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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4  통권 236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3443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청(淸) 강희제와 천주교회 (1)
페르비스트와 강희제(康熙帝)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南懷仁, Ferdinand Verbiest, 1623-1688)의 자는 돈백(敦伯)이고 벨기에 출신 예수회 선교사이다. 가톨릭 로베인대학(Catholic University of Louvain)에서 공부하였고 천문, 수학, 기계, 지리, 물리, 음악 등 여러 분야의 지식을 두루 갖추었다. 18세에 예수회에 가입한 그는 1659년 중국 섬서(陝西)성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660년 아담 샬의 추천을 받아 북경(北京)으로 옮겨 역법 수정 작업을 도왔다. 양광선(楊光先)이 주도한 역법투옥사건으로 체포된 페르비스트는 중병으로 구술이 어려웠던 아담 샬을 위한 변론을 도맡았다. 

출옥한 뒤에도 그는 선교사들과 천주교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1668년 양광선이 진상한 《칠정민력(七政民曆)》에서 강희 8년 윤달 12월이 실제로는 강희 9년 정월이었다는 오류를 입증하여 강희제의 신임을 얻어 역법투옥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669년 페르비스트는 흠천감(欽天監)의 직을 맡아서 서양 역법을 근거로 오류가 있었던 중국 역법을 바로잡았고, 재능 있는 많은 선교사를 잇달아 추천하여 흠천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였다. 헤르트리흐트 크리스티안(恩理格, Herdtricht, P. Christian, 1624-1684), 도밍고 나바렛(閔明我, Domingo Fernández de Navarrete, 1610-1689), 토마스 페레이라(徐日升, Thomas Pereira, 1645-1708), 안토이네 토마스(安多, Antoine Thomas, 1644-1709)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헌신을 인정한 청 왕조는 흠천감의 책임자 감정(監正) 2명을 주로 만주인 1명과 서방인 1명으로 임명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 관례는 도광제(道光帝)까지 이어졌다. 흠천감 감정에 오른 선교사는 수십 명이었는데, 이 중 이그나티우스 클러(戴進賢, Ignatius Kgler, 1680-1749), 안토니우스 고가이요(鮑友管, Antonius Gogeisl, 1701-1771), 아구스티누스 할러스테인(劉松齡, Augustinus von Hallerstein, 1703-1774), 쟝 퐁텐느(洪若翰, Jean de Fontaney, 1643-1710), 안토이네 가우빌(宋君榮, Antoine Gaubil, 1689-1759) 등이 이름이 높았다.

1669년부터 1674년까지 페르비스트는 천문 관측 기기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기존의 간의(簡儀)와 혼의(渾儀), 성구(星球) 등을 개수한 이외에 새로 천구의(天球儀), 황도경위의(黃道經緯儀), 기한의(紀限儀), 상한의(象限儀), 지평경의(地平經儀)와 지평위의(地平緯儀) 등 모두 53건의 천문 의기를 만들었다. 페르비스트는 이러한 천문 관측 기기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제작법, 사용법과 관측 수치 등을 덧붙여 《의상지(儀像志)》 14권을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의상도(儀象圖)》 2권과 함께 《신제영대의상지(新制靈臺台儀象志)》라는 제목으로 합본하여 각급 관리들에게 배포하여 강희제의 치하를 받았다.

강희제는 1670년 말 친히 ‘봉지귀당(奉旨歸堂)’ 네 글자를 써서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에 대한 윤허를 내렸고, 이후 중국 천주교 사역은 점차 회복세를 보였다. 1676년 페르비스트는 예수회 중국선교구 교구장에 임명되어 중국 천주교회를 이끌었다. 

1688년 정월, 페르비스트는 예기치 않은 낙마(落馬)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강희제는 그에게 ‘근민(勤敏)’이라는 시호와 은 750량을 하사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고, 묘비도 내려 그의 오랫동안의 봉직을 높이 평가했다.

네르친스크조약과 선교사들
페르비스트가 세상을 떠난 후 선교사들은 청 조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청 조정을 도왔다.

