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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4.20  통권 69호  필자 : 홍대위  |  조회 : 2450   프린트   이메일 
[선교사의 삶과 사역]
평생 꾸지 않은 넉넉한 삶

홍대위(洪大䘙) 선교사는 17세에 예수 믿고, 20세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40여년 간 그 곳에서 선교하며 복음전도와 교회 부흥에 헌신하다가, 조국 광복 후 귀국하여 팔십 고령에 이르기까지 활약을 하였던 교계 원로였다. 그는 선교사로 일하면서 ‘만유를 나의 것으로 상속해주신’ 하나님이 우리 일상 생활에 가까이 계시는 사실을 세상에 넉넉히 입증한 분이다 그의 간증은, 남에게 꾸거나 구조를 요청하는 손을 내밀어본 일이 없이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고아사업, 선교사업, 문서전도 사업을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음으로 해낸 영국의 조지 뮬러 목사를 기억나게 한다. 이 글은 홍대위 목사가 쓴 『구원(救援)의 진수(眞髓)』 중에서 일부 인용한 것이다.

“내 재산의 규모는 나도 모른다네”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뇨?』(롬 8:32)

아들이 귀한가, 만물이 귀한가? 아들도 아끼지 않았거든 하물며 만물을 아낄소냐? 또 주님이 무엇이든지 구하라 하셨으니 우리가 구하여 얻지 못할 것이 없다. 만물의 소유주가 우리 아버지요 우리는 그의 후사라 당당히 달라고 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만물은 곧 우리의 소유가 된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직하신 것 뿐이다.

필자가 중국에서 전도할 때 어떤 중국 신자가 묻기를 “목사님 재산이 얼마나 됩니까?” 한다. 나는 그에게 반문하기를 “자네 생각에는 얼마나 되어 보이는가?” 하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백 석 추수하십니까? 했다. 그 때 나는, “좀 더 한다네.” “한 이백 석 하십니까?” “자네는 백자만 아나?” “아! 그러면 한 천 석 하십니까?” “천 석도 더 한다네” 그러면 한 오천 석 합니까?” “한 줄 더 올라가 보게” 하였더니, 그는 내가 실없는 농담이나 하는 줄로 생각하며 “그럼 만 석 하신단 말이요?” “만 석도 더 한다네” 하니 그는 못마땅하는 듯 “실없는 말이올시다” 한다.

나는 정색하고 말하기를, “누가 그대와 실없는 말을 하겠는가? 나는 목사인데, 목사가 교인과 실없는 말을 하는 법도 있는가?” 하였더니, 그는 다시 묻기를 ‘그러면 도대체 몇 십만 석이나 하십니까?” “나도 자세히는 알 수 없어.” 아니 대강도 모르십니까?” “이 사람아, 하나님의 소유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겠는가?” 하니 그는 “아! 그 말씀이로구먼요” 하며 비웃는 기색이다. 나는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그 말씀이라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람의 말이면 혹 잘못된 말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가리켜 자기의 후사라 하셨고, 당신의 소유가 다 우리의 소유라 하셨다.”고 하였다.

근일에 소위 신자라 하면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예비하신 만물을 우리 후사 된 자가 누리지 않으면 누가 누릴 것인가? 우리가 누리는 것이 정당하다. 또 천부께서 기쁘게 주신다. 우리는 주 안에서 부요한 생활을 하자.

필자는 가난한 집에 태어났기에 주님을 믿느나고 해도 재산에 대한 욕망이 컸던 자이다. 그러나 재산은 얻지 못하고 궁핍하고 곤고한 생활을 하였었다. 궁핍 중에도 우환질고가 떠나지 않았으며 항상 불평과 비관으로 불신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해왔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대한 신념이 생긴 후부터 비로소 궁핍과 곤가가 없어졌으며, 오늘까지 낙관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무슨 재산이 많아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재물의 주인인 ‘예수’를 얻은 탓이다. 내가 그의 후사가 된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나는 타인에게 금전을 꾸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나의 천부께 구한다. 어떤 때는 십전, 이십 전도 구하였고 때로는 백 원, 이백 원도 주셨다. 나의 필요에 한 번도 부족한 적이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주님이 주신 기사 이적을 일일이 간증할 수 없으나, 필자의 평생에 제일 먼저 받은 표적 한 가지와 제일 최우에 받은 기사를 간증하려 한다.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채우시다
30년 전 필자가 중국 산동(山東)성 교주(膠洲)에서 전도할 때의 일이다. 그 때 나의 모친은 강원도 평창에 계셨다. 하루는 모친께로부터 편지 오기를, 나의 딸을 귀국시키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여식이 15세라 중국 교육을 받아 가지고는 본국인에게 출가하기가 어려울 터인즉 차라리 본국에 와서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또 모친의 슬하가 적적하니 모친이 데리고 공부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과연 지당한 말씀이었다. 뿐만 아니라 딸의 친모는 일찍이 별세하였고 지금 계모 슬하에 있는 것보다 조모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되어 귀국시키기로 결정은 하였으나 여비가 문제였다. 중국 청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상륙하고 인천에서 다시 기차로 서울에 와서 서울서 버스로 평창까지 가려면 당시의 돈으로 50원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나의 수중에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그러나 나의 수중에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다.

그 날 저녁에 나는 이 사정을 나의 주님께 고하고 돈 50원을 구했다. 그 이튿날 새벽에 스트럭(Miss Struck)이라는 여선교사가 기도하러 왔다. 그는 독신 선교사로 필자와 동역하는 사람이다. 가끔 필자의 서재에 와서 함께 기도하곤 했는데, 그날은 특별히 일찍 왔다. 기도를 마친 후에 편지 한 통을 내어놓으며, “내가 돌아간 후에 뜯어보십시오.” 하고 나간다. 필자는 곧 그 편지를 뜯어보았다. 그런데, 그것은 편지가 아니라 10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었다.” “아니! 여보시오, 이것은 펴지가 아니라 돈이외다 그려!”

