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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明淸) 교체기 역법(曆法)과 대포
명청 교체의 혼란한 와중에 중국 역법과 대포 제작 등에 기여한 서양선교사로는 아담 샬(Johann Adam Shall von Bell, 湯若望, 1591-1666)과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南懷仁, 1623-1688) 등이 대표적이다.
아담 샬은 독일 출신으로 1620년 마카오에 도착했다. 이후에 광주(廣州), 북경(北京), 서안(西安), 남경(南京) 등지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630년 서광계(徐光啟)의 천거로 《숭정역서(崇禎曆書)》 편찬에 참여하였다. 아담 샬은 1636년 숭정제(崇禎帝)의 명에 따라 대포 20문을 만들었고, 1643년에는 서양 무기와 탄약의 제조법, 발사법 등을 그림을 곁들여 설명한 《화공설요(火攻挈要)》를 찬술(撰述)하였다.
아담 샬은 역국(曆局)에서 함께한 요아네스 테렌즈(P. Joannes Terrenz, 鄧玉函, 1576-1630), 지아코모 로(Giacomo Rho, 羅雅谷, 1593-1638) 등 선교사들과 더불어 번역과 저술활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스위스 출신인 테렌즈는 로마 교황청 과학원 원사로서 중국에 오기 전부터 해박한 의학, 철학, 수학 지식으로 명성이 높았다. 테렌즈는 중국인이 역법을 매우 중시한다는 사실을 알고 역국에 들어간 뒤 반년 만에 《측천약설(測天約說)》 2권, 《대측(大測)》 2권, 《역서총목록(曆書總目綠)》을 편찬했고, 중단된 환산표 10권을 썼으며, 칠정상한대의(七政象限大儀) 2기를 제조·지도했다. 역국의 성과는 높아졌으나 테렌즈는 역국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과로로 병을 얻어 5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지아코모 로도 역국에서 근무하다 1638년 46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서광계는 아담 샬을 비롯한 서양선교사들의 서적 편찬, 의기 제조, 일월식 측정, 흠천감(欽天監)과 역국의 관원들에 대한 교육 등의 업적과 공로를 칭송하였다.
도르곤과 아담 샬
1644년 6월 7일 이자성(李自成)의 북경 진입으로 명조가 막을 내렸고, 청조의 어린 황제 순치제(順治帝)를 섭정하던 도르곤(愛新覺羅 多爾袞)이 청군을 이끌고 북경으로 들어와 이자성 군을 몰아내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북경을 수중에 넣은 도르곤은 3일 안에 모든 한족은 성 밖으로 나갈 것을 명하였다. 마침 예수회 선교사 롱고바르디와 아담 샬이 머물던 교당이 선무문(宣武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성 밖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그러자 아담 샬은 지금까지 많은 역법서를 저술하고 판각하고 있으며, 천문 측정을 위한 각종 기기를 갖추고 있는데, 성 밖으로 옮기다가 판목과 서양식 기기들이 파손될 우려가 있어 성내에 거주할 수 있도록 선처를 바란다는 요지로 상소문을 올렸다.
도르곤은 서양선교사들이 역법을 수정하고 대포를 제조하여 명성을 얻고 있던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들을 청조에 기용하여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담 샬 등 서양선교사들이 천주교당에 머물 수 있도록 하고 이들에 대한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지시하였다. 아담 샬도 청조에 복속된 한인들과 마찬가지로 만주식 복장으로 바꿔 입고 변발을 했다.
섭정왕(攝政王) 도르곤은 아담 샬에게 기존 중국 역법을 고쳐 찬수(撰修)하는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다. 아담 샬은 8월 초 일일에 있을 일식과 관련하여 서양 신역법에 따라 북경에서 예측되는 일식 시간과 각 성에서 관측될 서로 다른 일식 시간에 대하여 구분하여 자세히 기록해 올렸고, 각 성에서 전반적인 측정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제작한 혼천성구(渾天星球), 지평일구(地平日晷), 규원경(窺遠鏡), 여지병도(輿地屛圖) 등 자료와 기기들을 진상하였다.
