해결해 갔고 위로를 받았다. 중국에서 기독교 탄압으로 교회들이 강제 철거를 당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하며 눈물로 기도했고, 이곳에서 마음껏 찬양하고 예배드릴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또 코로나19로 두 나라 사이에 왕래가 어려웠던 지난 3년은 가족이 아파도 보러 갈 수 없어서 힘들어했다. 유학생들을 섬기면서 20여 년 전 가난했지만 순진했고 열정이 넘쳤던 우리의 모습을 보았고,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는 다문화가정과 성경 읽기와 큐티 나눔을 하며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가장 어려웠고 또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던 정말로 힘들었던 일이 있었다. 바로 아래층과의 층간 소음 문제였다. 전에 사셨던 분이 아래층과 관계의 어려움을 우리에게 호소하셨지만 우리는 문제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아래층에 사시는 분은 도배할 때부터 찾아오셔서 주의를 주셨다. 우리는 카펫을 깔고 모든 테이블과 의자에 신발을 신겨 방음 조치를 했다. 그리고 걷는 것도 날아다니듯 조심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초인종과 내선을 눌러 주셨고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어로 한참이나 난리를 치셨다.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소통해 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옆 라인 소리도 들리고 위아래 층의 소리도 들리는 연립 빌라여서 생활소음 정도는 감안해야 하는데 집마다 찾아다니셔서 동네에서 예민하기로 소문난 분이셨다.
우리의 괴로움을 아시고 교회에서 정말 많은 분이 함께 중보기도를 해 주셨고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부딪힐 무렵 그분은 1층과 한바탕 싸우고 이사를 나가셨다. 하나님은 내가 억울함을 당할 때조차 혈기대로 할 수 없도록 우리 집 현관에 교회 명패를 붙여 주셨고 3년 동안 나의 인내심을 키워 주셨다. 지금도 욥기를 읽을 때면 한 번씩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고는 한다. 나의 어려움은 욥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고 또 농사일이나 식당 일이나 현장 막노동하시는 분들이 겪는 육체적 힘듦이나 정신적 스트레스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 일로 인해 내 믿음이 성장한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신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병원과 대학교 그리고 연구원에서의 경력으로 한국에서 일을 해보려 했더니 자격증이 없이는 어떤 일도 힘들었다. 경단녀가 된 나는 어렵게 사회복지사 자격증에 도전 중이다. 중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각종 성적표와 졸업장을 주중 한국대사관의 인증 과정을 거쳐야만 자격증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고, 18개월 과정을 서류상의 어려움으로 2년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 진행 중이다. 나와 비슷한 상황인 분들이 복잡한 서류 준비가 힘들어서 시작도 못 하고 포기하는 것을 자주 봤다. 훨씬 많은 이주민이 한국어 소통과 문서작성 등이 어려워 사무직은 시도도 못 하고 단순 노동력으로 최저임금이나 시급으로 살거나 가정주부로 산다. 실제로 임금체불이나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해도 꾹 참고 사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사회복지 실습과정이 끝나면 곧 사회복지사의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경험을 살려 요양원이나 호스피스 병동 일을 할지 아니면 청소년복지나 다문화 관련 일을 해볼까 기도 중이다. 두 나라 문화와 사회를 경험했던 내가 잘할 수 있고 또 보람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기쁘게 맡겨 주실 일이 무엇일까 묵상하며 귀 기울여 듣는 중이다. 지금까지 인도하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앞으로도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나를 불러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이 내가 소명의식을 갖고 할 수 있는 일도 예비해 주셨을 것이다. 내가 있는 그곳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나로 인해 천국이 되면 참 좋겠다.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났고 갈 바를 알지 못하였으나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다고 하였다.
한 세기 전에 중국 만주 땅에 누군가가 뿌려 놓았던 복음의 씨앗이 그곳에서 이주민으로 사시던 우리 할머니를 통해 아름답게 열매를 맺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중국에 들어갈 때 이애실 사모의 《어! 성경이 읽어지네》라는 책을 샀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13억 중국인의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한다”라고 적었던 것이 생각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순종의 발자취를 따라, 사도 바울의 선교여정의 발자취를 따라 이제 나도 이 땅에서 이주민으로 살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만남을 통해 나의 삶을 통해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음을 믿는다. 그렇기에 어느 나라 국적으로 살든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로 천국과 영생을 누릴 것이며 이 좋은 소식을 전할 사명을 두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구원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립니다. 그분은 만물을 그분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빌 3:20-21)
사진 출처 | 연합뉴스(재외동포재단 "재한 동포 지원 사업 신청하세요") | EKW이코리아월드 홍해연 집사 | 제주성안교회 중국어 예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