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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20  통권 70호  필자 : 서승동  |  조회 : 2685   프린트   이메일 
[선교일언]
“그러하여도 나는…”
-사역과 영성

다윗의 영성
다윗, 그는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예수그리스도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왕국을 건설한 유대의 왕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다윗은 그 중에 더욱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데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깊은 곳에 늘 이런 허상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항상 거룩하여 죄가 없고, 죄와의 싸움도 없고, 그 주변의 사람들은 늘 다윗을 존경하는 사람들만 있을 것이고, 늘 감사와 감격만이 있는 그런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다윗의 모습은 전쟁에서 늘 승리하던 영웅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 깊은 곳에서 터지는 외침은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내가 잊어버린 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시 31:11-12)이처럼 고통, 근심, 버림받음, 대적들이 많음이로 인한 아픔 등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고백은 시편 31편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그의 고백 속에 담겨있습니다. 시편 어느 것을 보든지 다윗의 입술에서 고백되는 것은 아픔과 고통, 근심과 슬픔,외로움,거역이었습니다. 만약 다윗이 하루에 시편 하나씩을 기록했다면 그 아픔과 갈등과 고난의 기간은 적어도 수개월이 걸렸을 것입니다. 한 달에 한 편씩을 기록했다면 아마 적어도 십 수년에 걸쳐서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긴 세월 동안,아니 어쩌면 전 생애동안 다윗은 내면에서 죄와 싸우고,원수들과 싸우고, 아픔과 갈등과 싸워왔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러할 때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합니까?“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시 31:14)

여기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이란 다윗의 고백은 나의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는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라고 고백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영성 깊은 사람이란 외면의 화려한 승리의 삶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영성이란 그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 속에서 “그러하여도 나는”이란 고백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께로 내 마음을 향하는 힘이라고 믿습니다.

화려한 사역이 있은 후에 얼마나 허전함을 경험하는지 모릅니다. 내 내면의 갈등이 얼마나 나를 괴롭게 하는지 모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화려한 승리가 있었는데 내면에서는 말할 수 없는 갈등과 아픔이 있습니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 상황속에서 그 아픔과 갈등과 그 원수들이 없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그러하여도 나는…” 하며 내 마음을 하나님게로 향하는 것이 진정한 영성임을 경험합니다. 다윗의 경험을 나의 삶에서도 경험하게 됩니다.

사역과 영성
가끔 선교 현지의 사역자들에게로부터 이메일(E-mail)을 받습니다.그리고 동역자들과도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그런데 대부분 이런 고백을 합니다.일,사역 속에 파묻혀 있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없어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가 풍성하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데 그렇게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적 충만이란 어떤 신비로운 영적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다윗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영성이란 어떤 환상적인 경험들, 신비로운 경험들이라기보다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할 줄 아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사역 현장에서 고통스러운 일들이 계속될지라도 주님께 믿음으로 반응하는 삶, 이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영성은 교회에서,예배시간에, 말씀을 묵상할 때 나타납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은 더욱 소중한 영성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이란 어떤 삶입니까? 성령충만한 삶이란 어떤 신비적인 경험 속에 있는 것일까요? 신비적인 영적 경험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다윗이 경험했던 경험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탄식과 육체적인 고통과 어려움, 관계의 어려움과 버림받음의 느낌 등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하여도 나는…” 이란 반응을 보일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과 영성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역 현장에서 “그러하여도 나는 …”의 반응을 보이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반응 말입니다.

영성 깊은 사람이란
내 생각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기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기도하실 때 하셨던 고백입니다. 나의 원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원함도 있습니다. 그럴 때 내 원함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원함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내 뜻에서 아버지의 뜻으로의 몸부림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성령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마음이 영성 깊은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사단이 광명한 천사로 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은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에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사단의 본질입니다. 사단의 성품은 본질상 악합니다. 파괴적입니다.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따라 행합니다. 

이것이 사단의 성품입니다.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영성은 그의 성품에서 나타납니다.따라서 영성 깊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요나가 문제입니다
요나서를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질문을 먼저 생각해 봅시다.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요나 밖에 없었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요나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말씀하셨는가?

요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욘 1:1-2). 그리고 요나는 자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욘1:9).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요나가…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우리로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 요나로 하여금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도 도망하게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 4장에서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해 주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는 알았습니다.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실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그러나 그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할 수 없었던 요나, 그 요나의 문제는 바로 “나”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어떤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아 초막을 짓고 그 성읍을 내려다보면서 그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요나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악함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며 요나의 삶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박넝쿨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셔서 그늘이 지게 하셨습니다. 니느웨를 바라보던 요나의 마음이 박넝쿨로 옮겨졌습니다.

박넝쿨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 고통 중에 나의 고통을 덜어주는 박넝쿨. 아마도 요나는 그 박넝쿨이 잘 자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박넝쿨이 요나에게 유익하였기 때문입니다.요나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끼고 사랑했습니다. 박넝쿨을 인하여 요나가 심히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요나의 삶에 더 깊이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그 박넝쿨을 씹게 하셨습니다. 박넝쿨이 곧 시들었습니다. 해가 돋아 뜨거운 동풍이 불었습니다. 요나가 다시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님께 죽기를 청하였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욘 4:8)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는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제 여호와께서 요나에게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

요나는 박넝쿨을 아꼈습니다.그 이유는 자기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심지도 않았고, 배양하지도 않았지만 박넝쿨은 지금 자기에게 유익하였습니다. 자기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꼈습니다.그러나 니느웨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매우 고통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자기를 너무 아프게 하는 존재였습니다.그 래서 요나는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랬습니다. 요나의 사고방식은 “자기”였습니다. 객관적으로 박넝쿨과 니느웨의 12만 명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이 니느웨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자기의 유익”을 위하는 마음은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요나의 신앙생활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넘어서지 못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영성이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역을 얼마나 잘 하느냐 하는 영성의 문제는 은사와 달란트 문제일 것입니다. 능력과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를 받았든지, 받은대로 충성하고 사역하면 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기면 됩니다. 두 사람 다 동일한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영성은 아닙니다. 영성은 성품의 문제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과 두 달란트 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영성 깊은 사람인가? 그것은 그의 성품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에게 성품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 사역은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그 사역이 견고하지 못한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사역과 영성은 병행되어야 합니다. 성품에 기반을 둔 영성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역의 기반입니다.



서승동 | 섬김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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