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낯선 땅
안식년을 맞아 막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당장 내일부터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이 시간을 통해서 선교지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채워야겠다는 욕심이 앞섰다. 인사하러 다니고, 여러 가지 한국 생활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촉박하고,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게 느껴졌었는데, 처음의 그 급한 생각과는 달리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우리가 너무 많이 지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쉬는 것이었다. 건강을 위한 휴식도 필요했지만, 멀어진 교회 생활을 회복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다. 선교현지에서는 별 무리 없이 잘 살던 사람이 한국에 돌아와 보니, 분명 내 나라이지만 재적응이 필요한 또 하나의 낯선 땅이었다. 선교지에서는 늘 쓰는 용어도 조심하고, 기도모임이나 성경공부 때 이리 저리 살피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는데, 여기서는 마음껏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으니 마치 무거운 갑옷을 벗은 듯한 자유함을 맛볼 수 있다.하지만 한국의 물질만능 풍조와 달라진 교회 분위기 등은 이곳도 역시 무장을 풀 수 없는 곳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제 분주함이 하나씩 정돈되는 회복을 맛보고 있기에, 남편에게는 7년만이고, 내게는 6년만인 한국의 봄이 더 찬란하고 화려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선교지에 가기까지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것도 늦봄이었다. 선교를 위한 모임의 간사로 있던 나와 남편은 우리 모임을 섬기던 총무님의 소개로 만나 결혼을 했다. 남편은 15년 전쯤 한 선교대회에서 선교사로 헌신을 하고, 직업을 갖고 선교지에 갈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없는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며, 가는 선교사가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로 진로를 수정하려는 중에 우리는 결혼을 했고, 함께 전문인선교 훈련과정에 참여했다. 그 기간 동안 남편은 전문인 선교사로의 가능성을 보면서 소망을 새롭게 했고, 나는 너무나 막연했던 선교의 모습들을 조금이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직장, 그리고 가정의 대소사를 뒤로하고 일 년 동안 그렇게 싸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헌식적으로 우리를 섬긴 간사들의 수고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동기들과의 교제,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주 더욱 확실해져 가는 부르심을 향한 확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비전트립(Vision Trip)을 다녀온 이후, 중국현지에 공장을 두고 관리자를 찾고 있던 한 회사와 연결이 되었다. 이 회사의 관리자로 파견된 남편이 일 년간 먼저 현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동안 교제하던 선교단체의 협력선교사로 위탁했고, 작은 개척교회에서 파송을 받았다. 남편은 미리 회사로부터 언어공부, 개인전도 등의 시간을 협조 받기로 하고 떠났는데, 가족과 떨어져있는 외로움, 그리고 약속과는 다른 회사의 과중한 업무 등으로 인해 언어공부나 개인적인 시간을 할애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겪어야 했다. 나도 한국에서 시어머님을 모시고 딸아이를 키우며 앞으로의 인도하심을 위해 간구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직장을 포기하기로 했고 ,우선 가족이 함께 모여서 언어 공부를 시작하기에 유리한 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기로 했다. 그 때까지 아무런 후원기반이 없던 우리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특히 무리를 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후원하고, 자비량으로 재정을 공급받으려고 생각했던 남편에게는 쉽지 않은 결단이 필요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기도하며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선교회와 의논하고 먼저 P시를 방문하여 그곳에서 언어공부 중인 같은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을 만나 교제하면서, 가족과 함께 언어공부를 하며 생활을 준비를 해나갔다.
