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국부(國父) 쑨원(孫文)은 혁명에 헌신하기 전, 일찍이 의학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하였다. 그는 홍콩의 서의서원(西醫書院)에서 정식 의학교육을 완성하였지만, 그 이전 광저우(廣州)에 있는 박제의원(博濟醫院) 부설 의학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쑨원은 바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의학교육을 접했다. 1886년 가을 쑨원이 이 학교에 들어갔을 때, 박제의원의 창시자인 피터 파커선교사는 이미 82살의 노인으로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노년기를 보내며, 과거 중국에서의 의료선교 사역의 날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예수님 닮은 삶을 추구하며
파커는 1804년 미국 메사추세츠주의 프래밍험(Framingham)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본래 두명의 형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어렸을 때 죽어, 그는 누나 둘과 여동생 한 명과 함께 자라났다. 유년시절의 파커는 늘 농장과 학교, 교회, 이 세 곳만을 맴도는 단조로운 생활을 보냈다. 파커와 그의 누이들은 성실한 부모님 밑에서 경건하고 근면한 삶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아이였으므로 농장의 여러가지 일들을 도와야만 했고, 따라서 학교 공부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진학 시기도 늦어져, 23세 때 암허스트 대학(Amherst College)에 들어갔다. 그는 교내에서 가장 나이 많은 학생이었다.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이 학교에서 3년을 공부한 후, 파커는 학문수준이 비교적 높은 예일대학(Yale College)에 편입하였다. 예일대학에서 그는 암허스트에서의 전 학점을 인정받아, 1년 만에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예일대학에서의 1년 동안 파커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학문 분야가 아니라 거룩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었다. “나는 더욱 성결해지고 예수님을 닮기를 원하다”라는 구절을 당시 그의 일기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1년 동안 그는 해외선교에 헌신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 선교동원가인 루퍼스 앤더슨 (Rufus Anderson)이 예일대학에 와서 인도한 집회에 참석하면서 파커는 드디어 마지막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루퍼스는 미국에서 가장 일찍이 세워진 미국해외선교부(American Board of Commisioners fo Foreinn Misions)라는 선교단체에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파커는 그곳으로 선교사 지원서를 보냈다.
이 단체에서는 그를 받아들였지만, 그에게 다시 예일대학으로 돌아가 신학과 의학 공부를 더 할 것을 건의하였다. 중국까지 공짜로 갈 배를 타기 위해, 파커는 학업에 박차를 가하여 4년의 의학과정을 3년 만에 끝냈다. 그리하여 1834년 3월에 시험을 통과하고, 6월에 미국을 출발, 10월에 광저우(廣州)에 도착하였다. 파커는 최초로 중국에 온 의료선교사였다.
박제의원을 세우다
1835년에 파커에 의해 세워진 박제의원은 중국 최초의 현대식 의원이었다. 이 의원은 처음에는 광저우시 밖 서남쪽의 외국인 거주지에 있었다. 비교적 큰 규모의 병원으로 대기실에는 2백 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4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상도 있었다. 개원한 지 17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병원 기록부는 240여장이나 쌓였고 이 중에는 정부 관리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파커의 의술이 매우 빠르게 중국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음을 알수 있다.
날마다 늘어나는 환자들을 순서대로 치료하고 행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파커는 병원문에 들어선 환자들에게 대나무 조각으로 된 정사각형의 표를 나눠주었고, 환자들은 그 표 위에 적힌 번호대로 진료실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전세계의 병원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대기번호제’였다. 파커가 중국의 박제의원에서 처음으로 이 제도를 시작한 것이다.
파커는 안과 전문의로서 처음에는 안과 질병만을 진료했으나, 병자들의 거듭되는 요구에 따라 이후부터는 나병과 상피병을 비롯하여 탈장, 종양 등 다른 병들도 돌보는 ‘종합의사’가 되었다. 그 중에서도 외과 방면에 있어서 파커는 중국 근대의학사상 중요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의사였다. 편도선 제거(1844년), 에틸에테르 마취(1847년)와 클로로포름 마취(1848년) 등에 관한 연구자료를 남겼던 것이다. 파커는 또한 종양 제거수술로 유명했다. 얼굴의 반을 가릴 만큼 큰 종양을 가진 한 소녀를 수술하여 1.25파운드나 되는 종양을 제거했고 결국 그 소녀의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다.
