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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4  통권 233호  필자 : 김종건  |  조회 : 3542   프린트   이메일 
[중국기독교회사]
명청 교체기의 중국 천주교회
명말 중국 천주교회
1616년 남경교안(南京敎案)을 일으켜 천주교회를 수난당하게 한 주인공인 심각(沈㴶)은 1621년 예부상서(禮部尙書)와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 자리에 오르자 다시 천주교회는 사교(邪敎) 집단인 백련교(白蓮敎)와 별반 차이가 없다면서 선교사 공격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심각이 곧바로 실각(失脚)당하면서 천주교회는 가까스로 평온을 되찾았다. 

선교를 재개한 예수회는 1624년에 6개 성(省)에 선교본부를 두었고, 북경(北京)에도 선교사 3명과 수사 1명이 상주하면서 선교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1600년 북경에서 사역하다가 남경교안을 피해 마카오에 도착한 판토하(龐迪我, Didace de Pantoja, 1571-1618)는 그 이듬해인 1618년 병으로 사망하고, 우르시스(熊三拔, Sabbathinus de Ursis, 1575-1620)도 1606년 북경에서 사역하다가 남경교안 이후 마카오로 피하였다가 1620년 생을 마감했다. 

한편 1620년과 1629년 사이에 선교사 19명이 새로 선교 대오에 합류하였다. 바뇨니(王豊肅, Alfonso Vagnoni, 1566-1640)는 마카오에서 중국 어문(語文)을 열심히 연마한 뒤 1624년 고일지(高一志)로 개명한 후 산서(山西)성 선화(宣化), 강주(絳州) 지역으로 들어가 선교활동을 했고, 《서학치평(西學治平)》 등 15종의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 저술하였다. 

세메도(謝務祿, Álvaro Semedo, 1585 혹은 1586-1658)는 남경교안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 난 뒤 증덕소(曾德昭)로 개명하고 1620년 강절(江浙) 지역, 1621년 서안(西安)에서 선교했으며, 1644년 이후 예수회 중국선교구 교구장을 오래 역임하다가 1658년 광주(廣州)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레니(艾儒略, Giulio Aleni, 1582-1649)는 양정균에게서 중국 어문을 배웠고, 1625년 복주(福州) 지역 선교를 시작하여 10여 년 만에 복안(福安), 건녕(建寧), 연평(延平), 소무(邵武), 정주(汀州), 흥화(興化), 천주(泉州)와 장주(漳州)에 천주교 교당을 잇달아 세우는 데 앞장섰고 신도도 900여 명에 이르는 실적을 올렸다. 1641년 예수회 선교구가 남과 북으로 분할된 뒤 알레니는 남방 회장으로 복건에 머물면서 남경, 강서(江西), 호광(湖廣), 절강(浙江), 사천(四川) 등지의 교무를 관리했다. 그는 특히 현지 문인들과 친분이 두터웠고 중국식 예절을 아주 중시하여 ‘서방에서 온 공자(西來孔子)’라는 이름을 얻었다.

프란시스코 푸타도傅泛际, Francisco Furtado, 1587-1653)는 1634년 예수회 중국선교구 회장으로 부임해 왔고, 1641년 예수회 선교구의 북방 지역인 북경과 산서, 산동(山東), 섬서(陝西), 하북(河北), 사천 등의 교무를 맡았다. 

중국 천주교회의 신도 규모는 1627년 1만 3,000명 정도로 강서, 절강, 강남, 산동, 섬서, 산서와 직예성 지역에 두루 분포하였고, 10년 뒤에는 4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중국 신도 규모가 1617년 1만 3천여 명, 1650년 15만 명, 1664년에 이르러 25만 4,980명으로 늘어났다고 하는 다른 통계도 있다. 1661년 중국 15개 성 가운데 운남(雲南)과 귀주(貴州)를 제외한 전 성에서 천주교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1)

