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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20  통권 68호  필자 : 전순동  |  조회 : 3890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의 한 장면]
진(秦)의 상징물 만리장성, 과연 나라를 지켰는가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이룩할 때, 인류가 만든 건조물 가운데 가장 마지막까지 육안에 들어오는 것이 중국의 만리장성리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도 중국을 소개할 때면 으레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하여 방영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만큼 만리장성은 위엄있는 중국의 상징물이 아닌가 싶다.

베이징(北京)에서 서북쪽으로 약 70㎞ 떨어진 곳에 있는 높이 8.5m, 폭 5.7-6.5m의 바다링(八達嶺: 팔달령) 장성 성벽, 거무스레한 벽돌과 1,015m 정상에 오르는 40분의 계단, 그리고 발 아래 굽이굽이 펼쳐지는 산준령 물결의 장관들. “장성에 올라가 보지 않은 사람을 어찌 사나이라 할 수 있으랴”라는 입구의 문구 때문인지,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베이징을 방문하는 이는 누구나 찾아가는 관광의 명소가 바로 만리장성이다.

그런데 혹 실망할지 모르나 현재의 만리장성은 진시황제 때의 것이 아니라 대부분 명대(明代)에 축조된 것이다. 진시황제 때의 것은 현재의 것보다 훨씬 북방에 있었는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자취를 볼 수 없고 극히 일부 지역에 옛 유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자 곧 동시에 거대한 만리장성을 처음 쌓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시황제는 기원전 221년 전국시대의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 후, 도량형·문자·수레바퀴 등을 통일하고 이어 만리장성도 쌓아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실은 진시황제가 처음 장성을 쌓은 것이 아니다. 그때까지 있었던 성을 연결하고 보강하여 보다 견고한 방위선으로 만리장성을 구축한 것이다. 이미 기마전이 널리 보급되고 있었던 전국시대에, 각 나라는 대립항쟁과 북의 흉노족 방어를 위해 성 쌓기가 활발하였다. 이를테면 제(齊)나라는 이미 기원전 5세기에 남방에 장성을 쌓았고, 초(楚)나라도 기원전 4세기에 진에 대항하여 성을 쌓았으며, 연(燕)·조(趙)·진(秦)나라의 경우도 여러 제후국 및 북방 유목민족의침입에 대비하여 장성을 쌓고 있었다. 결국,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시황제가 통치의 원활함을 위해 전국시대 내지에 있는 여러 장성은 철거하면서 북방에 있는 각 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수축하게 된 것이다. 비록 기존에 있었던 성벽을 연결하였다 하더라도, 동서로 이은 긴 만리장성은 참으로 엄청난 대 역사였다.

이 시기의 만리장성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견고하고 검은 쥐색 계통의 벽돌과는 다르다. 벽돌로 된 것이 아니라 판축(版築)이라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양쪽에 판자를 세워 그 사이에 흙을 채워 넣고, 약간의 물기를 가미하면서 봉으로 찧어 단단히 굳혀 쌓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의외로 견고한 성벽이 되는데, 장성이 있는 지역은 남방처럼 우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해도 충분히 견디어낼 수 있다. 닝샤(寧夏)·네이멍구(內蒙古)·허베이(河北)에 잔존한 것을 보면, 산의 기복에 따라 산 위에서는 돌을 쌓았고 평지에서는 흙을 쌓아 다진 판축 형태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동쪽 요동(遼東)에서 서쪽의 간쑤(甘肅)성 린타오(臨洮)까지 길게 쌓은 이러한 수축공사는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흙을 운반한다든지, 판자를 세워 흙을 쌓는다든지, 돌을 운반하는 등 실제 수축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의 노역은 참으로 힘든 과정이었다. 그들이 좋아서 한 일이 결코 아니었으며, 정부의 부역에 징발되어 부모가 처자식을 떠나 공사장에 끌려와 삭풍을 맞으며 강제노동에 임한 것이다. 공사 감독관은 동원된 인부를 마치 노예처럼 취급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성을 쌓던 인민들은 고혈을 흘리며 지쳐 쓰러지고 때로는 끝내 현장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하였다. 진시황제가 분열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함으로써 중국 역사의 영웅이며 중국 민족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위대한 황제로 평가되면 한편, 만리장성 등 대 토목공사를 통해 인민의 고혈을 짜낸 잔학한 군주로서 평가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만리장성 축조에 얽힌 얘기로는 맹강녀(孟姜女)의 전설이 유명하다. 맹강녀는 범기량(范杞梁)의 처이다. 제나라(지금의 산동성)에 살고 있던 범기량은 당시 만리장성 축조공사에 징용되었다. 지금의 장성보다 백여km나 더 먼 북쪽 지방에서 성을 쌓고 있었으므로 겨울의 추위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맹강녀는 남편을 위해 따뜻한 겨울옷을 한 벌 지어 가지고 남편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약한 여성의 몸으로 그 어려움이 오죽 하였으랴, 산 넘고 물 건너며 모르는 길 묻고 물어 마침내 오랜 여정 끝에 공사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오랜만에 남편을 만날 기쁨에 가슴 벅차 있던 맹강녀에게 안겨진 소식은 남편이 이미 죽었다는 슬픈 소식이었다.  그녀의 슬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슬픔을 가눌 수 없었던 그녀는 남편의 유해라도 보길 원하였으나 그것조차 찾을 수 없었다. 비통함에 쌓인 그녀는 넋을 잃고 성벽 밑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였는데, 그때 높은 성벽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남편의 유해가 나타났다는 이야기이다.

