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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8.3  통권 240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2965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중국 의례논쟁 (3)

1715년 칙서와 혼란 
1715년 3월 15일 ‘이 날로부터(Ex illa die)’ 칙서가 중국에 도착하자 프란치스코회 대리 주교 키에사(康和之, Bernardino della Chiesa) 신부는 1716년(강희 55) 산동(山東)에서 북경(北京)으로 올라와 중국 내 각 교당에 이 칙서를 공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란 강희제는 칙지(勅旨)를 내려 키에사를 투옥하였다. 키에사는 칙령을 회수하는 조건으로 10일 후 방면되었으나 중국 내 각급 선교회는 칙서의 준수를 두고 큰 혼란이 빚어졌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은 칙서를 거부하였고, 남경(南京) 주재 24명의 예수회 선교사들과 북경 지역 중국 교우들이 연명으로 교황에게 청원서를 올려 금령 해제를 요청했다. 기타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크회의 선교사들은 대체로 중국 의례를 반대하면서도, 로마에서 온 금령을 준수하는 기조를 유지했다.

메차바르바 특사와 강희제의 금령 
1719년 9월 교황은 메차바르바(嘉樂, Carlo Ambrogio Mezzabarba)를 중국 특사로 파견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선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청조와 교섭하게 했다. 

1720년(강희 59) 12월 북경에 도착한 메차바르바 사절단은 중국 선교사와 교도들이 의례에 관한 교황의 금령을 지킬 수 있도록 황제의 허락을 요청했으나, 강희제는 중국에서 교황의 금령이 시행될 수 없으며 천주교 포교도 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메차바르바는 공자와 조상 제사에 관하여 종교적 행위가 아닌 사회적 예절이라는 범위에서 허용한다는 요지로 ‘8개항’의 타협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12월 28일 이병충(李秉忠)에게 메차바르바가 가진 교황 금령의 원본을 찾아내어 번역하게 하였고, 교황의 금령의 내용을 본 후 다시 진노하여 중국에서 천주교 선교활동의 전면 금지령을 내렸다. 

메차바르바는 교섭이 난항에 빠지게 되자 1721년 2월 귀국했다. 강희제는 마지막 접견 때 중문으로 기록한 《메차바르바의 중국활동일기(嘉樂來朝日記)》를 그에게 주었다. 이 일기에는 중국 의례에 관한 청조의 의견이 상세하게 담겨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로마 교황에 대한 답변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중국을 떠나기 전에 메차바르바는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8개항의 허락’을 공포하면서 내부적인 지침으로 삼도록 했다. 그러나 1733년 프란치스코회의 포르투갈 국적의 북경 주교가 메차바르바의 8개항의 허락을 번역하여 공포했다. 이후 교황 클레망 11세는 이 1715년 3월 19일의 의례에 관한 금령을 공식 폐지했다. 

교황청 금령의 유지와 폐지
클레망 11세는 1715년 금령의 폐지를 발표했으나 이후 로마 교황청은 중국에서 제사 의례 엄금의 기조를 오랫동안 고수했다. 1742년 교황 베네딕트 14세(Benedict XIV, 1740-1758 재위)는 메차바르바의 허락은 교황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중국의 선교사들은 중국 의례를 엄하게 금지해야 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유럽으로 귀환하여 처벌을 받게 할 것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정책은 19세기 아편전쟁 이후에야 비로소 조정하게 되었다.

1939년 12월 8일 교황 피우스 12세(Pius XII, 1939-1958)는 포교성성(布敎聖省, 傳信部)에 명하여 이전의 제공사조(祭孔祀祖)와 관련된 금령들을 거두고 천주교 교도들이 비천주교 의식에 참여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1942년 교황이 반포한 칙령을 통해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는 금령이 공식적으로 해제되었다. 금령 해제와 관련된 포고문의 요지는 중국의 조상 제사와 공자 숭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의례이므로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1704년 클레망 11세가 반포한 이래 250여 년간 교황청이 고수한 중국 의례 금령이 마침내 해제되었고, 중국 의례 문제는 결국 마테오 리치 등 예수회 선교사들이 취했던 본래의 관점으로 복귀되었다. 

의례논쟁의 영향 
중국의 의례논쟁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첫째, 천주교의 중국선교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교황청의 금령은 중국 지식인들의 천주교 입교를 어렵게 하고, 천주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것을 저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나아가 논쟁이 로마를 오가며 길게 이어지는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단 사이의 분열과 대립을 가져왔다. 이 논쟁은 시작되자마자 선교단 간의 세력 다툼과 세속적 투쟁으로 이어졌고, 사랑을 전해야 하는 선교의 본령에서 벗어남으로써 영혼 구원 사업의 위기를 초래했다. 마침내 이 논쟁은 로마 교황청과 중국 청조의 충돌로 이어져서 결국 중국에서 천주교 포교가 금지되는 조치로 이어졌다.

둘째, 유럽에 중국 문화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의례에 대한 금령에 대하여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반론을 펼치면서 관련 저술들에 근거하여 18세기 유럽에 중국 문화 열풍이 일었다.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 콩트(李明, Louis Le Comte)의 《중국현황록(Nouveaux Memoires sur L'Etat Present de la Chine》(1696, 파리)와 《중국 의례(Des ceremonies de la Chine)》(1701) 등은 유럽에 중국 유교 문화에 대한 연구를 고조시키는 매체가 되었다. 프랑스인 할데(杜赫德, Le du Halde)가 중국 예수회 선교사들의 보고서들을 근거로 중국의 역사, 지리, 경제, 정치를 망라한 총 4권의 《중화제국총서(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la Tartarie chinoise)》(Paris: P.G. Lemercier, 1735)는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 배포되어 이후 중국 자료집이 되었다. 그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이 1702년(강희 41)부터 1776년(건륭 41)까지 총 74년간 유럽으로 보낸 중국 보고서를 묶어 편찬한 《예수회사서간집(耶穌會士書簡集)》도 당시 유럽 학계가 중국의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는 기본 자료가 되었다.

세 번째, 중국에서도 중국 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천주교 내부에서 중국 의례 관련 논쟁이 전개되는 동안, 의례논쟁의 핵심이었던 유교 문화가 종교 문제인가 아니면 윤리 문제인가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담론이 시작될 수 있게 했다는 평가도 있다. 







사진설명 | 교황 클레망(Clemens) 11세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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