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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20  통권 80호  필자 : 강인규  |  조회 : 3182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역사]
근대 중국 교회의 건설

지난호에서 우리는 중국의 문호개방과 기독교 전래관계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근대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는 과정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서방 열강의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피동적이고 모욕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졌으며, 서방 선교사들은 이러한 기회를 편승하여 중국 전역에서 선교의 자유는 물론 선교사들의 생명과 재산을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아편전쟁 이후 기독교의 활동 범위는 광저우(廣州), 닝보(寧波), 푸저우(福州), 샤먼(厦門)과 상하이(上海) 등 5개의 항구 도시와 홍콩을 중심으로 하여, 1860년 중국과 열강 사이에 체결한 베이징조약에 의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중국 근대사의 큰 전환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국 기독교의 발전에도 획기적인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기독교사의 대가 차스제(査時傑) 교수는 이 시기를 ‘중국 교회의 건설 시기’ 라고 구분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서방 선교사들이 새롭게 변화된 환경과 공간 속에서 중국 기독교를 건설하여 가는 과정을 간단히 토론해 보고자 한다.
 

새로운 시대와 환경
함풍제(咸豊帝)가 정권을 계승하면서 청은 국내외의 내란과 열강의 침략으로 그 국력이 계속하여 쇠퇴하여 갔다. 국내적으로는 태평천국의 반란으로 국토의 절반 이상이 반란군에게 장악되었고 또 대외적으로는 영, 불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베이징이 함락되고, 황제는 열하(熱河)로 피난 가서 그곳에서 객사하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어린 황태자 재순(載淳)이 함풍제의 유언대로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바로 동치제(同治帝)였다. 그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함풍제는 숙순(肅順) 등 8명의 대신으로 황제를 보필하도록 유언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서거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동서황궁의 두 태후와 공친왕이 신유정변(辛酉政變)을 발동하여 숙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두 태후가 수렴첨정하였다.

동서 두 태후(太后)와 공천왕은 정권을 장악한 후 쇠퇴해가는 정국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대내적으로는 15년 동안의 정국을 혼란케 했던 태평천국을 평정하여 국내 정세를 안정시켰다. 또 대외적으로는 시국의 변천을 인식, 자강운동(自强運動)을 전개하여 개방 이후 물밀듯이 밀려오는 서방 열강의 침략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동치제와 새로운 집권세력의 10여년 동안의 노력으로 정국은 많은 안정을 회복하여 갔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동치중흥(同治中興)’ 이라 호평하고 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속담처럼 동치제가 집권 10여 년 만에 서거하여, 광서제(光緖帝)가 어린 나이로 그 뒤를 계승하였으며, 여전히 동서 두 태후가 수렴첨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서태후 자희태후(慈禧太后)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그는 정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환관을 총애하고, 독단적으로 정권을 운영하여 국세는 또 다시 쇠퇴해가기 시작하였다. 비록 강유위(康有爲)와 양계초(梁啓超)등 민간 지식층들이 광서제에 건의하여 유신운동(維新運動)을 전개, 국세를 만회하고자 노력했지만 자희태후와 보수세력들의 반대로 103일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외적으로는 서방 제국주의 침략행위가 극치에 이르는 단계가 되어 중국은 전에 없는 외교적 위기에 당면하게 되었다. 1, 2차 아편전쟁의 실패로 중국의 문호는 완전히 개방되었고, 불평등 조약에 의한 경제적인 탈취와 중일전쟁의 패배로 인한 영토의 상실 등 중국은 왕년의 권위와 체면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동시에 서방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하기에 혈안이 되어, 중국을 중심한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방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선교의 절호의 기회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1843년 이래, 많은 선교사들이 개방된 5개의 항구 도시와 홍콩에서 중국어를 습득하여 언어의 장애를 이미 극복하고 있었고, 중국 문화와 풍속을 더욱 깊이 이해하여 중국인들에게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문 성경의 번역과 기타 다른 전도영 책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의 일부 지식층들이 서방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흠모하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수용하고자 자강운동을 전개하여 국세의 만회를 시도하고 있는 상태였다.
 