남명(南明) 정권과 예수회 선교사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난군(亂軍)이 북경으로 진입하고, 명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자결하면서 명 왕조는 붕괴되었다. 이때 오삼계(吳三桂) 등 명조의 군 지휘관들이 만주 청군(淸軍)에 투항하고, 이들과 함께 청나라 군대가 북경으로 들어와 이자성 난군을 평정하면서 중국 마지막 왕조인 청조가 중국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청조 정권에 저항하면서 명조의 회생을 지향하는 세력들 즉 남명 정권이 약 2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들은 청조에 맞서며 명 왕조를 복위시키기 위해 천주교 세력에 의지하였고, 예수회 선교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644년 6월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이 명나라 유신 회안(淮安) 등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고 연호를 홍광(弘光)이라 하였다. 홍광제는 1645년 선교사 프란시스 삼비아시(畢方濟, Franciscus Sambiasi, 1582-1649)를 마카오로 파견하여 포르투갈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탈리아 출신 삼비아시 신부는 1613년 북경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남경교안이 터진 뒤 항주(杭州)로 피난했다가 손원화(孫元化)의 초빙으로 가정(嘉定)에서 선교구를 개설했다. 그는 1622년 상해 교무를 주관했고 후에 하남, 산동 등지에서 선교했으며 1634년 남경 교무를 맡았다. 그해 하남에 머물러 있을 당시 그를 알게 된 홍광제는 그를 통해 포르투갈의 지원을 요청하려 했다. 삼비아시는 1645년 3월 마카오로 출발했으나 도중에 홍광제가 청군에 의해 포로로 잡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마카오에 머물게 되었다. 

이어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이 복건에서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융무(隆武)라 하였다. 삼비아시 신부와 20여 년 왕래가 있었던 당왕도 그를 환관 방천수(龐天壽)와 함께 마카오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포르투갈의 지원을 유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1646년 청나라 군대가 복건 지역까지 남하하여 점령하고, 당왕을 체포 처형하면서 복건 정권도 무너졌다.

복건의 당왕 정권이 붕괴된 뒤, 만력 황제의 손자인 26세의 계왕(桂王) 주유랑(朱由榔)이 광서(廣西)성 조경(肇慶)에서 제위에 올라 영명왕(永明王)이 되었고 연호를 영력(永曆)이라 했다. 영력제도 천주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중 유명한 인물이 구식사(瞿式耜)와 방천수였다. 마테오 리치와 친밀했던 구태소의 조카였던 구식사는 알레니 신부에게 세례(세례명 토마스, 多默, Thomas)를 받았으며, 대문에 ‘승도무연(僧道無緣: 승려나 도사의 출입을 일체 단절함)’의 넉 자를 써 붙여 다른 신앙을 가까이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인물이었다. 방천수는 1632년 북경에서 롱고바르디에게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아킬레우스(Achileus)라고 했으며, 1640년 천계(天啓)제의 황후를 비롯한 178명의 황실 사람들과 140명의 환관들이 세례 교인이 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영력제와 황후에게 선교사와 교제의 필요성을 수차 진언했고 궁중에 작은 교당을 세우기도 했다. 

1647년 구식사는 삼비아시에게 마카오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했고, 포르투갈은 대포 여러 대와 함께 병력 300명을 파병하기로 하고, 독일 출신 쾨플러(瞿紗微, Andreas Xavier Köffler)를 종군신부로 임명하였다. 막강한 포르투갈 포대의 지원에 힘입어 영력제는 계림전 등 승리를 거두면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기도 했다.

