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현재 호주에 체류하고 있는 한 조선족 형제의 간증문입니다. <편집자 주>
나는 중국 지린(吉林)성 한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보통 시골동네였지만 우리집이 그래도 동네에서 유일한 기와집이었던 것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살림 형편이 동네에서 상류 수준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러한 괜찮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된 작은 권세가 우리 가정으로 하여금 향후 근 30년 동안 엄청난 시련과 치욕의 대가를 치루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63년의 어느 날부터 작은아버지가 우리집을 자주 다녀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가족은 작은집과 함께 이사를 간다고 하였다. 당시 나로서는 5Km 떨어진 외가집도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새로운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철이 든 후에야 안 사실이지만, 나의 이러한 생각과는 상관없이 당시 부모님과 작은아버지 가족은 우리 가정의 전력(前歷) 문제로 시달림을 받고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기로 시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사를 간 후에도 편안한 날은 오래 가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1965년부터 사회주의 교육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고, 1966년에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란 명목 아래 중국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정치 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은 마치 공포와 두려움의 도가니 속에 빠져 들어간 것 같았다. 사람들은 혈안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신고하고 적발했고 부모, 형제, 친척, 남편과 아내도 가리지 않았다. 국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괜히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에 휘말려 갈팡질팡했다. 정말로 무서운 혁명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모든 죄, 즉 마오쩌둥(毛擇東)과 중국 공산당에 대치되는 모든 정치적, 역사적인 죄를 자백하고 군중의 검증을 거쳐야만 했다. 이러한 일이 각 계층뿐 아니라 당의 국가주석까지도 포함된다는 놀라운 사실에 사람들은 전율하였다. 곳곳마다 혁명적인 파벌이 형성되고, 도처에 대자보와 각종 비난, 성토 문구들이 휘날렸다. 학교도 문을 닫고, 공장도 문을 닫았으며 심지어 정부 기관의 행정조차 마비된 상태였다. 군인들도 모든 활동이 정지된 채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 오직 들리는 것은 혁명 투쟁을 부르짖는 구호소리와 욕지거리였고, 곳곳마다 부수고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이따금 들리는 싸늘한 총성은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집 창문에도 커다란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사흘이 멀다하고 끌려가 심문을 받고 군중집회에서 비판을 받았다. 생산소대 군중들 앞에서 죄를 반성해야 했고 비판을 받았다. 혹은 생산대대의 군중 집회와 인민공사의 군중 집회, 심지어는 현에서 거행되는 집회에도 끌려가 죄를 자백하고 비판을 받아야 했으며, 고깔모자를 쓴 채 거리로 끌려 다녔고, 어떤 날은 두들겨 맞아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나와 나의 가정은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었고, 모든 사회적 지위는 그야말로 개만도 못한 처량한 신세였다. 결혼, 직장, 가정, 사회 어느 부문에서도 우리에게는 열린 길이 없었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가? 생각해 보면 악몽과 같았던 지긋지긋한 삶을 어떻게 견뎠는지….
개방의 열린 문으로 돈을 따라 나서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 平) 주석이 개혁개방을 선포함과 동시에, 수십 년 동안 정치 사회적 압제 속에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사면령이 드디어 선포되었다. 전국이 환희로 들끓었지만 우리 집은 더더욱 기쁨이 넘쳤다. 그것은 아버님의 사면 소식과 함께, 그때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기꺼이 나를 사랑하며 3년이나 교제해왔던 사랑하는 여성을 내 삶의 동반자로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삶의 용기를 잃지 않고 오늘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참된 사랑이 한 가닥 밝은 빛이 되어 쓰러져 가는 나의 심령에 소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변화되고 있었고 새롭게 움직였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묶여 있던 정치적 속박에서 풀려 나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새로운 것을 기대했다. 외국의 선진적인 경제정책과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경제는 많은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에 따라서 부패한 자본주의의 물질만능과 향락, 타락한 성문화가 전염병처럼 중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개인 소유를 인정치 않았던 중국에서,돈을 벌어야 된다는 새로운 풍조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뒤흔들어 놓았다. 돈에 눈이 어두워 형제, 일가친척도 가리지 않았고, 도처에 술집과 매춘부들이 득실거렸다. 성 개방으로 인해 많은 가정이 파탄되면서 죄 없는 어린 생명들이 길거리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아연해졌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면 과연 참 행복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호주에서 만난 참 하나님
이러한 풍조 속에서 나도 돈을 벌어야 된다는 일념과 돈만 있으면 무엇인가 될 것 같은 막연한 생각 속에서, 85년에 고향을 뛰쳐나와 어느 도시로 갔다. 이곳에서 가지고 있던 돈 얼마와 빌린 돈으로 식당을 구입하여 본격적인 장사를 시작하였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처가집에 맡겨놓고 추운 겨울에 손발이 얼어터지면서도 기를 쓰고 일을 했다. 둘이서 그렇게 5년 동안 일한 결과 꽤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공장도 하나 장만하였다. 얼마 후에는 여유 돈으로 한국에 갈 수 있었고, 한국에서도 둘이 악착같이 노력하여 생애 처음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중국에 돌아와 아파트 한 채를 사고 갖가지 가전제품을 구비했으며, 25만 위안(元)을 투자해서 술집까지 개업을 했다. 어떻게 보면 이로써 만족하겠지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욕심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더 많은 돈을 벌어볼 생각으로 술집도 팔아 치우고 이역 만리 호주 시드니로 오게 되었다. 물론 호주에 와서도 적지 않은 돈을 모았다. 하지만 이렇게 돈을 벌고 모아도 이기적인 인간의 욕심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그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아무리 모아도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을 달랠 길 없었고, 낯선 이국 땅에서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과 속에서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외로움과 절망에 고통하다가, 결국 신경성 위장병까지 얻게 되었다. 이처럼 내적인 절망과 갈등의 연속에서 몸부림치던 나를, 사랑의 주님께서는 잊지 않으시고 주님의 넓은 품안으로 불러 주셨다.