세계 각국 선교단체의 집결지
중국선교의 문이 개방되었다는 소식들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서방의 각국 기독교 단체들이 중국선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선교사들을 중국에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중국선교에 참석한 선교단체들은 무려 130여 단체가 넘는다. 국가별로 분석하면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노르웨이, 캐나다 등 기독교를 신앙하는 거의 모든 서방 국가들이 선교사를 중국에 파송하였다. 1911년 우리나라에 파송한 선교단체가 겨우 11개 단체에 불과한 것을 보아도 얼마나 많은 관심이 있었는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각 선교단체들의 교파별 배경을 보면 공리회(公理會), 장로회(長老會), 신의회(信義會), 침례회(浸禮會), 감리회(監理會), 성공회(聖公會), 내지회(內地會), 천주교(天主敎) 계통의 각 교파들과 기타 독립 교파 등 세계 각국 교회들이 거의 모두 중국선교에 참여하여 중국은 각국 선교단체의 집결지가 되었다.

공리회(公理會)는 완전한 민주제도를 채택하여, 교회의 치리권을 한 사람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신도 전체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예배의식 보다는 내면적 신앙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중국에서는 공리회, 강기신회(綱紀愼會), 미화회(美華會), 런던회(倫敦會), 미보회(美普會), 협동공회(協同公會) 등의 교단이 활동하였다.

장로회(長老會. Presbyterian)는 감리교와 공리교의 중간 노선을 채택하여 감독의 치리권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우들의 치리권도 인정하지 않는 일종의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다. 창립자는 칼빈으로 그 주요한 신학은 예정론에 의거하고 있다. 중국에서 활동한 장로교 계통의 교단으로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캐나다, 뉴질랜드, 미국 남 ∙ 북장로회 등이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중국선교에 적극 참여하였다.

신의회(信義會. Evangelical Lutheran)는 루터교라고도 칭한다. 인신칭의(因信稱義) 사상은 신의회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신학사상이다. 성찬에 관하여는 화체설을 믿지 않지만, 포도주와 떡에 예수가 친히 임하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교회의 치리는 의회제를 채택하여 각 교회에게 자치권을 인정하여 독자적으로 치리하도록 한다. 중국에서는 파색회(巴色會), 독일 신의회, 북미 신의회, 덴마크 루터회, 핀란드 신의회, 노르웨이 루터회 예현회(禮賢會) 등 각국 신의회 계통의 교단이 활동하였다.

침신회(浸信會. Baptist)는 침례 의식을 가장 중시하고 있는 기독교 교파이다. 그들은 신앙은 완전히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부모라도 자녀들의 신앙을 간섭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 그래서 참신회는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본인이 성장한 수 스스로 결정하여 침례의 방법으로 세례를 실시할 것을 견지하고 잇다. 참신회에서는 절대적인 민주제도를 채택하여, 신도들은 모두 평등하고 어떠한 계급이나 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영국, 미국, 스위스의 참신회와 신약교회(新約敎會), 래복회(來復會) 등의 교단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중국선교에 참여하였다.

감리회(監理會. Methedist)의 창시자는 요한 웨슬레이다. 감리교를 위리공회(衛理公會)라고도 칭한다. 그 영문 명칭은 인간의 도리를 준수하고 실천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감리회에 속한 어떤 교파는 그 뜻을 의역하여 순리회(循理會)라고 칭하기도 하고, 또 그 영문 이름을 음역하여 미이미(美以美)라고도 번역하였다. 그 조직은 감독제를 택하여 최고의 입법권을 행사하고 대의회를 영도하였다. 감리회는 인신칭의의 사상을 보수하고 개인의 영적 생명의 변화를 중시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미복음회(美福音會), 순리회(循理會), 미도미회(美道會), 미이미회(美以美會), 감리회(監理會), 순도회(循道會) 등의 감리교 계통 교파가 활발히 중국선교에 참여하였다.

