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월드운동’, 전 세계의 모든 민족이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자민족 복음화를 뛰어넘어 함께 살아가는 주변 이웃은 물론 국경과 지역, 성별과 세대를 초월해 모든 민족에게 다가가는 ‘선교하는 세계운동’, 즉 미션월드운동을 펼치면 어떨까. 그리스도인의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온전히 감당하려고 할 때 이를 위해 ‘백 투 더 바이블’에 좀 더 집중하고 온몸으로 실현하려고 할 때 미션월드운동의 처음과 끝은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중국어권을 비롯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북중미, 남미, 오세아니아 등 모든 언어권의 그리스도인이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자 비전이라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특정 선교사들만이 이 같은 거룩한 사명을 감당하도록 강요(?)한다면 이는 매우 엄중한 직무유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와 한국선교연구원(KRIM)의 ‘2021 한국선교현황 통계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가 지난해 12월 기준 전 세계 167개국에 파송한 선교사는 2만2210명이며, 이들 가운데 60세 이상은 5365명으로 전체의 24.1% 수준이다. 70세까지 선교현장에 있다고 가정하면 10년 내 한인선교사 5명 가운데 최소한 1명 이상 은퇴한다는 의미다. 이 밖의 연령분포를 보면 50세 이상은 8661명(39%), 40세 이상은 6319명(28.45%), 30세 이상은 1653명(7.44%), 29세 이하는 전체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212명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선교 동력을 감안해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앞으로 MZ세대 선교사가 전체의 10%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선교사의 노령화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성적표다. 현재 타문화권 선교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사역하는 한인선교사들이 다른 나라 출신 선교사들과 힘을 합친다고 해도 전 세계 MZ세대의 세태를 고려할 때 당대에 미션월드운동을 감당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오랫동안 고민해온 것이 있다.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완수하도록 우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보다 정통하려고 애쓰고, 알고 깨달은 만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운동이 일반화하면 곧 이것이 세계선교운동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자문화든 타문화든, 가난한 자든 부자든, 병든 자든 건강한 자든, 어떤 지역이든, 어떤 세대든, 어떤 민족이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작은 일에 충성된 종의 영성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영역을 변화시켜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려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주님의 다시 오심은 어제보다 오늘이 좀 더 나은, 오늘보다 내일이 좀 더 나은 ‘그리스도인 됨’, ‘교회 됨’으로 준비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두 가지가 생각난다. 국제OM선교회의 선교선인 ‘둘로스’와 중국 윈난(云南)성 바오산(保山)에서 52세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 리수(傈僳)족 선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제임스 프레이저(1886∼1938) 선교사.
2007년 6월 일본 니가타에 정박한 둘로스호 사역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특별한 꿈과 비전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을 위해 흘리는 땀, 희생과 헌신, 검소한 생활, 겸손…. 둘로스호에서 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 둘로스 사역자들에게는 4인당 하나의 선실이 제공됐다. 2층 침대 2개와 책상 하나, 침대와 침대 사이의 비좁은 공간이 전부다.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도 없다. 그나마 자녀를 동반한 부부 사역자에게는 거실 하나가 추가될 뿐이다. 식단을 보면 검소함 그 자체다. 하루 식단을 돈으로 환산하면 3달러어치이다. 아침에는 빵과 우유에 시리얼, 점심과 저녁은 당근, 오이, 토마토 등 채소와 정체불명의 음식이 주식이다. 20대 젊은이들에게는 매우 열악한 식단이다. 이 때문에 음식을 남긴다는 것은 사치다. 사역자들은 유통 기간이 지난 통조림을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가 만난 둘로스 사역자는 이를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다.
