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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8.20  통권 65호  필자 : 왕쓰웨  |  조회 : 2483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역 체험기]
마오(毛)주석은 희미하지만 찬송소리는 여전하다.

게삼자교회에서의 과분한 친절과 배려
중국에서 장소를 이동하면서 사역을 할 때 종종 삼자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된다. 보통 조용하게 예배만 드리고 나오는 정도이지, 교역자나 성도들과 인사를 나누거나 교제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T지역 삼자교회 양 목사와의 만남은 예외였다. 또한 그 만남 이후 양 목사 사역에 대한 지원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동역자인 장 선교사와 T지역에서 사역하던 도중,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장 선교사의 친척을 방문하여 그의 사촌 집에서 며칠 유숙하게 되었다. 마침 주일이 되어 그의 사촌이 다니는 삼자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교회는 중국이 공산화되기 전 서양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로, 전통적인 서양식의 석조 예배당이 하나 있고, 정문 입구 안쪽에 단층 목조건물 하나와 예배당 옆으로 낡은 기와집이 하나 있었다. 

원래 예배시간은 아침 10시이지만, 9시 반에 도착해보니 이미 본 예배당과 정문 입구 쪽의 목조건물인 소예배실까지 물샐틈없이 사람들로 가득하였다. 우리가 교회 마당에서 서성이자 예배 안내를 맡은 어느 중년 부인이 우리를 본당으로 안내하였다. 우리가 본당에는 자리가 없다고 말을 했는데도 그녀는 우리 보고 따라오라고 하였다. 우리 셋은 본당으로 들어갔다. 본당에는 예배가 시작되기 전 준비 찬송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본당 중간 정도까지 들어간 그녀가 우리에게 손짓하였다. 뒤에서 우리가 망설이자, 웃는 얼굴로 앞으로 오라고 계속 소리를 내어 부르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통로 쪽 보조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뚫고 어렵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우리에게 안내한 좌석은 이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자매는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을 그 앞 뒤쪽으로 끼어 앉게 하고는, 우리를 원래 그 세 사람이 앉았던 의자에 앉게 하였다. 얼마나 미안한지 우리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는 말과 또한 예배 안내를 한 그 중년 부인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하였다. 앉으면서 왜 그렇게 미안하고 황송하던지…. 조금 있다가 나는 왜 그녀가 우리에게 이런 과분한 친절을 베풀었는지,  혹시 우리가 외부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나 잘 알 수 없었다. 

10시 정각에 찬양 인도자는 진행을 사회자에게 넘겨주고 성가대 석에 앉았다. 전체 예배는 일반적인 예배와 다름없이 진행되었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날의 설교자였다. 설교자는 키가 작고 스포츠 머리형의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교역자였는데,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에 관한 설교를 하였다. 강해설교 방식을 통해 예수와 신자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전하였다. 전체 설교는 성경내용에 매우 충실하면서도 쉽게 예수와 신자와의 연관성을 해석하였다. 매우 감동적인 설교였다. 설교를 듣는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많이 “아멘”하고 화답하였다. 중국의 삼자교회에서 들었던 설교 가운데 아마 가장 많이 “아멘”을 하였던 것 같다. 설교는 1시간 반 정도 이어졌다.
 

양  목사와의 만남
예배를 마치고 난 후 우리는 예배당 출구에서 다시 그 안내자를 만났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느 노인을 모시고 왔다. 그분은 우리를 보자마자 “저는 이 교회의 양 목사입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하여 우리를 당황하게 하였다. 이 때 장 선교사의 사촌이 “저의 사촌 형제들입니다.”라고 하였고, 우리가 아무 대답이 없자 양 목사는 안내자에게 목사 사무실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다. 

예배당에서 나와 교회 마당을 거닐면서 나는 장 선교사에게 그냥 가자고 하려는데 그가 먼저 나에게 작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양 목사와 교제해 보죠. 그의 눈을 보니 무엇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나는 두 말 않고 장 선교사를 따라 목사 사무실로 갔다. 

양 목사는 20분이 지나서야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같은 방에서 사무를 보고있던 사람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였다. 양 목사는 그 사람이 나가자 문을 걸어 잠그고 초록색 보온병 뚜껑을 열면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컵에 더운 물을 부어주면서 차를 마시라고 권하였다. 양 목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어디에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장 선교사는 “남쪽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양 목사가 대뜸 “홍콩입니까? 타이완입니까?” 물었다. 나는 양 목사가 우리가 해외에서 온 것을 알고 있으며, 단순한 호기심에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깊은 대화를 하기 위해 질문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홍콩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양 목사는 우리에게 자신의 교회 상황을 설명하면서 간간이 우리가 목사인지, 어느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지, 또 중국에서 어떤 사역을 하며, 어떤 사역을 할 계획인지 등을 조심스레 묻곤 하였다. 그의 질문에 정확하게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아도 양 목사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물었던 질문에 재차 묻지는 않았다. 우리가 대화를 하는 동안 밖에서 문을 당기는 소리가 자주 들려 왔고, “왜 잠겼지?”라는 말도 들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문을 힘차게 두드리면서 “양 목사님 계십니까?”, “안에 누구 없소?”라고 하였다. 양 목사는 더 이상 앉아있기가 힘든지 우리에게 저녁시간을 물어왔다. 저녁 조용한 시간에 다시 만났으면 하는 것이었다. 장 선교사는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하였다.
 

