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저, 목사님 10여명과 함께 필리핀을 방문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산지의 한 마을에서 저녁 집회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가서 쉬고 있는 중이었다. 전기도 없는 오두막 같은 조그만 집이었다. 목사님들과 같이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그 곳 사람 4명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들려오는 말,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순간 내 영혼은 마치 먹잇감을 만난 야수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한 목사님께서 “누가할까?” 라고 하자 어떤 목사님 한 분이 소책자로 전도하려고 하셨다. 그 순간 나는 전도하시려는 분을 만류하고 내가 전도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 4명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깊은 산지의 적막함과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1시간 이상 복음을 설명하고 그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하나씩 확인하면서 진행하여 나갔다. 어느 순간 그들의 마음속에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였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만유의 하나님, 바로 그 깊은 산골에서 창세 이래 그들을 기다리고 계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막 그들 4명의 참 아버지가 되신 것이다. 사랑하는 예수께서 그들의 구세주와 친구가 되신 순간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기도를 드렸다. 이제 막 태어난 필리핀 형제들과 진한 포옹을 하였다. 의 뺨에 흐르던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성경시대와 로마시대 중세시대든, 19세기든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이렇게 찾아오는 영혼들을 과연 제대로 인도하여 주님을 만나게 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이다. 전도는 연습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훈련일지 모르나, 그들에게는 영원한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이다. 우리의 말 한 마디와 행동,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들의 영원한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역자들이 범하는 잘못 중 하나는 전도에 있어 아마추어에로의 하향평준화이다. 우리는 전도방법을 너무 손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앞에 말한 필리핀 형제들의 경우에, 만약 몇 가지 성경 말씀이야기하고 단순히 영접하는 형식적인 기도나 따라하게 하고 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했다고 하자.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우리의 경험이다. 우리가 쉽게 그들이 주님 영접했다고 말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선포만 믿고 살다가 그들이 영원한 불못에 간다면 그것은 누구책임인가? 당신은 이러한 사실을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우리는 전도의 프로가 되어야 한다. 전도는 그리스도인 사역자의 필수과목 중의 필수과목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반대인 것 같다. 제 발로 찾아온 사람도 제대로 요리 못하는데 하물며 타문화권에서 언어와 생각, 가치관과 세계관도 다른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어떻게 의미 있고 실제적이며 내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전도를 할 것인가? 나는 내 할 일만 하고 그 후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겠지 하는 태도는 무책임한 것이다. 왜냐하면 “내 할일”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 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는 전도의 문제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발생되는 교회 다니는 불신자 층이다. 한국 교회의 성도가 정말로 천만이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무리 그들이 미숙하다고 하여도 천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나라 사회는 이런 모습이 될 수 없다. 인구의 1/4이 그리스도인인데 사회가 이토록 부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소위 천만의 교회 출석자 중 많은 사람들은 결국 불신자들이기 때문이다.
전도의 문제는 참으로 깊이 고민하고 훈련해야 할 주제이다. 그것은 몇 시간의 ‘전도방법론’만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선교사라면 이것은 더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나는 전도를 위한 두 가지 준비를 말하고 싶다. 하나는 기본적 준비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 준비이다.
기본적 준비: 당신은 불신자를 감동시키고 있는가?
이것은 삶의 문제이다. 그것도 불신자와의 관계 속에 드러나는 내 삶의 질의 문제이다. 창12:1~3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부르심을 모든 열방을 위한 ‘복의 근원’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모든 불신 민족과 가족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복의 근원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에 나타나듯이, 우리가 불신자들로부터 축복을 받아야만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즉 우리가 그들에게 ‘복의 근원’으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언제 우리를 축복하는가? 지하철에서 외치면 불신자들이 우리를 축복하는가? 교회 건물을 짓기 시작하거나 완공하면 이웃의 불신자들이 우리를 축복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의 양심이 그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언제 그들이 우리를 축복하는가? 그리고 언제 그들은 우리를 저주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고 있는지 아니면 저주의 근원이 되고 있는지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불신자들의 영혼을 감동시킬 때 비로소 그들은 우리를 진심으로 축복한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우리를 통해 흘러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에게 두 가지 치명적인 권리를 주셨다고 생각한다. 난 그것을 ‘불신자의 두 가지 거부권’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거부권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13:35에 나타나 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할 때만 우리를 인정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 간에 진정한 사랑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그들은 우리를 거부하는 권한을 당연히 행사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에 대한 거부권이다. 이것은 더욱 심각하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아니요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17:20~21). 예수님은 너무도 간절히 원하신다. 그리스도인이 하나가 될 때 세상은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리스도인 안에 연합과 일치가 없을 때 세상은 그리스도마저 거부하는 권리를 행사한다. 세상은 부르짖고 있다. 참 사랑이 어디 있는가? 참된 하나 됨을 볼 수 있는가? 그들은 이것을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한다. 그리고 그 기대가 좌절될 때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를 다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도의 기본이다. 이것만 된다면 전도는 사실 거의 다 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연합, 가정에서, 교회에서 교회 간에, 교단 간에, 교회와 선교단체 간에··· 이것이 전도의 진정한 전략이다. 사랑과 연합이 아닌 경쟁과 시기, 다툼과 분열을 숨긴 채 피상적인 방법들과 비인격적이고 의도가 드러나 보이는 접근을 할 때 세상은 마땅히 거부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과 연합’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전도사역의 핵심이다. 이것은 목표가 아니라 전도의 출발점이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명제이다. 이것은 전도의 은사 차원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본적 부르심이다.