당시 나는 자원해서 그릇 닦기에 나섰다. 신나게 접시를 닦고 있는데 젊은 사역자들이 다가와 “매우 잘한다” “고맙다”며 감사함을 표시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느껴졌다. 수백 개의 접시와 포크, 수저 등을 씻으면서 둘로스의 생명력을 곰곰이 따져봤다. 둘로스에서 ‘내려놓음’은 일상사다. 모든 사역자들은 경험과 지식, 명예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추구했다. 배의 밑바닥 엔진룸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면서 작업 중인 사역자들도 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처음 둘로스에 승선했을 때는 자아가 있을지 몰라도 2년 뒤 배에서 내릴 때면 애타심만 남게 된다”는 한 사역자의 고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둘로스를 방문했던 프랑스의 유명한 한 사진작가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둘로스 사역자들 같다면 이 세상의 문제가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나를 낮추는 것이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둘로스 사역자들이었다. 남을 먼저 고려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 자아 죽이기는 둘로스의 주요 일과였다. ‘5일 작업, 1일 전도, 1일 휴식’. 2년간 빠듯한 일정을 소화해낸 뒤 배를 떠날 때면 어김없이 ‘찰리’라고 불리는 중고품 나눔터에 자신의 물건들을 내놓는 것이 둘로스의 영성이다. ‘찰리’는 뒤를 따를 후배 사역자들을 위한 조그마한 배려다. 선상의 삶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 살을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그런 둘로스 생활이 그리워진다. 둘로스의 매력은 하선한 뒤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지금은 둘로스를 탈 수 없게 됐지만…. 2009년 12월 31일자로 ‘떠다니는 유엔’으로 불리던 선교선 둘로스호가 운항을 종료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기도가 우선이고 가르치는 것이 두 번째라고 생각하고는 했다. 지금은 기도의 자리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 있어야 하고 네 번째에 가르치는 것이 와야 한다고 느끼고 있다.” 제임스 프레이저 선교사의 고백이다. 그는 리수족이 먹는 음식을 먹고 그들의 언어를 배워 기독교 공동체를 세우며 리수어로 된 신약성경을 번역했다. 수많은 열매를 맺었지만 결코 교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다고 했다. 리수족 인구의 90% 이상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프레이저 선교사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이 뒷받침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성육신적 삶을 살았던 그는 리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 ‘팔로십(Followship)’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도 리더십에 대해 매우 높은 관심을 보인다. 세상의 관심사와 별 차이가 없다. 과연 우리가 리더십을 지향해야 할까. 기독교 입장에서 리더는 오직 한 분이라는 점에서 리더십을 논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인다. 리더십보다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라갈 것인지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팔로십’ 또는 ‘프로바이더십(Providership)’이 더욱 중요한 것이 이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구별됨을 추구해야 한다. 우선순위가 세상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은 위선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교회의 위기는 교회 밖에서 조장한 것이 아니다. 짝퉁 그리스도인,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주인인양 목소리를 높이고 그들의 오만방자한 행동을 방치한 것이 한몫했다. 교회가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을 세울 때 신앙과 실천력보다는 재물과 명예, 영향력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교회가 목회자를 청빙할 때 외국유학 박사학위를 더 선호한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연 박사학위와 목회가 정비례하는지 궁금하다. 심지어 물러나는 전임 목회자를 위한 지원금을 후임 목회자에게 은근히 요구하는 교회도 있다고 하니 장터로 변한 예루살렘 성전 앞뜰에서 분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계교회들의 초기 부흥의 원동력은 신앙의 단순성과 영적 순수성이었다. 1980년대 중국 안후이(安徽)성의 한 지역 지도자들은 모두 성경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참된 부흥이 있었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성령의 기쁨이 충만했다. 1990년대 이후 경제적 상황이 나아지고 외부에서 성경을 비롯해 신앙서적들이 공급되고 체계적으로 신학훈련이 진행되면서 믿음의 열정이 도리어 약해지기 시작했다. 신앙이 단순 지식화하면 성숙한 영성, 균형 잡힌 믿음과 신학은 삶으로 뿌리내리지 못한다. 성령이 배제된 단순 지식의 습득, 인격적 관계와 나눔이 결여된 삶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다듬어지고 성숙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건강한 복음주의는 신앙의 내면, 즉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함께 사회적 구원까지 모두 관심을 갖는다. 사회적 구원은 결코 전쟁, 갈등, 반목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더욱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거의 결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형식적으로 구하는 절차를 선호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 장 칼뱅은 자기부인을 성화의 기본적 원리로 언급했다. 자기 의지와 자기 의가 엄연히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을 빈 마음으로 순종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아는 세 가지 빛이 있다. 주변 상황, 성령의 감동과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방법은 상당한 합리성을 갖고 있으면서 위험성도 동시에 내포한다. 현실주의나 기회주의와 같은 상황주의에 빠질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상황은 우리의 결정에 중요한 고려 대상이지만 상황이 우리를 결정하도록 만들면 우리의 인격과 주체성을 부정하기 쉽다. 