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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6.2  통권 238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3703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중국 의례 논쟁 (1)
의례 논쟁의 주요 쟁점
17세기 중국 천주교회는 중국 문화의 종교성에 대한 인식의 분기와 더불어 격렬한 논쟁 국면을 맞았다. 이를 ‘의례(儀禮) 논쟁’ 또는 ‘전례(典禮) 분쟁’ 등으로 일컫는다.

쟁점은 크게 두 부문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중국에서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에 종교성이 있는지, 이것이 우상숭배에 해당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마테오 리치로 대표되는 견해는 조상과 공자에 대한 숭배와 제사는 종교성이 없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준하므로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롱고바르디(Longobardi)로 대표되는 다른 견해는 이러한 숭배와 제사가 종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우상숭배에 해당하므로 마땅히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창조주 여호와에 대한 중국식 호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은 ‘상제(上帝)’, ‘천(天)’ 그리고 ‘천주(天主)’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호칭을 통일해야 하는지, 각 호칭이 천주교의 교리에 부합하는지에 관한 문제로 논쟁이 이어졌다. 이 세 가지 호칭이 자연의 하늘을 의미하는지, 어떤 높은 신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후자의 견해를 가진 선교사들은 이러한 용어를 금하고 라틴어식 발음 그대로 ‘데우스(Deus)’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예수회 내부 논쟁의 시작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유교 문화를 존중하고 천주교와 중국 유교를 융화하고, 유교 문화를 이끄는 사대부들과 교제를 통하여 선교 지평을 확장하고자 하였다.

처음에는 창조주를 전하기 위해 라틴어 데우스의 중국어 음역인 ‘두사(斗斯)’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중국의 역사서와 유가 경전을 익히는 중에 루지에리는 《사기》의 〈봉선서(封禪書)〉에 나오는 천주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후에 마테오 리치는 《시경》의 〈대아(大雅)〉와 〈대명(大明)〉편의 상제라는 용어와 성리학에서 강조한 천이라는 표현도 적절한 번역어라고 인식하면서 선교사들은 상제, 천, 천주 등을 함께 사용하였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서 상제를 섬기는 의식을 이용하여 천주교의 창조주를 섬기는 것을 설명하였고, 조상과 공자에 대한 제사와 관련해서도 조상에 대한 공경과 최고 스승 공자에 대한 추앙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므로 전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보았다. 

한편 롱고바르디는 마테오 리치의 적응성 선교전략의 중국 유교 문화의 용인 자세와 달리, 천과 상제라는 용어의 사용을 반대하고, 입교자들에게 조상 제사를 금하고 위패를 파기하도록 지도하였다. 롱고바르디는 광동(廣東)성 소주(韶州) 등지에서 공개적으로 평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300여 명을 개종시키고 교회당까지 건립했지만, 입교자들에게 위패를 파괴하고 조상 제사를 지내지 말 것을 요구하다가 현지 민중과 신사들에게서 쫓겨난 바 있었다. 

마테오 리치가 세상을 떠난 후 예수회 중국 선교구를 이끌게 된 롱고바르디는 1610년부터 1621년까지 우르시스(熊三拔, Sabbathin de Ursis) 등의 선교사들과 힘을 모아 예수회 시찰원에게 천, 상제 등 창조주를 지칭하는 중국식 표현을 금하고 라틴어 음역 호칭만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거듭 올렸다. 그들의 건의는 마카오를 경유하여 로마로 전해지고 토론이 이어졌으나, 1621년에 열린 마카오 회의에서는 마테오 리치파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롱고바르디는 이 회의 결과에 불복하여 1628년 가정(嘉定)에서 예수회 소속 중국 선교사 회의를 개최하여 창조주 호칭과 의례 문제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예수회 부회장 디아즈(陽瑪諾, Emmanuel Diaz, 1574-1659)가 진행한 이 회의는 바뇨니(高一志, Alfonso Vagnoni), 롱고바르디, 트리고(金尼閣, Nicolas Trigault), 삼비아시(華方濟, F. Sambiasi), 카타네오(郭居靜, Lazare Cattaneo), 로드리게스(魯德昭, João Rodrigues), 페레이라(費奇觀, G. Pereira), 알레니(艾儒略, J. Aleni), 리베이로(黎伯勞, Pedro Ribeiro) 등과 중국인 천주교도 서광계, 이지조, 양정균, 손원화 등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토론 끝에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우상숭배가 아닌 십계명의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에 해당하는 일로 해석하였고, 번역 용어에 관해서는 상제, 천 그리고 한자 음역 투스 모두 사용하지 않고 천주만을 사용할 것을 결정하였다. 