성공회(聖公會)는 ‘Holy Catholic Church’ 를 의역한 것으로, 영국 성공회를 안리감회(安理甘會)라고 번역하기도 하였다. 성공회가 감독제를 채택하고 있어 감독회(監督會)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1909년 모든 성공회 계통의 교단 명칭을 중화성공회(中華聖公會)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1909년 모든 성공회 계통의 교단 명칭을 중화성공회(中華聖公會)라고 통칭하였다. 성공회의 조직은 감독제를 채택하고 있고 그 의식이 신구교를 절충한 상태여서, 개신교 교단중에서는 천주교와 가장 비슷한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지만, 천주교에 비해 상당히 포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영국, 캐나다, 미국 성공회가 선교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내지회(內地會. China Inland Mission)는 발전과 조직에 있어 상기한 교파들과 달리 중국선교에 있어 걸출한 성과를 이룩한 초교파적인 선교단체였다. 창시자는 영국 감리교 소속의 허드슨 테일러(戴德生. Hudson Taylor) 선교사이다. 그는 당시 중국선교가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여, 내륙지역의 선교적 필요성을 깊이 깨닫고 내륙 선교를 주장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여 선교단체 이름을 내지회라 칭하였다. 그는 각 교회에 호소하여 복음에 열정이 있는 젊은 선교사들이 내륙선교에 참여할 것을 격려하였다. 내지회는 신학 사상이 다른 교파들처럼 뚜렷하고 엄밀한 조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복음에 뜨거운 사명을 갖고 내지에서 중국인과 동고동락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내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의 열정적인 호소에 감동하여 케임브리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7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후에 중국 내륙의 벽지에서 복음을 위해 헌신한 일화는 그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있다. 내지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자립(自立), 자전(自傳), 자양(自養)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천주교(天主敎. Cathlic)도 이러한 좋은 기회를 방관하지 않고 적극 중국선교에 참여하였다. 이전 글에서 설명하였던 것과 같이 중국과 교황청 사이에 예의문제가 발생하자 1773년 교황은 예수회를 해체시키고 중국선교를 중지시켰다. 그러나 1814년 교황은 예수회를 다시 회복하도록 윤허하였다. 1842년 교황은 예수회 소속의 남격록(南格祿, Gotteland), 애방제(艾方劑, Esteve)와 이수방(李秀芳, Brueyre) 세 명의 선교사를 상하이에 파송하여 오랫동안 중지했던 천주교의 중국선교를 다시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1900년까지 예수회 등 9개의 단체와 8개의 수녀회가 중국선교에 참여하였다.
 

선교사들의 선교정책
1905년 중국에서 활동한 기독교 선교사들의 진용이 1960년에 비해 40배가 증가한 것을 보면 불과 40년 동안 근대 중국 기독교가 중국 전역에 걸쳐 신속히 발전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업적은 각 교단의 선교사들이 중국이 개방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력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서방 선교사들은 중국선교를 위해 다양한 선교방법들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 중에 허드슨 테일러와 티모시 리차드 선교사가 채택했던 선교방법은 이 시대를 대표할만한 서로 다른 유형의 선교형태로, 당시 중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풍부한 참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미국의 중국 기독교 역사 전문가인 코헨(Paul A. Cohen)은 하버드 대학의 학술지에 “Missionary Approaches : Hudson Taylor and Timothy Richard”(Harvard University : Papers on China, Vol. 11. 1957)라는 제목으로 허드슨 테일러와 티모시 리차드의 선교방법을 연구하여 심도 있게 비교하였다. 타이완의 역사 학자인 소문봉 씨가 위의 논문을 번역하여 발표하였다. 그의 내용을 토대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두 선교사의 선교방법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방법
허드슨 테일러는 1832년 영국의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증조부 때부터 감리교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전통적인 기독교 가정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한 약사이고 목사여서, 자녀들의 일상생활과 신앙에 매우 엄격히 교육하였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의 청소년 시절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13세 때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휴학을 하고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을 해야했다. 그러나 과정에서 신앙에 많은 회의를 느끼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었다. 17세 때 거듭나면서 그의 모든 생명을 주님께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를 중국에 부르심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는 4년 동안 중국선교를 위해 의학과 신체단련을 준비하다가 1853년 중국전도회(The China Evangelization Society. C.E.S)의 파송을 받아 중국에 와서 열심히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않아 1860년 영국에 돌아가 휴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중국선교의 비전을 조금도 잊을 수 없어 영국 각 곳에 다니면서 중국선교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이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1865년 그는 영국에서 내지회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중국선교를 재출발하였다.

