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영예
나는 중국 동북에 있는 얼음의 도시 하얼빈(哈爾濱)의 외곽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본래 농촌 출신이지만, 후에 도시로 올라와 군수사업체 노동자로 일하셨다. 어머니는 일찍부터 여러 차례 아버지에게 공산당 입당 신청서를 쓰라고 재촉하셨다. 입당 신청은 공산당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일 뿐 아니라, 일단 공산당원이 되면 승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글 쓰는 것을 싫어한 아버지는 단 두 번만 신청서를 썼고, 결국 재작년 은퇴할 때까지 비(非)당원 적극분자로 남아 계셨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매우 근면하셨기 때문에 나는 유년시절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성장하였다. 1978년 전국적으로 10년 의무교육이 재개되던 해에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하얼빈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공산당 입당 신청을 했고, 이듬해 비로소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당원이 된 나는 매우 우쭐했다. 단지 1%의 학생만이 이런 특별한 영예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7년 졸업 후 나는 베이징(北京)의 한 은행에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학생 간부이자 당원이었던 나는 매우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좋은 날은 결코 그렇게 길지 않았다. 내가 직장 내부의 조정을 요구하자 윗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졌고, 결국 나는 직속상관의 미움을 받아 불이익을 받게 되었다. 1989년 6∙4 천안문 사건 이후 중앙에서는 모든 공산당원들에게 재등록을 요구했다. 지도자는 나에게서 6∙4 사건에 연루된 어떤 잘못도 발견하지 못했지만, 내가 외부출장으로 인해 6개월 동안 당 회비를 납부하지 않은 사실을 알고서는 자동적으로 탈당 처리를 해버렸다.
나는 마치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이상과 직업, 희망 모두 위험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정부기관에서 일하면서 당원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것은 자신의 정치 생명이 자동적으로 사라진 것과 다름없었다. 사실 내가 알고 있기로 우리 회사 사장도 6개월 동안 당 회비를 체납했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비난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나는 체납한 회비를 이미 납부했다. 몇 푼 안되는 돈 때문에 큰 문제를 야기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원리대로 따지고 싶었다. 당위헌 규정에 의하면 “내지 않은 것”과 “잊어버린 것”은 서로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다. 그러나 지도자는 이미 나를 다른 젊은 이들의 본보기로 삼으려고 마음 먹고 있었다.
당시 내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어떠한 결과가 생기더라도 굴복하지 않고 계속 투쟁하여 총은행 당조직에 고소를 하든가, 아니면 이 수욕을 참고 장래의 재기를 기다리는 길이었다. 그러나 불법이 횡행한 이 세계에서 뒤로 물러나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자주 하늘을 쳐다보며 “다른 사람은 칼과 도마요, 나는 도마에 오른 고기구나”라며 탄식했다. 처음으로 정치투쟁의 무정함과 잔혹함을 몸소 느꼈으며,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참으로 작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시기였다.
고통스런 몸부림을 겪은 후 나는 결국 굴복하여 입당 재신청서와 반성문을 당 조직에 제출했다. 또한 당원대회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자아비판을 하여 당에서 다시 나를 받아주길 요구했다. 그들은 혹독한 비판과 토론 후, 나에게 1년의 시험기간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나는 뤼난(魯南)이라는 산간지역의 자오좡(棗莊)에서 잊을 수 없는 1년을 보냈다.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영어교사
시험 기간이 다 끝나 다시 베이징으로 복귀한 나는 당적(黨籍)이 회복되어 원래의 일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마음은 회복되었다는 안도감으로 가득했다. 당시 나에게 칼을 휘둘렀던 지도자는 이미 퇴직했으므로 내 앞길에 또다시 밝은 빛이 비추는 것 같았다.