1633년 다시 열린 예수회 선교사 회의에서는 천과 상제라는 호칭을 다시 사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도미니크회와 프란치스코회의 논쟁 재개 
1630년대 들어 프란치스코회 안토니오 카발레로(利安當, Antonio de Santa Maria Caballero, 1602-1669)와 도미니크회 후안 모랄레스(黎玉范, Juan Bautista de Morales, 1597-1664) 등이 중국에 들어와 선교를 시작하면서 서로 관점의 차이로 의례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크회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선교 기반을 확립한 예수회에 대한 부러움과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 아울러 자신들은 지금까지 어디든지 가서 일반인들을 향해 선교하는 노선과는 달리 상류 지식인층을 우선 선교 대상으로 하는 예수회의 노선이 옳지 않다고 보았다.

카발레로와 모랄레스는 복건(福建)성에서 선교를 시작하면서, 그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인 교우들이 사당(祠堂)과 공묘(孔廟)에 들어가 절하는 것을 허락한 것을 보고 놀라 남창(南昌), 남경(南京), 북경(北京), 마닐라 등지에 가서 거듭 예수회 선교사들과 토론을 벌였다. 

모랄레스는 1643년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에게 예수회의 중국선교 행태의 문제점을 17개 조항으로 지적하여 보고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호칭,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와 위패의 용인, 죽은 사람을 섬기는 것, 부녀자에 대한 영세와 종부(終傅) 성사, 성황신에 절하는 것, 사당 수리를 위한 헌금, 황제에 대한 고두(叩頭), ‘경천(敬天)’ 편액을 거는 행위, 고리대 허용 등의 문제점을 거론하였다. 

이에 대한 논의를 거친 후 교황은 1645년 9월 12일 일단 창조주에 대한 상제 호칭 사용을 금하고, 조상 제사와 공자 제사를 금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당시 중국은 명청(明淸) 왕조 교체의 혼란한 국면이었기에 바로 집행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대한 소식을 들은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1651년 마르티누스 데 마르티니(衛匡國, Martinus de Martinis, 1614-1661)를 로마로 보내어 유교적 의례가 우상숭배나 미신이 아님을 주장했다. 조상이나 공자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지는 각급 사당에는 신상이나 사제가 없으며 학자들이 모여 강학(講學)하는 공간임을 강조했다.

마르티니의 보고에 따라 교황 알렉산더 7세는 1656년 3월 23일, 중국의 의례는 우상숭배가 아닌 순수 문화 활동에 해당하며, 중국인 신도들은 천주교에 대한 신앙 고백만 유지하면 각급 제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교시를 내렸다.

1664년 양광선(楊光先)이 일으킨 소위 역법투옥(曆法投獄)사건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고 난 뒤 1667년 12월 18일부터 40일간 광주(廣州)에서 진행한 3개 선교단 전체회의에서는 1656년 교황의 명령을 준수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1669년 도미니크회 수도사 폴랑코(鮑良高, Juan de Polanco O. P.)는 로마로 직접 가서 교황에게 1645년과 1656년의 명령 중 어느 것이 효력을 갖는지를 질의했다. 이에 교황 클레망 9세(Clement Ⅸ, 1667-1669 재위)는 1669년 11월 13일에 두 명령은 모두 유효하며 현지의 정황에 따라 실행할 것을 천명했다. 

한편 광주회의에 참여하여 결정에 동의했던 도미니크선교회 회장 나바레테(閔明我, Domingo Fernandez Navarrete, 1619-1689)가 1669년 중국을 떠나 유럽에 가서 중국 의례는 이단이며,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의례를 용인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공격하는 논지의 책을 내면서 중국에서 의례 논쟁은 재점화되었다. 







사진설명 | 예수회 선교사 마르티니(衛匡國, 1614-1661)의 초상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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