선교사의 삶, 기다림의 연속
가뭄에 농부가 비를 기다리듯, 선교사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언어공부를 위해 P시에 도착했을 때는 겨울이었다. 추운 날씨만큼 굳은 얼굴로 우리를 맞는 공항 요원들의 표정은 긴장된 우리를 더 긴장되고 춥게 만들었다. 왕래하는 수많은 사람들, 여기 저기 세워진 고층 건물들은 분명히 이곳이 대도시임을 증명해 주었지만, 먼지와 쓰레기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는 바람은, 나뭇가지마다 온통 비닐봉지들을 지저분하게 매달아 놓았다. 마음까지 어수선해진 우리를 같은 선교회 소속의 B선교사님 가족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한국에서 보낸 다른 짐들이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이 가정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금방 도착할 줄 알았던 짐이 늦어지면서, 기다리고 기다려야 하는 선교사역의 첫 장이 시작되었다. 우리 때문에 20일 가까이 아홉 식구가 넓지도 않은 집에서 함께 지내느라 많이 불편했을텐데도, 사람 좋은 B선교사님 내외는 불편한 내색 없이 우리를 섬겨주셨고 집을 구할 때, 물건을 구입할 때도 마다 않고 도와주셨다. 그 뒤로도 B선교사님 가족은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무엇보다도 외롭고 모든 것이 낯선 선교지에서 그분들이 곁에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짐이 도착하고 안정이 되면서, 우리 부부는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 겨우 두 돌을 넘긴 딸은 유치원에 보낼 수 없어서 보모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언어를 기초부터 차분히 공부하기 원했지만, 상황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3개월쯤 지나 둘째 아이를 임신했고, 두 번째로 구한 보모도 그만두게 되어서 딸을 데리고 택시를 타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입덧이 시작되자 몸도 자꾸 지쳐서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2학기에는 학교에 등록을 안하고 다른 방법으로 공부를 계속했는데, 그러다 보니 언어의 진보가 너무 느리고, 현지인들과 만나도 마음대로, 정확하게 의사를 표현하지 못해 너무나 답답했다.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이 땅을 밟기까지 얼마나 기다렸던가. 땅을 밟는 순간부터 무엇인가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 땅에 와서도 해야 할 일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다려 주셨던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것처럼….
숨바꼭질하던 첫 해
P시에서는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이 제한되어 있었다. 외국인이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는 턱없이 비싸기 때문에, 우리처럼 가난한 선교사들은 허가되지 않은 지역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이를 안 공안들은 불시로 유학생들을 검문하고 단속했다. 방학이 시작된 이후부터는 가택 검문도 시작되었다. 계속해서 불안한 소문들이 들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가스가 떨어져서 마침 귀국해서 비어 있던 B선교사님 집에 가서 청소도 할 겸 세 식구가 하룻밤을 보냈다. 새벽에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깼는데, 이웃에 사시는 J선교사님이었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동료 선교사들의 일을 자기 일처럼 많이 도와주신다고 해서 ‘반장’으로 불리는 분이셨다. 간밤에 우리 때문에 걱정이 되어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하시며, 어떻게 알고 그 곳으로 피했는지 물으셨다. 이유인즉, 어젯밤에 공안대대가 바로 우리 아파트 한 동을 전부 수색했는데, 낮부터 아파트 입구에 몇 명이 배치되어서 한국인 학생이 살고 있는 것을 미리 확인하고, 대부분의 학생이 들어와 있을 저녁시간에 각 집을 동시에 들이닥쳤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여권을 빼앗고, 벌금을 내야 할 장소의 지도를 미리 복사해서 나눠주면서, 10일 이내에 이사하라고 했단다.
집으로 돌아와 이웃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공안이 우리 집에도 와서 앞집에 사는 주인에게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우리는 저녁에 아예 불을 켜지 않았고, 두꺼운 커튼으로 불빛을 가리고,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공안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일찍 자거나 다른 집으로 피난(?)을 갔다. 지나고 보니 우습기도 하고, 왜 그렇게 밖에 못했을까 생각도 들지만, 그때 우리는 더 간절히 하나님의 돌보심을 구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었다. 불의한 일을 위해 온 것도 아니고, 생명의 소식을 전하며 이 땅에 유익을 끼치러 왔건만, 환영은 고사하고 수색하고, 벌금 물리고, 강제로 이사를 시키는 등 어려움을 주는 이들처럼, 우리도 하늘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고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핍박하며 결국 십자가에 달지 않았던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이 거절감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실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 있었고, 감사가 흘러 넘쳤다. 공안들과의 숨바꼭질은 우리를 거룩한 긴장감 속에 있게 했다. 밤마다 온 식구가 모여 간절히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고 진로에 대해, 사역에 대해 원칙과 방향을 그려나갔다. 얼마 전에도 P시에서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곳에 살고 계신 주님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소중한 만남들
첫째 아이를 수술해서 낳았기 때문에 둘째도 수술로 출산해야 했는데, 중국의 병원비가 오히려 한국보다 비싸고 말도 안 통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어서 나는 딸 지혜와 함께 귀국했다. 그동안 남편은 2학기 언어 공부를 마치고 생활여건과 사역의 가능성을 고려하여 C시에서 합류했다. 둘째 명철이는 기후와 물 때문이었는지 열 감기와 설사로 자주 고생을 했지만 잘 자라주었다. 지혜도 유치원에서 씩씩하게 커갔다. 외국인 거주 상황도 P시보다는 조금은 융통성이 있었다. 나도 다시 학교에 등록을 해서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IMF 사태가 발생했다. 우리 가정의 재정상태도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만남들을 통해 새로운 위로와 소망을 주셨다. 처음 IMF 사태가 시작되자 지혜의 유치원비도 내기가 버거웠는데, 그때 유치원에서 원장 선생님 내외분은 우리가 C시를 떠날 때까지도 두 아이를 세심히 돌봐주셨고, 그 후로도 계속 사랑의 손길을 보내 주셨다. 우리 부부의 건강이 나빠졌을 때마다 치료해 주셨던 한의사 선생님, 그리고 그만 둔 이후에도 끝까지 명철이를 돌봐주시던 중국인 보모 아주머니 등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주신 한 분 한 분은 커다란 선물이었고, 갚을 길 없는 은혜였다.
