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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의 해산
18세기 중엽 유럽 각국에서 예수회 수도사가 궁정 음모에 깊이 참여하는 등 비판 여론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1759년 포르투갈, 1764년 프랑스, 1767년에는 스페인 정부가 각각 자국 내 예수회 수도사들을 잇달아 추방하였다. 포르투갈 정부의 예수회 수도사 추방 조치는 중국까지 이어져 1762년 예수회 수도사 24명이 포르투갈 관하의 마카오에서 쫓겨났다.
1773년 교황 클레망 14세가 논란의 중심에 오른 예수회 자체의 해산을 명하는 교서까지 발표하였다. 그 뒤 1775년 이 소식이 북경(北京)으로 전해졌고 결국 중국의 예수회도 해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경에 주재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교황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당시 북경에 남아 있던 할러스타인(A. Hallerstein, 劉松齡, 1773-1774)과 브느와(P. Micheal Benoist, 蔣友仁, 1715-1774) 등 북경 예수회 선교사들은 더 이상 예수회 수도사의 신분으로 중국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최후의 예수회 선교사인 푸와로(Louis de Poirot, 賀淸泰, 1735-1813)가 소천하면서 중국에서 예수회 선교사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졌다. 마테오 리치가 1583년 광동(廣東)에 들어와 중국 선교를 시작한 이래, 1775년 중국 예수회가 해산할 때까지 190여 년간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한 예수회 선교사는 모두 456명이었다는 통계 자료가 있다.1)
견사회(遣使會)의 계승
예수회가 교황에게 해산 명령을 받게 되자,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는 중국에서 예수회가 전개하던 선교사역을 계승할 수도회를 물색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수도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 견사회(遣使會)가 1783년 12월 7일 포교성성(布敎聖省, Sacra Congregatio de Propaganda Fide)의 정식 위임을 받아 중국 예수회의 선교사역을 이어받게 되었다. 루이 16세는 예수회가 중국에서 보유했던 전 재산을 견사회에 넘겨주었다.
견사회(Lazarite 혹은 Lazarist)의 공식 명칭은 ‘The Congregation of the Priests of the Mission’으로, 1624년 빈센트 드 폴(St. Vincent de Paul)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견사회는 가난하고 병들어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들에게 영적 차원의 도움을 제공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삼고 봉사활동을 전개하였으나, 해외 선교도 견사회의 목표 중 하나로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 포교성성의 지정을 받아 최초로 중국에 온 견사회 선교사는 로오(Nicolas Joseph Raux, 1754-1801, 羅旋閣 또는 羅廣祥), 길랭(Jean-Joseph Ghislain, 吉德明 또는 冀若望, 1751-1812), 파리(Paris, 巴保祿 또는 巴茂正) 세 사람이었다. 그들은 1785년에 북경에 도착하여 건륭제(乾隆帝)를 접견하고 흠천감정(欽天監正) 겸 국자감산학관(國子監算學官) 등의 관직에 임명되어 기존 예수회 선교사들이 맡았던 궁정 업무를 담당하였고, 프랑스 예수회가 관할하던 북경 천주교회 북당(北堂)도 맡게 되었다.
로오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으로 동료 선교사 두 명과 함께 1783년 프랑스를 출발하여 마카오를 거쳐 1785년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는 북경 북당의 주임신부 겸 견사회 북경 책임자가 되었다. 중국어와 만주어에 능통하여 만주어 문법과 사전을 저술하였고, 궁정 번역을 담당하고, 1788년 흠천감정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과학 기술에도 식견이 넓어서 1793년(건륭 58년)에 영국 마카트니(Macartney, 馬嘎爾尼) 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바친 측량 기구와 천문 기기에 관련한 여러 기구도 주도하여 조립하였다. 그는 1790년 초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따라 북경에 온 조선 교회의 밀사 윤유일(尹有一)을 만나 바오로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주는 등 조선 선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길랭은 로오 선교사의 북경 북당 사역을 도왔고 의학, 물리, 기계 제조에 능통하였다. 파리 역시 로오 선교사의 북경 북당 사역을 도왔다. 그 역시 기계 제조에 뛰어나서 예수회 선교사 방타봉(Jean-Mathieu de Ventavon, 汪達洪, 1733-1787)을 대신하여 기계 제조 직무를 담당하였고, 크고 작은 시계와 오르간 등을 만들었다.
견사회는 예수회가 떠난 중국에서 어려움을 감수하며 선교사역을 이어 나갔다. 당시 국내외 환경은 좋지 않았다. 중국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고, 유럽의 지원도 줄어들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속적인 국력 쇠퇴, 프랑스 교회의 부패와 그로 인한 지원의 감소, 개신교회의 약진 등으로 각국의 해외 선교를 향한 열정은 갈수록 식어갔다. 견사회는 1784년 이후 1820년까지 단 28명의 선교사만이 중국으로 파견되었고 그중 대다수는 마카오에 머무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북경에 주재하던 로오 선교사는 선교활동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1801년(청 가경 6년) 11월 6일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천여 명의 중국 교우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북경과 마카오에 각각 수도원을 세워 17명의 뛰어난 중국인 성직자를 양성하였으며, 여러 곳에 학교(몇 개의 여자학교를 포함)를 세워 선교 거점의 기능을 감당하게 했다. 당시 견사회가 관리하고 있던 교우들은 약 4만 명으로 직예(直隸), 내몽고(內蒙古), 절강(浙江), 강소(江蘇), 강서(江西), 호북(湖北), 하남(河南) 등 각 성(省)에 분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주
1) K.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167쪽.
사진설명 | 견사회 로오(羅廣祥)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조선 교회 윤유일(尹有一)의 초상
사진출처 | 네이버 카페 / 삶의 배움과 나눔터 https://cafe.naver.com/life220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