1992년 초 당 조직의 지도자는 나를 항저우(杭州)로 파견하여 한 학기 동안 전국 외사(外事) 간부 영어훈련을 받게 하였다. 또 그 학교 당 위원회에서는 나를 학생 당 지부 부서기와 반장으로 임명하였다. 중국의 상황에 대해 잘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중국 외사처 직원들 가운데는 당원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우리 반 20여 명의 학생 중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 당원이었다. 매번 당원대회가 열릴 때면 거의 모든 반 학생이 다 출석하였다. 이 학교는 마치 견고한 공산당 요새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 견고한 요새 안에 젊은 미국인이 새로운 씨앗을 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우리 반 영어교사인 팀(Tim)이었다. 나이는 나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말과 행동에 있어서 그는 나를 감탄케 했다. 그의 몸에는 마치 광채가 있는 것 같았다. 그를 가까이 하는 모든 사람은 그에게서 얻는 것이 있었다. 나는 그가 수업 시간에 가르칠 때 진지하며 오락활동 때에도 겸손하고 관용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더욱이 그가 받는 월급이 매우 적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중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여기에 온 목적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중국인들을 위해 봉사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내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이 일었다. 이후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많은 학생들이 그와 사귀는 이유는 영어로 말하기와 듣기를 연습하기 위함이 아니라, 개인적인 일이나 가정 문제, 그리고 사상적인 곤혹감에 대해 그와 상담하면서 그의 이해와 위로를 받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후 팀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반 학생들의 대부분이 당 간부인데, 사상적인 문제로 당 조직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독교인을 찾아가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당 지부 부서기인 나로서는 실망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호기심이 일어나 이 수수께끼를 파헤치고 싶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셨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다
1993년 4월 28일, 나는 친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그냥 듣기만 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특별히 너희들이 알았으면 하는 한가지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것은 작년 4월 내가 항저우에서 공부할 때 일어났다. 난 다른 사람의 인도로 처음 교회 문을 들어섰다. 그 곳에서 나는 평상시 대하기 싫어했던, 정말이지 회피하고 싶은 인생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리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사람에게 영혼이 있는가 등등의 문제 말이야. 우리가 전에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과학적인 답이 과연 옳은 것일까? 나는 평소에는 문제로 여기지 않던 문제에 직면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었지. 나는 내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때부터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비록 겉에서 보면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출퇴근하고, 일하고, 공부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대하는 내 마음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영혼에 생명이 싹트고, 마음에 평안이 가득함을 느낀다. 나는 하나님의 잃어버렸다 되찾은 양이야. 지금 하나님의 사랑 안에 푹 빠진 나의 이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구나.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성경 시편 34편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 맛을 나의 졸필로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고 있다. 나의 바람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모두 하나님을 알고 그를 영접하게 되는 것뿐이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후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교회 사역을 돕다가 후에 성가대와 청년회 등에도 참석하였다. 이런 모임들을 통해 나는 주 안에서 매우 성숙한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게 되었고, 매주 두 차례 이상의 성경공부를 통해 제자훈련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매일 몇 시간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그러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믿은 지 1년도 안 되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1993년 7월 1일 나는 베이징 서쪽 외곽에 있는 하오청허(護城河)라는 강에서 세례를 받고 정식 기독교인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내가 공산당에 입당한지 7년째 되는 날이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감에 따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억제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7년 전 입당선언을 할 때의 감격과 비슷했지만, 그 품격과 격조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전자가 나 자신의 성공을 위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영생과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입당할 때는 내 자신의 이익과 당의 공동이익이 결합됨으로 인한 기쁨과 영광, 교만을 느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주님께 돌아왔을 때는, 나 같은 죄인이 창조주로부터 버린 바 되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죄사함 받고 용납되었다는 데 대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사를 느끼게 되었다.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날마다 명확해졌다. 특히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세상에 오신 것에 대한 목적이 분명하게 이해되었다. 세례 후 한 작은 집회에서 주님은 나의 전 생애를 드려 주님을 섬길 것을 말씀하셨다. 목사님과 다른 선생님들의 권면과 인증을 거쳐 나는 주님께 반응을 했고, 평생 주님께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또한 기도와 전도를 사명으로 삼고 이것을 내 생애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길 것을 결심했다. 바로 이때, 전에 책에서 읽었던 위대한 인물들이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 감동적인 정경이 내 뇌리에 떠올랐다. 예수님의 거룩한 온유가 내 안에 충만했다.
한 통의 신청서로 천국 시민이 되다
아버지는 두 통의 입당 신청서를 써서 아무런 회답도 받지 못했으나, 나는 단 한 통의 ‘세례요청서’로 주님께 받아들여졌다. 나는 두 통의 입당신청서로 말미암아 공산당원이 되었지만, 결국 참 빛에 이끌렸고 진리에 굴복되었다. 나의 아버지와 길은 달랐지만 이르는 곳은 같아서 영생 천국의 시민이 된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나는 하나님이 우리 모두 각기 다르게 만드셨고,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결국 도달하는 길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복음의 통로가 되어 수많은 목마른 영혼들에게 천국의 생명수를 전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하였다. 영어교사 팀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나로 인해 예수님을 알고 영생과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말이다.
1993년 10월, 나는 국가 공직을 떠났다. 그리고 그 해 11월 말 호주로 가서 결혼을 하고 캔버라에 정착하여 중국에서 온 동포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학조교로, 식당 종업원으로, 운송직원, 피자, 중화음식 외판원으로 일하였다. 1996년 2월 나는 캔버라 선교신학원에서 신학공부에 전력했고, 1998년 11월 졸업 후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초, 나는 아내 아이링(愛玲)과 함께 시드니로 이주하여 전문적으로 복음전도 사역에 몸담고 있다.
출처 | 〈海外校園〉 제38기
번역 | 곽숙 ∙ 중국어문선교회 협동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