그는 “내가 간 뒤에 보시라니까요.” 한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돈이요?” 하니, 그는 말하기를, “나도 모르겠어요. 내가 어제 저녁에 침대에 드러누워 생각을 하니 나의 수중에 돈 백 원이나 여유가 있어서 이것으로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하였더니 목사님께 드릴 생각이 났어요. 목사님은 아이들도 많고 생활에 곤란이 많을 듯 했어요. 그러나 이렇게 많은 돈을 다 드릴 필요가 무엇인가 하여 드릴까 말까 하다가 밤이 새도록 잠을 잘 못잤지요. 오늘 새벽에야 결정하기를 절반은 목사님께 드리고 절반은 다른 일에 쓰는 것이 좋을 듯 하여 그 절반 50원을 가지고 온 것이외다. 나도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한다.

그 말을 듣는 필자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제 저녁에 돈 50원을 주님께 구한 일이 있습니다.” “무슨 급한 용도가 있었던가요?” “네, 어제 저희 어머님 편지에 내 딸을 보내라 하시기에 그 여비를 계산하니 꼭 50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간구하였지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러면 그렇지!”란 소리를 연발한다. 그리고는 아무쪼록 안심하고 잘 쓰라고 부탁하고는 가버렸다.

이제 여비가 되었으니 떠나보낼 준비를 하게 되었다. 며칠 후에 청도항에서 배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배 떠나기 전 날 청도로 데리고 가서 배를 태워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딸을 데리고 기차에 올라앉아 청도로 가는 도중, 교주에서 청도까지는 약 백 리 정도라 차 안에서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여비를 잘못 계산한 것을 깨달았다. 50원이란 여비는 청도로부터 평창까지 가는 여비요, 나의 주소 교주에서 청도까지의 여비는 생각지 못하였다. 그 차비는 1인당 1원이니 두 사람에 2원이요, 또 청도에 도착하는 즉시로 승선하는 것이 아니라 여관에서 1박하고 내일 승선하게 되니 여관 숙박료가 또 1인당 1원씩이요, 내가 돌아갈 차비가 1원이니 도합 5원이 부족이다.

너무도 답답하여 딸에게 “얘! 너의 여비가 5원이 부족이로구나.” 하니, 그는 얼른 대답하기를 “청도에 가서 꾸세요.” 한다. 나의 딸은 말재주도 없고 애교도 없는 아이였다. 나는 “얘야! 나는 평생에 돈 꾸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니 그는 눈물이 글썽글썽하며 “그럼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을 한다. “얘야! 우리 기도하자, 응? 하나님께 달라 하자!” 하니 픽 웃는다. 웃거나 말거나 나는 엎드려 기도했다. 기도를 하고 나서도 아무 동정(動靜)이 없다. 기차는 칙칙폭폭 달려만 간다. 얼마 후에 성양(城陽)이란 역에 와서 정거한다. 이 때 마침 청도 편에서 마주 오는 열차가 들어오더니 내가 탄 기차화 홈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서게 되었다. 나는 우연히 차창을 열고 내어다 보는데 저 편에서도 창을 열고 이 쪽을 내어다보는 이가 있었다. 그는 내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의 집사였다. 필자를 보더니 “목사님, 어디 가십니까?” 한다. “네, 이번에 내 여식을 귀국시키려고 청도로 데리고 갑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더니 자기가 탄 차에서 내려서 나 있는 차장 앞으로 와서는 그의 주머니 속에서 5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너무 섭섭하니 과자나 좀 사 주세요.” 한다.

내가 그 돈을 받을 대 나의 두 눈에서 또 한 번 눈물이 흘렀다. 나의 딸도 울었다. 어린 소견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기묘하다는 것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 청도 항구에서 딸을 배를 태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1전도 부족함이 없고 또 남지도 않았다. 이러한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큰 돈이라도 나는 기도한다
최후로 된 일 한 가지만 또 간증하려 한다. 1948년 봄에 중국 상해(上海)에 있을 때다. 하루는 만주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백리언(白理彦) 목사의 편지가 왔다. 내용인즉 지금 봉천에 우리 한국인 교역자와 가족 약 500명이 있는데 공산당이 불원간 봉천을 함락시킬 전망이나, 철로와 항공이 다 끊어져버려 우리 500명의 교역자와 그 가족의 살 길이 막연하니 무슨 구원 방책이 없겠는가 하는 편지였다. 그 때 마침 미국 선교회에서 수송기 한 대를 상해 선교부에 보내온 것이 있었다. 이 비행기는 당시 중국 공산당의 동란으로 인하여 교통이 끊어져 조난 당하고 있는 중국 각지의 선교사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파송된 것이었다.

필자는 이 비행기를 빌리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비행기 관리자를 찾아가 교섭을 했으나 좀처럼 허락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의 권능으로 필경은 이 비행기를 가지고 봉천으로 가게 되었는데, 적어도 당시 화폐로 200만원이 들어야 하니 비용이 큰 문제가 되었다. 비행기 떠날 날짜는 내일 새벽으로 박두했는데 오늘 저녁까지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평생에 누구에게서 돈을 꾸지 않기로 결심했으므로 다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만 구했다. 그랬더니 그 날 밤 10시경 취침하려 할 때 어떤 중국 친구가 돈 200만원을 가지고 오지 않겠는가! 해서 우리는 그 이튿날 무사히 떠나게 되었고, 봉천에 가서 500명의 교역자와 가족을 전부 실어다가 중국 천진까지 옮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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