종군신부 쾨플러는 1648년 영력제의 황후에게 세례(세례명 안나, Anna)를 베풀었고, 황태후와 영력제의 생모 마태후에게도 세례(세례명은 각각 헬레나(Helena), 마리아)를 베풀었으며, 영력제의 아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황제 자신은 비빈을 많이 둔 탓에 세례를 받을 수 없었지만, 황제가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려 영력제 조정의 황실과 중신들이 대거 천주교 신도가 되었다. 남명 황실은 유럽이 나서서 쇠퇴해 가는 남명 정권을 도와줄 것을 간절히 염원하고 있었다.2)

1648년 영력제는 방천수를 마카오로 파견하였고, 포르투갈은 총포 100정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남명 조정을 압박하고 있던 청나라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남명 조정에 머물러 있던 선교사 쾨플러와 미첼 보임(Michel Boym) 등은 즉각 로마 교황에게 직접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1646년 해남도(海南島)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폴란드 출신 신부 미첼 보임은 1650년 이후 남명 조정의 쾨플러 신부를 돕고 있었다. 미첼 보임은 명 영력 황태후와 방천수가 각각 교황과 예수회총회장 앞으로 보내는 서신과 예물을 갖고, 19세의 중국인 신도 안덕(安德)과 함께 1650년 출발하여 1652년 말 로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소지한 서신이 모두 가짜라는 의혹을 받고 조사를 받느라 3년여의 시간이 허비되었다. 1654년에 이미 북경 예수회에서 파견한 마르티노 마르티니(衛匡國, Martino Martini) 신부가 로마에 도착하여 새 왕조가 중원에 들어섰고 남명 정권이 기울었다는 소식을 전한 뒤인 1655년 12월 18일 미첼 보임은 교황 알렉산더의 회신을 갖고 중국으로 복귀 길에 올랐다. 그는 복귀 도중 베트남 국경 부근에서 남명 정권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고, 게다가 이질에 걸려 쓰러져 1659년 8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남명 조정의 황태후가 1651년 이미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쾨플러 신부도 피난 도중에 청나라 병사에 의해 숨졌기에, 미첼 보임이 갖고 있던 교황 알렉산더와 예수회총회장이 각각 헬레나 황후와 방천수에게 보낸 4통의 서신은 결국 의미 없게 되었다. 이 서신들은 남명 조정이 로마에 보낸 서신과 더불어 지금까지 로마 바티칸 문서보관소에 보존되어 있다.

장헌충 정권과 예수회 선교사
1644년 청나라 군대가 중국 중원을 차지한 뒤 서남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장헌충(張獻忠)이 이끌던 농민반란군은 성도(成都)에서 ‘대순(大順)’이라는 연호를 내세우며 정권을 표방하였다. 

루도비쿠스 부글리오(利類思, Ludovicus Buglio, 1606-1682)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서 1637년 중국에 들어와 강남에서 선교하다가 북경에서의 역법 수정하는 일을 돕고, 1640년 이후 사천 출신 동각대학사 류우량(劉宇亮)의 소개로 성도에서 교구를 개척했다. 강남에서 사역하던 포르투갈 국적 선교사 가브리엘 마갈랜스(安文思, Gabriel Magallaens, 1609-1677)는 1642년에 사천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 1644년 성도에서 즉위한 장헌충은 류우량의 집에 피신해 있던 이 두 선교사를 예부상서 오계선(吳繼善)의 추천을 받아 성도로 초청하여 고문으로 삼고, ‘천학국사(天學國師)’라는 칭호를 내렸다. 

장헌충은 두 신부가 만든 천체 모형들을 궁 안에 두고 진귀한 보물로 대했으며, 신부와 관계자들에게 후한 상을 하사하였다. 1645년 장헌충이 성도를 떠나 섬서 지역 공격을 시작할 때 두 신부는 종군 대신 마카오행을 요청했다가 미움을 사서 감금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647년 초, 장헌충이 한중부(漢中府)에서 청나라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두 신부는 청나라 장군 숙왕(肅王)의 포로가 되었으나, 아담 샬의 보호 부탁에 따라 이듬해 북경으로 복귀하였다.


미주          
1) 徐宗澤, 《中國天主敎傳敎史》 (上海書店, 1990), 323쪽.
2) K. S. Latourette,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in China, 107쪽.









사진설명 | 구식사(瞿式耜)의 초상
사진출처 | 바이두
김종건 | 대구한의대학교 기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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