도르곤은 이듬해 순치 2년부터 새로운 역법을 시행할 것을 선포하고 새 역법을 시헌력(時憲曆)이라 이름하였다. 도르곤은 흠천감에 8월 일식을 계산하도록 명을 내렸고, 검토 결과 아담 샬의 예측과 부합하지 않음을 확인하였고, 바로 아담 샬을 흠천감을 책임지는 감정(監正)에 임명하였다. 아담 샬은 자신이 기독교 선교를 위해 중국에 왔으므로 관직을 맡을 수는 없다며 일곱 차례나 고사하였으나, 예수회 중국화북지역 회장인 프란시스코 푸르타도(傅泛際, Francisco Furtado)의 하명이 있은 뒤, 11월에 비로소 이 직책을 공식적으로 맡았다. 아담 샬은 이듬해 《숭정역서》를 개정하였고, 《학력소변(學曆小辯)》과 자신이 쓴 《원경도설(遠鏡圖說)》, 《역법서전(曆法西傳)》, 《신법표이(新法表異)》 등을 합하여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 103권을 편찬하여 진상하였다.
순치제와 아담 샬
어린 나이에 즉위했던 순치제는 1651년 친정에 나섰다. 순치제 역시 아담 샬을 더욱 총애하여 정5품이었던 품계를 거듭 올려 정1품까지 제수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순치제는 1650년 아담 샬이 마테오 리치가 교당을 건립하기로 했던 자리에 유럽식 교당을 세울 수 있도록 했는데, 이곳이 바로 북경 남당이다. 순치제는 교당이 완공된 후 1652년에 ‘흠숭천도(欽崇天道)’라는 편액도 하사하였고, 1년 뒤에는 아담 샬의 역법 수정의 공로를 포상하는 차원에서 ‘통현교사(通玄敎師)’1)라는 칭호를 내렸으며, 1654년에는 부성문(阜成門) 밖 등공책란(騰公柵欄)에 있던 마테오 리치 묘지 옆 땅을 묘지로 하사하였다. 1657년 순치제는 남당에 ‘통현가경(通玄佳境)’ 편액을 다시 하사하고 〈어제천주당비기(御制天主堂碑記)〉를 써서 아담 샬의 역법 수정 공로를 격찬했다.
아담 샬에 대한 순치제의 이와 같은 예우에 따라 청조 천주교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순치제의 비문이 공식적인 기독교 옹호 칙령은 아니었지만 선교사가 내지까지 들어가 공개적으로 선교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2) 아담 샬은 순치제에게 하사받은 묘지에 1660년 성모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기념예식이나 결혼예식 등의 미사도 가졌다.
순치제는 아담 샬을 매우 존중하여 ‘마파(瑪法)’3)라고 불렀고, 그에게는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예가 면제되었다. 순치제는 자주 그를 방문하여 천문(天文)과 정사(政事)를 논하였는데, 아담 샬의 회고에 따르면 1656년과 1657년 두 해 동안 황제는 24차례나 자신의 관사를 찾았다.4)
명조뿐만 아니라 새로 중원을 장악한 청조 통치자들도 과학 지식으로 자신을 섬기는 선교사가 필요하였고, 아담 샬을 비롯한 선교사들은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 사회에서 천주교의 위상을 높여 나갔다.
미주
1) 나중에 강희제의 이름 현엽(玄燁)과 중복을 피하기 위해 ‘통미교사(通微敎師)’로 바꾸었다.
2) K.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106쪽.
3) 만주어로 ‘스승’이란 뜻.
4) 魏特 著, 楊丙辰 譯, 《湯若望傳》 第一冊, 220쪽 (晏可佳, 《中國天主敎簡史》, 121쪽에서 재인용).
사진설명 | 도르곤(多爾袞)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