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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8.20  통권 65호  필자 :  |  조회 : 2776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사 행전]
좌절에 굴하지 않았던 자비의 천사,여성 선교사 마이니 바우트린

역경을 딛고 교사로 서다
미국 일리노이(Illinois)주 세코(Secor)에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마이니 바우트린(Minnie Vautrin) 선교사이다. 그녀는 친절함과 사랑이 깃든 행동, 그리고 탁월한 용기로 유명한 세계적인 선교사이다. 바우트린은 1887년 9월 27일, 세코에서 E. L 바우트린 부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6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잃고 힘든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어린 그녀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아버지와 오빠를 위해 가사를  돌봐야 했으며, 하고 싶은 공부를 할 돈을 모으기 위해 다른 여러 가지 힘든 일들도 해야 했다. 그녀를 사랑하고 아꼈던 학교 선생님은 그 어린 소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아이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진실한 크리스천이었죠.”

17살이 되자 그녀는 교회 회원이 되었고 신실하고 성실한 일꾼이 되었다. 바우트린의 정규적인 학교 교육은 일리노이 노멀(Normal)에 있는 노멀 주립대학에서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 학교에서 바우트린은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고, 이후 장학금으로 일리노이 대학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기까지 일리노이 르로이(LeRoy) 고등학교에서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진링대학 설립에 헌신하다
1912년, 바우트린은 중국에서 2년 간 중국어와 중국인들의 관습과 생활양식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루초오푸에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1919년에 그녀를  진링(金陵) 교육부 의장으로 선출하게 할 만큼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되었다. 중국에 들어간 지 6년 만에 바우트린은 미국으로 돌아와 첫 번째 안식년을 가졌는데,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찾던 중 콜롬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석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리고 중국에 다시 돌아와 난징(南京) 진링여대(金陵女大)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 후 이 대학의 부총장을 역임하게 된다.   

1920년대 초 바우트린은 완전히 버려진 40에이커의 황무지와 묘지를 사들여 진링대학을 설립하였다. 이 일은 땅의 소유권을 분명히 하기까지 끝없는 인내를 요구하였다. 묘지를 옮기고 설계도를 작성하고 건물을 짓는 일 등에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학교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미국에서 모금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바우트린은 중국어를 잘 구사했기 때문에 모든 논의, 협약, 논쟁은 항상 그녀의 몫이었다. 심지어 그녀는 학교 진입로의 설계와 공사까지 관여하였다. 또한 마무리 작업인 나무와 관목을 가져오고 조경을 꾸미는 등의 일을 그녀는 완벽하게 완수하였다. 일이 완공되자 바우트린은 커다란 기둥과 돌출된 지붕으로 된 중국식 건물의 두 뜰을 보며 크게 만족했다. 하지만 외관상의 성취보다도 더욱 감개무량한 것은 그 대학이 그 지역 사회의 유일한 대학이라는 사실이었다.

1925년에 다시 두 번째 안식년을 얻은 그녀는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계속 교육을 받았고, 다시 중국의 처음 사역지로 돌아왔다. 1931년 세 번째 안식년을 얻은 그녀는 유럽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교육체계를 공부하였다. 또한 이 기간 동안 제네바 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어 몇 가지 국제협약을 추가시킴으로 일약 국제적인 인물이 되었다. 유럽 방문을 끝낸 후 그녀는 다시 시카고 대학에서 자기 연구분야를 계속하였다.
 

중국인들의 피난처가 된 바우트린
1932년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중국의 상황은 전쟁의 소식으로 긴장과 불안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녀가 1939년에 그 다음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일본의 전면전에 가까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동안 바우트린은 놀라운 일들을 해내었다. 혹독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바우트린은 사람들에게 도움과 결정과 이해를 준 실제적인 천사였다. 사람들이 위험을 잠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방공호나 피난처를 찾을 때 그녀가 그것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혼자서 방공호를 만드는 일을 계획하고 건설하기 위해 공습 때에도 일을 했다. 대사관에서는 반드시 철수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내왔지만, 바우트린은 부녀자들이 남겨져 있는 대학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다며 그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남기로 결정하였다. 진입한 일본 군인들은 몇 번이나 대학 문을 뚫고 들어오려고 하였지만, 혼자 교문을 지키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는 집을 잃은 부녀자들과 아이들로 넘쳐났지만, 바우트린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200∼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락방 안에 1,000명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총 1만 여 명의 사람들이 대학을 은신처로 삼아 안전할  수 있었다. 

전쟁은 더욱 극심해졌고 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폭격이 있을 때마다 중국인들은 더욱 하나가 되었으며 일본인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중국인들은 결심이 약해지곤 했지만, 바우트린의 용기와 격려에 힘입어 끝까지 이겨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바우트린은 중국 정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인 ‘비취옥 상’을 받게 되었다.
             
영원한 안식년이 된 마지막 귀국
바우트린은 1940년으로 안식년을 연기하였다. 그녀가 귀국할 무렵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환영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바우트린의 중국 사역을 회고하는 연설은 환영 행사를 후원한 미국기독선교사협회의 부회장인 돈(R.A Doan) 여사가 하기로 되어 있었다. 돈 여사는 1939년에 바우트린이 난징의 진링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돈 여사 또한 일본에서 여학교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교육사역이  얼마나 힘든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때 바우트린은 신경쇠약에 걸려 아이오와(Iowa)시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드포드(Woodford)에서 거행하기로 했던 바우트린 환영행사는 취소되었고, 그녀의 고향 세코에서 그 행사를 대신해야 했다. 

바우트린은 1941년 5월 16일,  54세의 나이로  인디아나폴리스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러나 그녀를 아는 모든 친구들과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바우트린은 언제까지나 ‘자비의 천사’로 기억될 것이다.

출처 | 미국 일리노이대학 도서관 자료   www. rsa.lib.il.us/~ilalive/files/ep/htm2
번역 | 곽숙 · 자원봉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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