허드슨 테일러는 인간이 죽으면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든가, 아니면 천당에서 영원한 축복과 평안을 누린다는 말세론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인간의 영혼 구원을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영혼이 구원받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여서 이를 위해 기도와 믿음의 생활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많은 선교단체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하여 영국에 있는 내지회의 선교본부를 상하이로 옮기고 영국의 사무실은 선교에 필요한 단순한 업무만을 담당케 하여, 자신이 현지에서 친히 진두지휘하면서 강력한 영도력을 구축하며, 선교의 효과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는 인간의 영혼 구원이 최우선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 이외의 기타 다른 모든 것들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그는 지식 훈련보다는 영적인 훈련이 더욱 중요하다고 믿어서, 동역자들에 대해 그다지 많은 요구를 하지 않았다. 복음의 열정과 중국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고 신체 건강하여 낙후한 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고, 종족의 우월감이 없으며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을 겸비한 사람이면 신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내지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종교와 정치를 엄격히 구분하여 소송을 간섭하거나, 어떠한 핍박과 고난을 받아도 피해 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전적으로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내지회 소속 선교사가 58명이나 살해되었지만, 조금도 그 피해 보상을 하지 않아 중국인들의 마음을 감동케하기도 하였다.

이토록 그와 그의 동역자들이 복음을 위해 노력한 결과 1905년 허드슨 목사가 소천하였을 때 내지회는 중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선교단체로 성장하였다. 849며의 선교사와 21,648명의 신도가 전국 각지에 산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육, 의료, 학문이나 금전 등이 복음을 대신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러한 활동을 장려하지 않았다. 다만 성경과 기타 복음 서적을 읽기 위하여 초등교육 정도의 학교만을 운영할 뿐이었다. 1907년 통계에 의하면 내지회가 세운 학교는 66개의 기숙학교와 120여 개의 주간학교에서 1,166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선교단체의 규모에 비해 현실적으로 빈약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허드슨 목사의 이러한 선교방침은 복음을 신속히 전파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중국 교회에서 세상 지식과 신학교육을 중시하지 않는 풍토를 조성하기도 하였다.
 

티모시 리차드의 선교 방법
1845년 티모시 리차드는 영국의 조그만 농촌에서 9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비록 부유한 가정은 아니지만 부모가 침례교의 집사로 독실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화목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15세 때부터 부친의 갑작스러운 소천으로, 티모시는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돌보아야 했다. 모친과 형들의 권고로 다시 공부한 그는 고학으로 어렵게 고등학교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였다. 티모시가 13세 되던 해 윌리암스의 대부흥 운동을 경험하면서 신앙을 결단하고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1865년 20세 되는 해에 그는 교사직을 사직하고 침례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교육을 받았다. 1868년 학기말 그는 귀네스 부인(魁麗思, Mrs. Grathan Guinness)의 강연을 듣고 깊은 감동을 받고 중국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본 교회의 청빙도 거절하며 이듬해 11월 침례교 선도회(Baptist Missionary Society B.M.S)의 파송을 받아 중국선교의 길에 올라 1870년 2월 상하이에 도착하고 곧 바로 산둥성 옌타이(煙臺)로 가서 40년 중국선교 생애를 시작하였다.