어디서부터 믿고, 어디서부터 믿지 말아야 할지…. 사실, 남편을 잃은 아내의 눈물이 성을 무너뜨린 이야기는 이미 춘추시대부터 있어 온 이야기이나, 장성 축조가 얼마나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는가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전설로 각색된 것이라 생각된다. 만리장성의 축조와 관련된 맹강녀의 전설은 중국에서 줄곧 연극의 소재가 되어 각 시대마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려온 유명한 이야기이다. 맹강녀의 전설이 여러 형태의 이야기로 존재하듯이, 맹강녀 역시 한 사람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장성축조는 수백, 수천 명의 맹강녀를 탄생시켰을 것이며, 이 전설은 곧 통치자의 압정(壓政)에 대한 백성들의 한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북쪽 흉노족(匈奴族)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동에서 서쪽 간쑤성 린타오에 걸쳐 있는 거대한 만리장성은 진의 상징물, 아니 중국의 상징물로 보기에 충분하며, 이것은 또한 진신황을 전제군주의 위대한 권력의 화신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만리장성의 완성으로 진은 중국통일의 과업에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거러면 과연 미증유의 대 장성을 축조한 진은 그것으로 나라를 지켜나갔는가? 급격한 통일 정치, 분서갱유(焚書坑儒) 등 엄한 사상통제, 빈번한 외정과 대 토목공사 등은 도리어 진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시황제가 죽은 지 3년 후, 마침내 진승(陳勝)고 오광(吳廣)을 중심으로 한 학정에 저항하는 민중 반란으로 말미암아 진나라(기원전 221-206)는 통일 후 2대 1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높고 견고한 만리장성이 외적의 침입은 막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나, 내부의 반란은 결코 막지 못하여 진은 결국 단명왕조로 끝나고 만 셈이다.

오늘날의 장성을 웅장하고 튼튼하게 쌓았던 명 왕조도 결국 안에서 일어난 이자성 군대의 침입을 막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다. 이자성 군대가 선부[宣府, 지금의 장자커우(張家口)]로부터 남하하여 장성을 넘어 올 때, 장성에 많은 군대와 수비병, 감시병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 하나도 경계를 알리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자성 군대가 베이징 성문에 들어올 깨까지 자금성의 황제와 그의 측근들은 결코 알지 못하였다고 하니, 명조는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결국 망하게 된 것이다.

높고 웅장한 장성도 결코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며, 나라를 지키는 것은 오직 백성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장성이라는 것을 현존의 만리장성이 오늘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중국사) 교수



미니 상식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姓氏)는?

13억의 중국인 성씨를 조사한 결과, 현재 중국에는 1,459가지의 성씨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중 가장 인구 수가 많은 성씨의 1위는 왕(王)씨로 무려 98,793,500명이나 된다. 그 다음으로 리(李), 장(張), 류(劉), 천(陳), 양(陽), 저우(周), 황(黃), 자오(趙), 우(吳) 등의 순이다. 2위인 쏭(宋)씨만 해도 1천만 명이 넘으며, 가장 수가 적은 성씨인 웨이(巍)씨는 1,040명이다. 중국에서는 같은 성씨의 인구가 이처럼 많기 때문에 호적이나 치안 등의 관리에 막대한 곤란을 초래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한(武漢)시의 장잉(張英)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과 베이징(北京)시의 왕잉(王英)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각각 1,200명 정도 된다. 만약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고 역시 이름자에 많이 쓰이는 瑛, 映, 塋 등까지 합치면 장잉과 왕잉의 이름을 가진 사람 수천 명이나 될 것이다.

<베이징저널 제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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