우리는 C시에 먼저 와 계시던 A선교사님, 그리고 뒤이어 합류하신 B선교사님 가정과 함께 매주 중보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나라를 위해, 흩어져 있는 선교사들과 각자의 사역을 위해, 그리고 중국을 위해 함께 기도했다. B선교사님의 사모님도 그렇지만 A선교사님 사모님도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셨다. 넓은 마음으로 사람을 이해하시는 것, 그리고 검소한 삶, 무엇보다도 겸손하고 지혜롭게 남을 돕는 모범은 지금도 내게 큰 가르침으로 남아있다.
그런 만남들 속에서 우리 가족은 또 한 번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되었다. 남편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며 두 명의 중국인 자매가 찾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서로 중국어와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1년 정도 한국어를 배운 학생들이어서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어났다. 3개월 후부터는 성경을 읽도록 했다. 한국에는 기독교인이 많이 있으니, 한국어를 잘하려면 성경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그렇게 몇 달을 보낸 후 , 그들은 주말마다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갔다. 같이 식사하고 교제하며 나와 함께 쉬운 성경교재를 천천히 공부해 나갔다. 두 자매의 성격도 다르고 한글에 대한 이해력과 신앙에 대한 진지함도 달랐기 때문에 염려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성실히 잘 따라주었다. 유창하지 못한 우리의 중국어 실력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제자양육을 시작하게 하셨다.
또 한 걸음 디디며
이렇게 귀한 만남들 속에서 점차 안정적으로 C시에 터를 잡은 지 일 년이 다 되어 갈 때쯤, 우리는 처음 중국에 와서부터 기도하며 생각했던 Y지역으로의 이주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Y지역은 우리 가족이 중국에 오던 첫 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을 주신 곳이었고, 또 마침 그 지역을 방문하려는 단기여행팀과 연결이 되어 남편이 함께 다녀오면서, 우리가 꼭 가야 할 지역으로 다가왔다. 이듬해 여름, 이번에도 남편이 먼저 Y지역을 다녀오는 것을 시작으로 이주를 준비하게 되었다.
P시에서는 반 년 정도 숨바꼭질하듯이 살았고, 또 출산을 위해 귀국했었기 때문에 별다른 아쉬움이 없었는데, 이 년 정도 살면서 익숙해진 C시에서의 이주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어느 사이 편해진 C시에서 그냥 안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겨우 예수님을 영접한 두 자매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또 우리가 머물던 곳에는 같은 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님들이 있었고, 기후도 한국과 비슷한 곳이었지만 Y는 사정이 달랐다.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 기대와 막막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렇게 생각으로는 자주 망설이면서도 기도의 말들은 벌써 거부할 수 없는 빠른 걸음으로 그 땅을 향해 가고 있었다.
먼저 짐을 다 보내고, C시에서의 마지막 밤을 B선교사님 댁에서 보냈다. 명철이는 떠나기 며칠 전부터 또 열 감기로 몸이 뜨겁더니 떠나기 전날까지도 열이 떨어지질 않았다. 정신없이 짐을 챙기고 뒷정리를 하느라 못 느꼈는데 이제는 정말 떠난다는 허전함을 실감했다. 떠나던 날 새벽에 공항으로 가려는데, 보모 아주머니가 B선교사님 집 앞에 먼저 나와서 눈물을 흘리시며 우리 가족, 특히 명철이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셨다. 그 아주머니는 지금까지도 전화로 명철이와 지혜의 안부를 묻곤 하신다. 공항에 가니 교제하던 두 자매들이 새벽 4시부터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떠나기 며칠 전 함께 사진도 찍고, 선물도 주고받으며 다른 한국인 선교사님을 소개해주었다. 인사말도 제대로 못하고 우는 두 자매를 안아주면서 당부했다. 새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고…. 그렇게 헤어졌던 두 자매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소개했던 한국인 선교사님과 말씀을 공부하며 성장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떠난 후 자매들에게 더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훈련과 가르침을 받게 하신 것이다.