이슬람과 사회주의를 단순히 타도 대상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이슬람교는 대적의 대상이지만 무슬림 개개인은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는 영혼으로 구원의 대상이다. 사회주의는 이미 폐기된 망령이지만 아직도 수많은 사람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인륜적 이데올로기이다. 선교 자유는 결코 전쟁과 대립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흔이 오래도록 방해요소가 될 수 있다. 게리 프리슨은 《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저서에서 “소자나 달란트가 적은 자에게 무관심하다면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섭리에 위배된다”고 일갈했다. 예수님이라면 이 시점에 어떻게 하실까 묻고 또 묻기를 바란다. 주장과 주의보다는 참된 침묵과 올바른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성경대로 하는 실천력이 보편화할 때다. 그동안 많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자매임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어젠다를 설정하고 함께하는 데에 서툴렀다.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 신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부흥에 대한 시각도 당연히 변해야 한다. 부흥은 기원과 노력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흥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선진’을 본받아 온전한 회개운동을 펼치고 내면의 영성을 강화해야 한다. 죄에 대한 각성과 통회 자복, 공개적인 죄책 고백, 회개를 통한 전인적인 변화가 동시에 요청된다. 진정한 회개로 사회적 지도력을 되찾는 동시에 복음의 토착화, 초교파적인 교회일치운동을 견인해야 한다. 개인적 성화에서 사회적 성화로, 개인 구원에서 민족과 사회구원으로 발전하게 하는 ‘영적 백신’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다른 데서 교회가 걸어갈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같은 형제자매를 질시하고 미워한 죄를 참회할 뿐 아니라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르는 모습이 요청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세계 경영 역사에 쓰임받을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더 이상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지 말고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또 섬김의 리더십, 종의 리더십으로 무장해야 한다. 동서양을 소통하게 하는 힘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세계를 향해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십자가의 구속을 누릴 수 있음을 선언하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 정의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복음화하지 않은 세계를 위해 나의 목숨을 포기하겠다고 고백한 C. T. 스터드 선교사의 결의를 이어가야 한다.
“교회의 문제는 성경이 하라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세속적인 것을 따른다. 물질주의, 인종차별, 성적타락 등의 죄악을 세상과 똑같이 저지른다. 나는 현재의 기독교를 보호하고 싶지 않다.” 로널드 사이더 교수의 지적이다.
복음의 위력은 믿음의 고백과 행동이 병행될 때 드러난다. 세상은 기독인에 대해 혹독할 정도로 정직과 구별됨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구별되는 것이 그들조차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구별됨이 용이하다면 고도의 윤리, 도덕적인 잣대를 기독인에게 굳이 들이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나약하지 않음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만의 리그’에 익숙해서는 안 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진정 구별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됐다. 이 같은 구별됨이 지금 우리 안에 있는지 묻고 싶다. 기독교가 좀 더 성경적이었다면 이처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외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을 먼저 실천하고 복음을 위해 필요하다면 손해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게 필요하다. 성경말씀이 우리 안에 체득되지 않으면 우리의 복음은 침묵을 지키고 영향력이 감소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 가운데 처음에는 부를 분토와 같이 여기겠다고 했다가 종국에는 물질만능사상에 농락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부란 무엇인가? 성경은 분명히 나누는 데 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조금씩이라도 나누는 데 앞장선다면 적어도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렵더라도 신앙 안에서 연합과 협력을 이루고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위한 복음, 모든 사람과 지역을 위해 제자 삼는 교회, 모든 교회와 사회 부문을 위한 그리스도와 같은 지도자, 사회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향력을 나누는 비전을 갖고 세계선교에 나서자는 로잔운동이 50주년을 맞아 2024년 9월 22일부터 28일까지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글로벌선교 사역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4차 대회를 갖게 된다. 이번 대회는 한국, 일본을 비롯해 아시아지역 로잔이 협력해 공동개최할 예정이다. ‘앎’과 ‘삶’이 다를 때 누구에게나 비난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교회가 세상을 제자 삼지 않으면 세상이 오히려 교회를 제자 삼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세상을 변혁하는 누룩이 되자. 제4차 로잔대회를 ‘함께 듣고’ ‘함께 모이고’ ‘함께 행동할’ 기회로 삼아 선교하는 세계운동, 미션월드운동에 나서자. 그럴 때 ‘선교한국’은 물론 ‘선교중국’ ‘선교일본’ ‘선교태국’ ‘선교캄보디아’ ‘선교베트남’ ‘선교라오스’ ‘선교필리핀’ ‘선교인도네시아’ ‘선교말레이시아’ 등 세계 곳곳에서 미션월드운동이 앎과 삶의 일치에 애쓰는 백 투 더 바이블을 통해 실현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왕빈 | 중국전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