티모시 리차드 목사가 중국에 오기 전, 그는 에드워드 어빙(艾溫, Edward Irving) 목사가 런던 선도회에 보낸 선교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었다. 어빙 목사는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인용하여 새로운 선교전략을 제시하고 있었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마 10:11) 그는 민간 종교의 지도자 또는 사회 각층의 영도자가 이 말씀이 의미하는 ‘합당한 자’ 라고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중국선교를 위해 예비해 놓은 합당한 사람을 찾는 것을 가장 중요시했다. 이러한 관념이 티모시 리차드의 신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서, 그는 그러한 합당한 사람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중국 문화에 매우 심취하기 시작하였다.

티모시 리차드는 하나님 나라가 단순히 사람들의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어느 곳에서든지 이루어져 현재는 물론 장래의 모든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가 모두 구원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에서 인간의 일상생활이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대 자연을 통해 오묘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계시하고 있는데 인간이 무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일종의 죄악이라 여겼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할 때에, 그는 지상의 생활 환경 개선을 강조하여 이 땅에 지상 천국을 건설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가지 은헤와 능력을 이용, 교육과 새로운 과학, 학문 등으로 중국 사회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의 이러한 선교 정책은 불행히도 침례교 선교 본부와 기타 다른 동역자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1890년 침례교를 떠나 독립하여 특별한 기구를 조직하지 않고 단독으로 그의 비전을 위해 고군분투 하였다. 그의 이러한 지상 천국론의 결과로 중국 교회가 심오한 윤리와 선한 행위를 중요시 여기는 경향을 취하게 되었다.

1866년 리차드는 중국 각 성에 고등학교를 설립, 중국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장래 중국의 정치, 교육, 종교 등 광범위한 인재들을 양성할 계획을 영국 침례회 본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경비가 너무 방대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자, 그는 다시 그 계획을 중국 관리들에게 제출하였다. 이홍장을 통하여 노력했지만 역시 경비의 방대함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1901년 중국이 의화단 사건으로 방대한 손해 배상을 영국과 프랑스 등 8개 국가에 지불해야 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 배상금 중의 일부를 교육에 투자하도록 교섭하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는 산서대학당(山西大學堂)을 건립, 연령과 직업을 초월한 광범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티모시 리차드 역시 선교사의 영적인 생명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중국 선교사의 수준이 중국의 지도자들보다 더 높아야 한다고 믿었다. 중국에서 좋은 선교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경건한 신앙 이외에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젊은이들을 중국에 파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선교관 때문에 그는 선교사들의 양보다는 질적인 수준을 상당히 요구하였다. 그는 선교사들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매 3년바다 한번 선교사들에게 시험을 보도록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 시험 범위는 중국의 문화, 역사, 법률, 예술과 예의 등 매우 광범위했다. 이러한 그의 제의는 선교단체에 의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특별한 선교관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그는 청말에 빈번히 일어나는 교안(敎案) 사건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상에서 우리는 허드슨 테일러와 티모시 리차드의 선교 방법을 간단히 비교해 보았다. 테일러는 미래의 천국을 위해, 리차드는 현재의 지상 천국을 위해 서로 다른 선교관을 갖고 중국선교에 임했다. 결과적으로 허드슨 테일러의 선교 대상은 자연히 일반 대중이 중심이 되었고, 티모시 리차드의 선교 대상은 상대적으로 중국 상류의 지도자들이었다. 허드슨 테일러가 천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100만 신도를 목표로 노력할 때, 티모시 리차드는 이상적인 한 사람의 선교사로 100만 신도를 인도하고자 하였다. 이 두 선교사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근대 중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까지도 중국선교에 관심있는 우리들에게 좋은 참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강인규 | 타이완 중위안(中原大學) 교수 ∙ 중국 교회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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