“마오 주석 만세(毛主席萬歲)”
밖으로 나와 마당을 거닐 때 나는 예배당 돌벽 위쪽에 무엇인가 글씨가 쓰여진 것을 발견하였다. 장 선교사와 양 목사가 교회 입구 쪽으로 가는 동안 나는 벽에 쓰여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글씨를 애써 식별하느라 계속 서 있었다. 양 목사는 내가 한 자리에 서서 돌벽 위쪽을 계속 바라보자 내게 다가오면서 “저거 무엇이라고 썼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는 “마오 주석 만세(毛主席萬歲)”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유심히 보았는데 희미하게 “마오 주석 만세”를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양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문화대혁명 때, 원래 우리 교회의 이름이 쓰여 있는 예배당 벽 그 자리를 망치로 쳐서 교회 이름을 뭉개고, 그 자리에 “마오 주석 만세”라고 새로 새겨 넣었습니다. 그 후 저희 교회는 정부의 창고와 회의장소로 변했지요. 개혁개방 이후 이 지역 신도들이 정부에 예배당 반환을 신청해 정부가 허락하여 기독교 신도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몇 년 뒤 교회 청년들이 사다리를 가지고 와서 “마오 주석 만세”라고 새겨진 저 돌벽을 다시 망치로 뭉개 다섯 글자가 보이지 않게 하였습니다.”

나는 정부 관리들이 교회 청년들의 행동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양 목사는 “별로 개의치 않아요.”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교회 출구 쪽으로 나가면서 계속 “마오주석 만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희미하였다. 마침 예배당에서 누군가 찬송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때 마음속으로 “마오 주석은 희미하지만 찬송소리는 여전하다.”고 되뇌었다. 누군가 그 때의 나를 보았다면 분명 발걸음이 힘차고 당당했으며, 내 얼굴에서 승리의 환희를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양  목사의 옛일 고백
우리가 다시 양 목사의 교회를 찾은 것은 저녁 8시경이었다. 양 목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탁자에 땅콩과 호박씨, 사탕, 과자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우리가 의자에 앉자 양 목사는 초록색 보온병을 들고 컵에 더운 물을 따라주면서, 낮에 대접을 소홀히 해서 죄송하다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옛일을 고백하기 시작하였다.

양 목사는 젊었을 때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동료 교사의 권유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는 교사 일에 만족하였으며, 주일에만 교회 나가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되자 그는 기독교 신앙이 새삼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자주 교회 출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목사와 신앙상담도 즐겨하였고, 기독교에 관한 서적도 많이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목사의 추천과 입학수속을 마치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문제는 신학교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양 목사는 신학교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정치사상 교육과 반제국주의 교육을 강화하는 것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한번은 교수에 대한 비판대회를 열었는데, 그 때 모든 이의 존경을 받는 교수가 일부 당의 지령을 받은 학생에 의해 무참하게 비판과 모욕을 받았다. 더 충격적인 일은 후에 자신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교수를 공개적으로 비난을 한 것이다. 양 목사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혐오스러워 그 후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냈다. 항상 기도와 성경읽기에 열심이었는데 그러한 생활도 중단하였다. 그러다가 그럭저럭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양  목사의 목회활동 재개
신학교 졸업 이후 그는 잠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였으나, 대약진 운동 이후에는 아예 공장 노동자로 살기 시작하였다. 1980년 이전 양 목사는 자신이 기독교인이며 신학공부를 한 일을 숨기며 살았다. 그 때까지 그는 신학교에서 받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러던 어느 날, 공장 간부가 그를 부르더니 종교사무국에서 간부가 이야기를 하자는 말을 전했다. 그는 별 부담 없이 간부 사무실에 갔는데, 종교사무국 간부로부터 엄청난 제의를 받았다. 종교사무국 간부는 그 지역에서 기독교 신도로부터 옛 예배당을 돌려줄 것을 요청받았으며, 당과 정부에서는 예배당을 기독교 신도들에게 돌려주기로 했지만, 문제는 예배당을 운영하고 예배당 내에서 예배활동을 주관할 수 있는 목회자가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역 주민들 가운데서 적절한 인물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리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양 목사가 신학을 공부한 경력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결국 그를 찾아내었다. 양 목사의 소재를 파악한 후 그의 공장에 와서 그의 당안(黨案: 중국 인민들의 모든 인사기록이 담긴 서류)을 확인한 결과, 그가 1949년 이후 신학을 공부했으며 목회활동을 한 경력도 있어 최상의 적격자라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종교사무국 간부는 양 목사에게 기독교 신도들에게 돌려주려고 하는 그 예배당의 전임 목회자가 되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종교사무국 간부의 요청을 받은 양 목사는 심각한 갈등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문제에서부터 기독교와 교회 공동체와의 등진 세월, 그리고 그가 받은 신학훈련에 대한 회의, 목회에 대한 두려움, 안정적인 노동자 생활에서 다시 새롭게 목회자의 길을 걷는 문제 등으로 인해 무척이나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그를 가장 아프게 한 것은 신학교에서 그가 존경하는 교수를 당시의 상황에서 비판했던 일이다. 그후 6개월째 된 어느 날, 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이미 용서하셨으며 그를 격려하고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였고, 하나님께서 그가 다시 목회의 길을 걷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해서 양 목사는 목회에 대한 분명한 소명을 받게 되었다.
 

성경만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하게 하소서!
양 목사는 그 후 종교사무국의 비준과 지역 기독교 신도들의 격려로 현재 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였고, 목사안수는 그 후 몇 년 뒤에 받게 되었다.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날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다짐하였다. “성경만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하게 하소서”

양 목사의 고백과 간증을 들은 그 날 장 선교사와 어두운 교회 골목을 빠져 나오면서 우리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감동을 받아서였을까? 그 후 우리가 양 목사의 사역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는 데는 그리 많은 논쟁과 토의가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양 목사의 복음적 신앙과 그리스도께만 충성하는 삶과 섬김 때문이었다.

왕쓰웨 목사 |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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