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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4.20  통권 69호  필자 : 전순동  |  조회 : 3840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의 한 장면]
“봄이 와도 봄 같이 않구나”
-흉노에게 시집간 비련의 여인 왕소군-

중국의 역사는 북방의 유목민족 대 남방 농경민족의 계속적인 대립투쟁사라고 할 만큼, 언제나 북방민족과 대치되어 있었다. 진한대의 흉노, 위진남북조시대의 오호(흉노 · 선비 · 저 · 강 · 갈), 수당대의 돌궐, 송대의 거란 · 여진, 원대 몽고의 중국 지배, 명대의 타타르와 오이라트, 청대 만주족의 중국 지배 등이 그것이다.

특히 중국 고대사회에서 한족에게 여러 가지로 위협을 가한 북방민족은 흉노적이다. 한나라는 흉노와 약 400여 년 간 대립을 계속하여 오는 동안, 흉노의 세력이 강할 때에는 화친정책, 약할 때에는 강경책을 쓰면서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화친정책이란 흉노에게 비단과 곡물 등을 보내고, 황실의 공주를 흉노의 왕, 곧 선우(單于)에게 시집보내면서 흉노를 도닥거리는 유화책이다.

기원전 3세기 말 흉노는, 이전의 분산적인 여러 부족 상태를 벗어나 군주인 선우를 정점으로 한 정치적 통일 체제를 조직하고 흉노왕국을 건설하면서부터 강성하여졌다. 흉노왕국은 특히 묵돌(冒頓) 선우 때 세력을 크게 떨쳐 한나라에 위협적인 존재로 등장하였다. 한 고조는 이러한 위협을 막기 위하여 흉노 원정을 단행하였다가 도리어 산시(山西)성 따통(大同) 부근의 핑청(平城)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시기도 하였다. 이후 한은 흉노에 대하여 화친정책을 취하여 왔다.

통일제국을 건설한 한 무제(B.C. 141~B.C. 87)는 흉노 토벌에 적극적이었다. 흉노를 회유하는 것은 중화제국 황제의 위신과 자긍심을 손상시키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한 무제는 흉노 원정을 서막으로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단행하여 주변 각국을 지배하였다. 위청, 곽거병 등을 보내어 흉노 정벌을 시작하고, 흉노와 적대관계에 있던 서역국가와 동맹을 맺기 위하여 장건을 대월지국에 파견하는 등 주변 정복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 결과 흉노는 동서로 분열되고 말았다.

그러나 무제가 죽은 이후 동흉노가 호한야(呼韓邪) 선우의 지도하에 다시 세력이 강성해지자, 한나라는 화친정책을 펴 이들에게 궁녀를 보내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왕소군(王昭君)의 일화는 바로 이러한 화친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왕소군은 중국 전한(前漢) 원제(元帝: B.C. 49~ B.C. 33)의 후궁으로, 이름은 장(檣 또는 牆)이고, 자가 소군이다. 남군(南郡: 오늘날 후베이(湖北)성 티꾸이(稊歸)의 양가집 딸로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후궁에는 많은 아름다운 궁녀들이 있었는데, 원제는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올리게 하여,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여인을 골라 총애하였다. 궁녀가 천자의 총애를 받고 못 받고는 화고으이 손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궁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을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미녀이지만 언제나 추녀로 그려져 끝내 천자의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B.C. 33년 호한야 선우가 수도 장안으로 들어와 천자의 사위가 되기를 청원하였다. 원제는 흉노족과의 친화를 위해 그의 청을 승낙하였고, 늘 추녀로 그려져 올라오던 왕소군을 지명하여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하직 인사를 하러 나온 왕소군을 보니 절세미인인데다가 행동거지 하나 하나가 모든 후궁 중 으뜸이었다. 원제는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약속을 어겨 흉노의 노여움을 살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뜻밖에 절세미인을 맞게된 호한야 선우는 좋아 어쩔 줄을 모르고, 왕소군은 눈물을 흘리며 정든 궁궐을 떠나는 비련의 여인이 되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왕소군은 미모가 수려하고 재기(才氣)가 있어 중국 4대 미인 중의 하나로 꼽힌다. 4대 미인이라 하면, 춘추말기 월(越)나라의 서시(西施), 한 헌제 때의 초선(貂蟬), 당대의 양귀비(楊貴妃), 그리고 왕소군을 말한다. 궁궐을 떠나 호한야와 함꼐 말을 타고 흉노의 땅으로 가는 도중, 왕소군은 멀리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향 생각이 물밀 듯 밀려와 가지고 있던 비파를 타자, 아름다운 미녀의 비파 소리에 매혹된 기러기들이 그만 날개 젓는 것을 잊어버려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날아가는 기러기가 반하여 떨어질 정도로 아름다움이 대단하다고 하여 왕소군은 낙안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다.

