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른 사람을 안다고 할 때, 사실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네 삶을 ‘타자(他者)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것을 배우고 익힘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 타자는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나보다 다른 대상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의 대화가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참 묘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그만큼 타자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강렬함을 반중 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에 대한 이야기는 날로 무성해지지만,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제대로 이해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오히려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이러한 인식의 굴절이 비단 오늘날만의 현상이락 치부할 수도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곳과 저곳 사이의 교류와 커뮤니케이션이 제한되던 과거에는 때때로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오해와 굴절이 의외로 쉽게 발생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인식의 굴절 자체보다도 이러한 타자에 대한 인식과 인식과정에 개입되는 ‘의도적인’ 곡해(曲解) 내지는 조작이다. 더구나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잘못된 정보가 이후 확대 재생산 과정을 통해 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정설’로 각인되는 경우도 허다하지 않은가?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조너선 스펜스의 「칸의 제국: 서양인의 마음속에 비친 중국」 역시, 이러한 타자 인식과정의 곡해 내지는 조작의 문제를, 특히 중국에 대한 서구인의 인식을 중심으로 훌륭하게 그려내고 있다. 중국에 대해서, 특히 중국의 역사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스펜스가 저술한 ‘참 재미있는’ 중국사 서적을 한구 권정도 보았을 것이지만, 본서 역시 서구의 역사가만이 제대로 복원할 수 있는 참신한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본서는 1253년 뤼스브루크의 빌렘 수사가 종교적·외교적 사명을 띠고 카라코룸의 칸에게 파견된 때부터, 1970년대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의 관계를 배경으로 한 칼비노의 소설에 이르기까지 약 700년 동안 서구인의 중국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했는가를 보여준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서구인들의 본격적인 중국 인식은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론」에서 서술한 ‘칸의 제국으로부터 시작하고, 이후 강조점은 달라지지만 크게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칸(khan)'은 본래 몽골족의 수장 개념이지만, 유라시아 제국을 점령했던 13세기 몽골제국의 칸은 실제 지존무상(至尊無上)의 황제와 등치되는 개념으로, 이후 중국은 서구인들에게 ‘칸=황제의 제국’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중국에 대한 서양인의 인식이, 진위(眞僞) 논쟁이 아직도 진행될 정도로 잘못된 정보가 수두룩한 「동방견문론」을 기초로 세워졌다는 것과, 이후 17-18세기를 거치면서 정작 중국에 직접 와 보지도 않았던 영향력 있는 문필가들에 의해 중국은 ‘신비로움’의 상징에서 ‘경멸’과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18세기 영국의 다니얼 디포(Danial Ddfoe)가 발표한 「로빈슨 크루소」는 중국의 긍정적인 측면은 모조리 부정하고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러한 풍자는 이후 중국에 대한 유럽의 우월감을 고취하고 종내 아편전쟁과도 같은 무력침공을 가능케 하는 인식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본서를 읽는 독자 가운데 일부는, 중국과 같은 아시아에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서양인들의 일방적인 인식에 분노할지도 모른다. 또 그러한 분노가 부당하고 볼 수만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굴절현상이 반드시 서구인들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서를 읽은‘는 독자 가운데, “그렇다면 중국인의 서구 인식은 어떻게 변화했는가? 한국인의 서양인식은?…”과 같은 물음과 그 답변을 위한 새로운 탐구의 여행이 시작될 수만 있다면, 앞서의 ‘분노는 곧 깨닫게 될 ’부끄러움‘으로 곧 불식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조영헌 | 서울대 동양사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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