기술적 준비: 당신은 영적 전문의인가?
전도의 첫째 요건이 삶의 문제라면, 두 번째는 기술의 문제이다. 전도는 요행에 맡길 수 없다. 전도를 못하는 이유는 체계적이고 적절한 전도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을 만난 에티오피아 내시는 안타까운 음성으로 답답한 심정ㄹ으 토로한다. “지도해 주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도서관에서 10년 간 의학공부만 하고 수술실에 갈 수 있는가? 실습과 경험이 없는 이론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론이 없는 경험만으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시행착오의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능숙한 전문의처럼 영혼의 상태를 진단하고, 수술하고, 처방해주는 전도의 명의(名醫)들이 너무도 적다. 마치 응급조치법 하나만 배운 채 전쟁터로 내보내는 위생병들이 고작인 것 같다.
기존의 전도방법들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시대착오적이다. 그 방법은 50년 전, 70년 전에 통했던 방법이다. 의미가 불변하는 것이지 방법은 언제나 변할 수 있다. 빨간 띠를 두르고 외쳐대는 그들의 열정은 가상하나, 실상은 시대와 오늘의 현실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이것보다 더 치명적인 오류는 전도방법이 획일적이고 기계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몇 구절의 간단한 것이든 몇 십분 분량의 체계적인 것이든 관계없이 그것은 획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이다. 전도의 대장이신 예수님은 그때그때마다 적절하고 독특하게 접근하셨다. 상대의 인격의 상태와 상황에 따라 자유롭고 적절하게 다가가셨다. 획일적 방법들은 상대의 인격성을 모독하는 것이다. 마치 아주 엉성한 그물을 하나 쳐놓고 오랜만에 망둥이 하나 걸리면 감격하는 것과도 같다.
또 한 가지는 다분히 서구적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통할지 모르나, 동양에서는 안 된다. 전도자의 열심 때문에 괜히 미안해서 영접기도를 따라해 주는 착한 불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은 문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첫째는 복음의 내용과 개념 등을 분명하고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믿음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로마서에 따르면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라 행위이다. 회개의 참 뜻은 무엇인가? 미래의 죄까지도 단번에 용서되어진 속죄의 완전성을 아는가? 속죄와 회개의 차이는 무엇인가? 가장 안타까운 사살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살이다. 막연하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 간다는 사실 몇 마디를 주문처럼 암기할 뿐, 그 말의 의미하는 참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좋은 전도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도를 정확히 이해하라. 복음과 핵심적 개념들을 충분히 숙지하라. 그것들이 다양한 상황과 상태의 사람들에게 그들 눈높이의 수준으로 자유롭게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둘째는, 어떻게 죄를 인식하고 회개하도록 도울까하는 문제이다. 죄용서의 체험과 확신은 구원의 기초이자 핵심이다. 스스로 죄인임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자에게 그 죄의 용서는 무의미하다. “당신은 죄인이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충분한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죄인임을 시인하는 것 같으나, 속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세상에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다 그렇게 사는거야. 이것이 정상적인 인생이야.”라고 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가 장신을 위해 죽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괜한 복음에 불과한 것이다. 회개하는 사람은 주변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세상과 상황이 어떠하든지, 그는 묵묵히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것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상대에 대한 분별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주입식으로 집어넣는 전도의 방법, 그리고 반응을 강요하거나 이해도 안 되는 사실을 계속 반복해주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전도자 앞에서 진심으로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할 만큼 전도자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고 있는지, 자신의 죄를 고백할 만큼 신뢰와 안정감을 주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이다. 이럴 때 불신자의 마음 문이 열리게 되고 주님은 그들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영접기도를 하게 하지 않는다. 충분히 반응하고 생각해보게 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준 이후에 기도하게 한다. 신체의 장기를 이식해 준 이에게도 감격하여 감사의 말을 전하는데, 내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나에게 이식시켜 주신 그분과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어찌 감격적인 감사의 반응이 안 나올 수 있는가? 맹숭맹숭한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인가? 아니다! 안 믿어지기 때문에 맹숭맹숭한 것이고 느낌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안 열렸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고 무감각한 것이다.
전도는 최우선 과제
마지막으로, 수련의처럼 숱한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묻고 실습도 하면서 배워가야 한다. 이러한 과정이 차곡차곡 쌓일 때 전도가 그의 삶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야수들의 민감한 감각으로 전도의 때와 방법을 분별하면서 접근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 정치, 경제, 예술, 언론 등의 사회 구석구석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전도는 이들 중의 한 가지 선택과목이 아니다. 전도는 최우선 과제인 것이다. 정직하고 좋은 회사는 만들었으나 정작 직원들이 지옥으로 간다면 그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다. 명의는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허준과 화타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종합병원의 전문의는 될 수 있다. 아니 되어야 한다. 영적 돌팔이는 심각한 범죄이다.
안정규 목사/ FMB MP코디네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