서운함 속에서 C시를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했다. 선교현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남과 헤어짐을 자주 반복하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늘 받기만 하고, 떠나고 떠나보내는 것 같은 빚진 마음이 든다. 그러나 그 빚진 마음이 나로 하여금 더 열심히 중국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원동력을 주며, 얼마든지 기다리고 참아줄 수 있는 소망을 갖게 한다. 헤어지는 일은 너무 싫고 정말 원치 않는 일이지만, 그 때마다 단순한 고통의 체험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충전을 또 한 번 경험한다. 이번 안식년을 위해 중국을 떠나올 때도 C시를 떠날 때처럼 여러 헤어짐이 있었다. 교제하던 현지인들에게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고 떠나왔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곳에 계속 있기를 원하시는지,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서 부르심을 확인하고 더 깊은 헌신으로 주님께 인도함을 받고 싶어서였다. 내게 복음의 일을 부탁하신 것은 확신하지만 내가 안주하려 하고 변화를 거부한다면 생명력을 잃어버린 채 타성에 젖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복음을 전하는 것만이 목적이 되어 가시적인 성과에만 매달려서 자기 만족에 빠질 것 같아서이다.
나는 일만 하는 종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교제하기를 즐거워하시는 하나님께서 내 시선을 집중하고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자녀로 살고 싶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며, 다른 이로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는 생의 목표를 이루기까지 하나님을 기대하며 기꺼이 나를 내맡기고 싶다. 이번 안식의 시간을 통해 다시 나를 제물로 드리며, 헌신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갖기를 소망한다.
김마리아/중국 선교사
중국 현지생활의 난점:5미음(‘ㅁ’)
중국도 이제 옛날의 중국이 아니다.물론 중국 내지에는 아직도 한국의 70년대와 같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의 도시들은 자체 경제 활성화와 외국기업의 진출로 한 달이 다르게 크게 발전하고 있다. 백화점과 같은 대형 마켓이 들어서고 있고 생활 편의시설들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선교사로서 생활하는데 크게 어려움이 없다. 오히려 오지에서 고생하는 동료선교사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런 중에도 중국의 현지 생활에 어려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5마음’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한국어로 ‘ㅁ’ 으로 시작하는 5가지 단어라는 뜻이다.
⓵ 말- 중국 선교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라면 역시 ‘말’이다. 공부하고 연습해도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외에는 ‘팅부동’(못 알아들음)이다. 중국어에 성조(음의 높낮이)가 있어 발음을 잘하지 않으면 전혀 다른 뜻이 되어 버린다. 세월이 어느 정도 해결해 주겠지만 조금은 답답하다.
⓶ 물- 중국의 상수도 시설은 낙후되어 있다. 수도꼭지를 틀면 누런 황톳물과 같은 녹물이 흘러나온다. 한번은 한국에서 진출한 정수기 판매 간부가 중국 수돗물의 오염도를 측정해 주었는데 300ppm정도가 나왔다. 식수로 사용할 수가 없어서 중국의 광천수를 받아먹는데 그것도 120ppm정도로 이것은 한국의 수돗물 수준이다. 내가 구강 피부병으로 2년째 고통을 받고 있는데 물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⓷ 먼지- 중국의 먼지는 한국까지 영향을 준다. 황하에서 일어나는 먼지가 바다 건너 한국에 사는 사람들까지 고통스럽게 한다. 이 곳 숙소에서 여름에 창문을 열어 놓으면 먼지가 들어와 하루에 세 번씩 걸레질하여도 소용이 없을 정도이다. 비염, 알레르기 등 호흡기 계통의 병으로 우리 집 아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⓸ 모기- 정말 모기 때문에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모기향을 피우고 모기장을 치고 자는데도 언제나 모기밥이 되고 만다. 마치 피부병이 든 것처럼 모기 물린 자국이 온몸에 퍼져 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 물건을 좋아하는 이상으로 중국의 모기는 한국사람의 피를 좋아하나 보다.
⓹ 마귀- 중국선교는 마귀와의 전쟁이다. 마귀가 모기만큼이나 들끓고 있다. 마귀의 역사는 이념이나 정치의 세력을 업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돈, 안일 등 달콤한 유혹으로 중국인들의 신앙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요즈음은 가장 가까이에서 인간관계를 깨트려 놓음으로써 선교를 방해하려고 하고 있다. 마귀의 전술을 쳐부술 능력은 역시 기도에서 온다. 독자들의 중보기도를 부탁한다.
_어느 중국선교사의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