파커는 중국에서의 20년 의료사역 동안에 모두 5만 3천여 명의 환자를 돌보았다. 그 중에는 광둥(廣東)과 광시(廣西)의 총독부터, 온 몸에 부스럼이 난 거지도 있었다. 광둥 지역뿐만 아니라 멀리 외지에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가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 중에는 중국 최초의 목사인 량파(梁發)도 포함되어 있었다. 파커는 그를 치료한 후 “내 생애 가운데 별로 선한 일을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주의 종의 건강을 회복시켰다는 한 가지 만으로도 이 세상에 있음이 헛되지 않았다.”라고 말하였다. 후에 량파 목사는 자주 박제의원에 들러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파커 박사의 여러 일들을 도와주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명의
파커는 의료를 선교사역의 한 방식으로 생각했다. 그가 비록 의술에만 정진하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환자를 수술하기 전에 그는 환자의 상태를 자세히 살필 뿐만 아니라, 환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의 일기 곳곳에는 어떤 환자를 ‘가장 위대한 의사인 예수님의 손에 맡긴다.”라는 글귀와, 어떤 환자의 치유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는 굴귀가 적혀 있다. 그는 수술하기 전 환자들의 마음 상태를 가장 중요시했기 때문에, 며칠이 걸리더라도 환자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갖도록 도와주었고, 그렇게 된 후에야 수술을 시행했다. 그 결과 환자들은 육체의 건강을 찾을 뿐 아니라, 영생을 얻음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었던 것이다.
최신 의학 기술을 얻기 우해 파커는 매번 미국으로 돌아가 병원을 참관하고 의술이 탁월한 의사들을 찾아가기도 하였다. 1841년 그는 처음으로 고국에 돌아왔고, 이 때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아내와 이별하고, 반년 동안이나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를 돌아다니며 런던과 파리의 수많은 명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발전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 조수를 훈련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곁에는 대략 10여 명의 조수들이 있었는데, 그 중 수제자 쾅모우(鄺某)가 가장 뛰어났다. 파커가 여러 가지 일로 병원에 없을 때에도 쾅모우는 혼자서 그 일들을 담당하였고, 환자들은 줄어들지 않았다.
쾅모우의 숙부는 일찍이 치너리(Chinnery)라는 영국인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는 파커가 중국인 동포들을 위해 무료로 병을 고쳐주는 것에 감사하여, 자신도 돈을 받지 않고 파커를 위해 여러 환자들의 상태를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이 그림들은 생동감 있는 의학자료가 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 110여 점의 그림 중 86점은 예일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23점은 런던의 고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한 폭은 피스톤 카운트웨이 박물관에 있다. 그 중 30여 폭이 종양 환자들의 초상화이다.
중국의학회의 창립
의료선교의 중요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파커는 1838년 엘리자 브리드만(Elijah C. Bridgman)과 토마스 칼리지(Thomas R. Colledge) 두 사람과 함께 「중국의약회(Medical Missonary Society in China)」를 창립하였다. 설립 당시 칼리지를 회장으로, 파커를 부회장으로 추천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칼리지가 영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므로 실제적으로 파커가 이 단체를 이끌어 나갔다. 비록 「중국의약회」가 후에 생긴 「중국박의회(China Medical Missionary Association)」처럼, 번역된 의학용어를 통일한다든가 의학교육의 보급 등에 있어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초기 의료선교사를 연결하는 방면에 있어서는 매우 큰 공헌을 남겼다. 윌리엄 록하트(William Lockhart), 벤자민 홉스(Benjamin Hobson), 맥카티(D.B McCartee) 등은 중국교회사나 의학사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인물들로서, 모두 「중국의약회」의 회원들이었다.
1844년 중국과 미국이 마카오에서 양국 간 최초의 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이 때 파커는 미국 공사 쿠싱(Caleb Cushing)의 통역관을 맡았다. 이것은 그가 외교 방면에 참여하게 된 첫 시작이었으며, 이후 미국 대사관 대변인과 공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1855~1857).
1857년 파커부부는 미국 워싱턴에 정착하게 되었고 다시 중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안과, 의과, 마취 방면에 있어 세계 최고 수준의 의사였던 그가 고국에 돌아와서는, 마치 의사가 아니였던 것처럼 다시는 환자를 돌보지 않았다. 그가 처음 의학을 공부한 것은 중국에 가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명의들이 운집해 있는 워싱턴에서는 더 이상 의사로서의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이후로도 중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끊이지 않아, 계속적으로 중국에 있는 친구들과 편지 왕래를 했다. 당시 박제의원의 두 번째 원장을 맡고 있는 존 커(John Kerr)에 의해 중국에서 의료와 선교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파커는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
출처 | “醫療宣敎的先驅-伯駕,「校園」66년 10월호
번역 | 곽숙 ∙ 중국어문선교회 협동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