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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6.20  통권 64호  필자 : 대천덕  |  조회 : 2615   프린트   이메일 
[선교일언]
예수님의 삶에서 배우는 선교

얼마 전 예수원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하는 방법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토론의 대상이 된 지역은 러시아였지만 그때 논의된 원리가 다른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선교란 우리가 ‘좋은 소식’이라 부르는 복음을 선포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 필자주-

 

공의를 행하는 사역
우리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곧 임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30년 동안 주변 사람들과 나라 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계셨다는 것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30년 동안 이 나라의 필요가 무엇인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라의 지도자들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주의 깊게 관찰하셨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가까웠다”라고 한 기간은 3년 반의 기간이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승천하신 후 오순절로부터 시작한다.

치밀한 준비 기간을 마치신 후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은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듣기 싫어하는 메시지를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권력자들은 그 분을 비방하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죽이기까지 했다. 그 메시지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 메시지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 메시지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즉 구약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메시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메시지였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겸손이며, 하나님을 개인의 권력이나 영향력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먼저 가난한 자, 과부, 고아, 억압받는 자, 유랑자들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권력자들에 의해 핍박받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자들에 의해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러시아, 중국, 인도 등에 가서 우리들은, 성경을 접한 적이 없고, 성경의 하나님이 약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된다. 인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수의 대지주들에 의해 착취 받고 있는데, 이것에서 선포되는 성경의 메시지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복음이 되지만 권력자들에게는 진정한 위협이 될 것이다. 현재까지 우리의 선교사들은 권력구조에 위협이 될만한 어떤 메시지도 전달한 적이 없다. 단지 가난한 자들을 먹이는 데만 집중하여 사역해왔다. 가난한 자를 먹이는 것은 미가서 6장 8절에서 말한 “인자를 사랑하며”에 해당한다. 그리고 영적인 가르침은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미가서 6장 8절에서 첫 번째로 말한 “공의를 행하며”에 해당하는 사역은 우리 선교사들의 사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냐하면 공의를 행하는 사역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헌신하고, “누구든지 내 제자가 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들이 위험하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수 세기 동안 교회의 관행이 되어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시작되었는지 아는가? 이런 관행은 5세기경 북부아프리카의 한 로마인 지주에게서 시작되었다. 그 지주의 이름은 어거스틴이었으며 오늘날 튀니지 근처에 있는 히포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그는 교회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의 한 명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저작들이 교회에서 성경 다음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의 영향력이 성경보다 더 크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고 가르치지만, 어거스틴은 세상이 너무 악해서 변화될 수 없으니 영적인 일에만 집중하라고 가르치며 권력자들을 안심시켰다. 그의 가르침의 결과는 착취당하는 북아프리카의 토착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결국 그들은 모슬렘으로 개종하여 로마인들을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와 함께 바다 건너로 몰아냈다. 그러나 교회는 이 실수를 통해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하고 끊임없이 사회적 정의 대신 영성만을 강조하였다. 결국 이것은 20세기의 노동자 계급에게 심한 상처로 이어져서 이들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게 하였다. 우리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인해 너무나 많은 대가를 지불했다.

귀 기울여 듣기
예수님처럼,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들은 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기 원하시는지를 묻는 데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이들에게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이들에게 나쁜 소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 때에는 바리새인, 사두개인, 열심당원, 로마인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싫어했다. 반면 가난한 자, 교육받지 못한 자, 착취당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모두 부하고 권력 있는 자들을 위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이 전하는 왕국에 대한 생각을 싫어한 사람들은 부자와 권력자들이었다.

러시아나 중국이나 사람들은 다 동일하며,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천국에 가는 것보다는 생존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천국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면 그들은 곧 지루해하고 흥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빈곤선 이하의 경제수준에서 살고 있다. 중국도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이와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고 본다. 가난한 농촌지역 사람들이 도시로 이주하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대도시 변두리에서 꾸준히 증가하는 빈민촌에 흡수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은 무엇인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듣는다면 그들이 듣기 원하는 복음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들이 듣기 원하는 복음은, 어떻게 정의로운 대우를 받을 수 있나? 어떻게 직장을 구할 것인가? 착취적인 세금에서 면할 방법은 있는가에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성경에는 돈, 가난과 부, 재정, 토지, 공의의 원칙, 정의와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번역과정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성경을 번역한 학자들은 대개 상류층 사람들이며, 그들은 성경이 공의에 대해 끊임없이 언급하는 것에 약간은 당혹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공의라는 단어를 모호하고 의미 없는 단어로 대치했다. 킹제임스 번역은 ‘justice(정의)’라는 언급의 80%를 ‘righteosness(의)’라는 단어로 대치했다. righteosness라는 단어는 justice가 내포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착취에 대한 분노를 내포하지 않는 모호한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킹제임스 이후의 거의 모든 번역본들이 대부분 이러한 경향을 따랐다. 다양한 한국어 번역에서도 80% 정도가 ‘공의’, ‘정의’라는 단어 대신 ‘의’라는 유교적 색채가 있는 모호한 단어로 번역했다. 의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한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혁명을 일으키고 공평한 사회를 만들자고 말할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들이 하나님께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분이어서 우리가 겪는 세상 일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다. 그분은 고위층 관료들의 영적인 문제들만 꾸짖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시며, 자신의 독자를 보내서 우리와 같이 되도록 하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땅을 걸으시며 우리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염려하고 있는 동일한 문제들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 주신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코이노니아
예수님처럼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해결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해결책은 코이노니아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코이노니아를 언급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때를 기다리시는 동안,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코이노니아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 것 가르치셨다. 코이노니아가 실현되고 나서야 다른 모든 가르침들이 정리되었다. 성령께서는 코이노니아를 창조하신 분이며,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기억나게 하셨다.

우리는 공평한 사회질서가 필요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동시에, 유일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셔서 이러한 일을 실현시킬 것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공평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믿는 사람들 안에 있는 공평한, 또한 사랑이 있는 질서가 바로 코이노니아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이러한 교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며 선교를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바로 사도행전에서 일어난 선교의 사역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믿고 세례 받은 자들이 계속해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코이노니아)하며 모든 소유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읽는다. 사도행전 2:40~47의 말씀이 그 상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일의 결과는 사도행전 4:34에 기록되어 있다. 지주들도 회개하고 코이노니아 안에 들어왔고(32절), 온 교회 안에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34절). 사회적인 문제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해결되었으며, 모슬렘과 공산주의가 실현하려고 발버둥쳤던 이상적인 사회가 실현되었다. 이 복음이 바로 천국에 가거나 죄의 용서를 받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이다.

어떤 시점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이기심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 이 때가 우리가 죄사함과 거듭남,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신학이 다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곧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듣고 관찰해야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망상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다른 나라에 가 있는 많은 이들이 현지인들의 일 처리 방식에 상처도 많이 받고 화도 많이 내게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반드시 먼저 경청하는 자세와 사물을 관찰하는 태도, 그리고 우리와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출발점은 어디가 되어야 하는지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도록 해야만 한다.



대천덕 신부 | 예수원 원장
번역 | 권기정∙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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