1997년 5월 18일 주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불현듯이 교회나 한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찾아간 곳이 바로 시드니 ○○장로교회였다. 식당업을 그만두고 갓 청소업으로 전업한 후이기도 하고, 운전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근 한 시간이나 헤매다가 간신히 교회를 찾았다. 막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예배당 안에서 흘러나오는 찬송 소리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비록 가사도 모르고 곡도 몰랐지만 마치 하늘 저쪽에서 들려오는 듯한,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가락이 내 귓전에 울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무엇인가 마구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아 울렁거리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 날 목사님의 설교는 비록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고, 내 마음을 아시고 어루만지는 자애로움으로 다가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점심시간에 성도들의 평화롭게 웃는 모습과 사랑에 넘치는 눈길들을 바라보며 가슴은 마냥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교회 올 때와 다를 바 없는 길이었지만, 하늘은 더욱 푸르고 삼라만상이 나를 손짓하며 반기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목사님과 여러 성도님들은 나의 신앙성장에 필요한 귀중한 가르침으로 나를 이끌고 끊임없이 배려해 주셨다. 특히 새가족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알게 되었고, 내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인간은 도덕과 수양, 지식 등 그 어떠한 것으로도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음을 깨달았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이 또한 나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눈물이 나서 견딜 수 없었고, 찬양을 부르면 더더욱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지난 날의 처절한 어둠의 세월, 인간의 최소한의 자유마저도 유린당하며 가냘프게 살아왔던 그 쓰라린 날들, 개혁개방으로 인해 무엇인가 기대하고 발버둥치며 인간적인 욕구와 허무를 채우려고 방황하던 이 불쌍하고 보잘 것 없는 나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소망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중국을 위한 복음의 불씨가 되리라
새가족반을 졸업하고, 98년 11월 8일 세례를 받았으며, 이제는 제자반도 수료하고 올해부터는 사역자 반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중국에 두고 온 가족을 위한 기도가 계속되었다. 특히 참혹한 암흑기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금까지 생존하시던 아버님이 98년 83세의 고령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영광을 맞이하게 되었고, 사랑하는 아내도 주님을 영접하는 놀라운 축복이 우리 가정에 임하였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며 나는 중국 땅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심령들이 주님을 알지 못하고 신음하고 방황하다가 죽어가고 있을까? 또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옛날 내가 걸었던 무지와 착각의 길을 헤매고 있을까? 또한 사역자가 부족한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이단의 침투와 미신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가?
나를 중국에서 태어나게 하셔서 다양한 환경을 통해 세상에 부딪히게 하시고, 또 빈부귀천의 온갖 비결을 경험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사업을 경영하게 하셨고, 남 못지 않은 많은 물질을 소유케 하셨으며, 특히 한국과 호주까지 와서 여러 일들을 겪게 하신 데는 분명한 뜻이 있음을 믿는다.
과거 심한 핍박과 환난으로 멸절되었던 중국 교회는, 마치 추운 겨울에 얼었던 생명들이 봄을 맞아 생기를 회복하는 것처럼 변화의 시기를 맞은 중국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 위에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한 점 한 점 복음의 불길이 요원의 불길로 타올라, 세계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중국 교회가 되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작은 불씨가 되기를 다짐한다.
이선방 | 호주 시드니 거주 중국 동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