1689년 러시아의 동진(東進)정책으로 청과 국경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되자 양국의 협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제르비용(張誠, J. F. Gerbillon, 1654-1707)과 포르투갈 신부 페레이라(徐日升, Tomás Pereira)는 청나라 대표단의 라틴어 통역과 번역 업무를 맡았다. 러시아 측은 야크사(Yaksa)지역에서 러시아 우위를 조약 문구에 넣어 줄 것을 은밀히 요청했지만 선교사는 이를 거절하면서 청조의 이익을 지키는 데 일조했다. 16일간 협상 끝에 1689년 9월 7일 양국이 체결한 ‘청‧러 네르친스크조약’은 선교사들의 적절한 중재에 힘입어 평등조약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희제도 이 조약 협정 체결이 매우 원만하였음을 인정하였고, 그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노력과 헌신을 칭송하였다.

‘청‧러 네르친스크조약’ 체결 후 페레이라와 제르비용뿐만 아니라 요아킴 부베(白進, 白晋, Joachim Bouvet, 1656-1730), 안토니에 등은 거의 매일 황궁으로 초대받아 황제에게 측량과 산술, 천문 등 서방 학문을 소개하였다. 강희제의 선교사들에 대한 우대는 이후 수년 동안 이어졌으며 지방 순시 때에도 제르비용 등이 수행했다고 전해진다.

북경 북당과 강희제
1693년 학질에 걸린 강희제는 선교사 제르비용이 올린 키니네(quinine)로 곧 치유되었다. 황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땅을 하사하여 천주당을 건립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곧 북경의 북당이다. 강희제는 이곳에 두 차례나 직접 순행하였고, ‘만유진원(万有眞元)’ 편액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먼저 만물을 지으신 참 주재자시여, 인의를 베풀고, 큰 규범을 널리 보여주시는도다(無始無終, 先作形聲眞主宰; 宣仁宣義, 聿昭拯濟大權衡)’라는 대련(對聯)을 하사하였다. 또한 ‘경천(敬天)’이라는 두 글자 친필도 하사하여 교당에 게시하도록 했다.

선교사들은 강희제에게 서방 과학기술을 전하는 기회를 통해 천주교로 귀의시키려는 염원도 갖고 있었다. 실제 강희제는 기독교 신앙을 소재로 한 시도 여러 편 지어 남겼다. 강희제가 지은 아래의 7언 율시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노래하였다.

森森萬象眼輪中, 須識由來造化工. 
體一無終而無始, 位三非寂亦非空.  
天門久爲初人閉, 福路全憑聖子通.  
除却異端無忌憚, 眞儒若個不欽崇.  
삼라만상이 운행 중에 있으니, 모름지기 조물주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노라. 
몸은 하나이니 끝도 시작도 없고, 삼위는 적막하거나 헛된 것이 아니라네. 
하늘 문이 오래전 처음 사람으로 인해 닫혔더니, 복된 길이 성자에 힘입어 열렸네. 
이단을 제거함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니 참 유자라면 누가 받들지 않으리오. 

또 다른 7언 율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묘사했다.

功成十架血成溪, 百丈恩流分自西. 
身列四衙半夜路, 徒方三背兩番鷄. 
五千鞭撻寸膚裂, 六尺懸垂二盜齊. 
慘慟八埃驚九品, 七言一畢万靈啼. 
그 공로는 십자가 보혈 흘리심으로 이루었고, 긴 은혜의 강물 서역에서 흘러드네.
붙잡힌 몸은 이리저리 밤새 끌려다녔고, 제자가 세 번 배신하자 곧 닭이 울었다네. 
수없이 많은 채찍에 온몸의 살이 떨어지고, 두 강도와 나란히 높이 매달리셨네. 
주위를 슬프게 하고 온 세상을 놀라게 하고, 일곱 마디 말을 마치자 온 영혼이 곡하네.


그러나 강희제는 기본적으로 선교사들이 전하는 서방 과학지식에 대한 관심이 신앙보다 더 컸고, 천주교에 대한 이해도 중국 전통 유가사상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사진설명 |페르비스트의 초상화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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