왕소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에게 출가하여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러나 결혼 2년 만에 남편이 죽고 호한야와 전 왕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그 뒤를 이어 선우가 되었다. 흉노의 풍속에는 아버지가 죽으면 그 아들이 자기 생모 이외의 아버지 처첩을 자기 아내로 삼는 특이한 풍속이 있었다. 유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야만적이라 할지 모르나, 이동을 예사로 하는 유목생활에 있어서는 여자나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책임자가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왕소군은 흉노의 관습에 따라 그의 왕후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왕소군의 일화는 『서경잡기(西京雜記)』라는 책의 기록에 의한 것인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세에 내려오면서도 윤색되어 전해져왔다. 왕소군은 후대에 시와 희곡 등 많은 문학작품과 연극의 소재로도 취급되어 왔다. 훗날 시인 이백은 흉노의 땅에서 장안의 봄을 그리워하는 왕소군의 애틋한 심정을 대신해서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라는 시를 지어 읊었는데, 이것은 오늘날도 사람들에게 많이 인용되는 말이다. 원명시대에도 희곡으로 각색되었으며 그 중 원매 마치원의 희곡 <한궁추(漢宮秋)>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한편 왕소군이 출가하게 된 배경에는 화공 모연수가 나라를 걱정한 나머지 꾸며낸 술책이라는 설도 있다. 왕소군의 빼어난 미모에 놀란 모연수는 가뜩이나 여색에 빠져있는 원제가 그녀로 인해 국가의 정사를 그르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일부러 그녀의 초상을 추하게 그려 올렸다는 것이다.

네이멍구(內蒙古)의 민간 설화에는, 왕소군이 흉노족에게 시집간 후 그곳의 낙후된 유목민 풍속을 개혁하고 농업 생산량을 증대하는 일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전하여진다. 백성을 사랑하고 흉노 여인들에게 길쌈, 재봉, 농업 기술 등을 가르쳐 크게 존경받았다는 것이다. 흉노가 한나라로부터 받아들인 농업생산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부족한 식량문제를 기본적으로 해결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한서』흉노전에도 그녀에 대하여 ‘영호연지(零胡阏氏)’라 기록하고 있는데, ‘흉노(胡)를 편안하게(寧) 한 왕비(阏氏)’라는 뜻이다. 즉 왕소군이 흉노를 달래면서 한나라에게 큰 도움을 준 인물로 인식되고 있어 중국인들이 이러한 칭호를 사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왕소군은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시신을 귀화(歸化: 오늘날 네이멍구 자치구 후허하오터(呼和浩特)에 묻되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고, 자식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후허하오터에 묻었다고 한다. 현재 후허아오터시 남서쪽 6Km 지점 대흑하 남단 대청산 기슭에 왕소군의 묘소가 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여름 한철만 잠시 수풀이 자라나는 한랭 건조한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무덤엔 사시사철 풀이 무성하여 사람들은 그녀의 무덤을 ‘청총(靑冢)’이라 부르고 있다.

한과 흉노 사이에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된 비련의 여인 왕소군의 이야기는 청나라 시대까지 이민족의 침입에 시달려 온 중국인의 가슴 속에 지금도 간직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드라마틱한 슬픈 이야기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이민족과의 전쟁과 화친이 국가의 존망에 이어지는 상황에서 발현된 애국심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중국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순동/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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