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1927년 평안남도 출생, 1955년 4월 24일 대한예수교 장로교 40회 총회 태국 선교사로 파송.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 역임, 1978년∼1992년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성서공회 총무 역임. 은회 이후 미국 풀러선교대학원 한국선교학부 책임자 역임.
최찬영. 그는 우리 나라 해방 후 최초의 타문화권 선교사이다. 1955년 4월 24일 태국 선교사로 파송된 이래 40여 년 동안 교단이나 국가를 초월하여 아시아의 선교사로, 세계 교회의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로 태국과 라오스 성서공회 총무를 역임했으며, 은퇴하기까지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성서공회 연합회 총책임자로 일하면서 아시아 지역 성경보급에 힘썼다. 특히 그는 1987년 중국 난징(南京)에 애덕인쇄소를 설립, 지금까지 중국 내에서 2,400만 권 이상의 성경이 발간되는 일에 산파역할을 하였다. 지난 8월 초 선교한국 2000 대회 참석차 귀국한 최찬영 선교사를 만나 그의 사역을 되돌아보았다.
어떻게 해서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까?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니며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덤으로 주신 저의 생명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사실 선교사를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목사로 평생을 산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선교사로 평생을 산다는 의식은 별로 찾아볼 수 없었거든요. 원래 파송받기 전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수속을 밟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총회 선교부에서 저희 부부가 선교사로 추천되었다며, 결심이 되면 이튿날 선교부 모임에 나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계획한 모든 것을 포기해야했기에 참으로 많은 기도와 고민을 했지요. 하지만 그날 밤 우리 부부는 선교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고, 미국 유학을 포기하였습니다. 선교사로 부르시는 주님의 길을 따르기로 결심하자, 주님께서는 놀라운 평안과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경직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영락교회 후원으로 1956년 5월 24일 태국으로 떠났습니다.
45년 전 한국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의 자격으로 태국에 도착하셨을 때, 어려움이 많았을 듯합니다. 신임 선교사 당시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 당시 태국은 한국에 비해 여러 모로 발전한 나라였습니다. 6·25 당시 우리 나라에 군대를 파병하기도 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처음 태국에 갔을 때, 어느 나라 출신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일본, 대만, 홍콩, 싱가폴…. 제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그들은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조차 몰랐습니다. 저를 대할 때 마치 종을 부리듯 하는 태국 교회 지도자도 있었죠. 가난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라고 해도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하지만 제가 태국어를 배우고 1년 만에 태국어로 공중설교를 하게 되자, 비로소 그들은 저를 선교사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 현지에서 주로 하신 사역은 무엇입니까?
복음전도와 신학교 사역, 병원, 태국 교회 목회 등 다양했습니다. 1962년 태국 성서 공회 총무를 시작하여 이후에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성서공회 연합회 총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일을 맡았을 때 아시아 지역에 반포되는 성경 문서량은 연간 1,100만 정도였고 세계적으로는 5,000만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은퇴한 1992년에는 아시아 지역에서만 3억, 세계적으로는 6억 정도가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의 사역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중국에 애덕기금회를 통한 성경인쇄공장을 세워 성경을 발간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인쇄공장을 세울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성경인쇄공장 건립을 위해 40여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고,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공장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불신 등 어려움이 참 많았지요. 당시 제가 만난 중국 기독교 대표들은 스스로 성경을 찍기 원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는데 성경은 계속 외국으로부터 밀수되고 있으니, 중국 내에서 성경을 발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거였죠. 그래서 성경인쇄공장을 세우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중국 삼자교회는 원칙상 외국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이 추진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중국 교회 대표 중 한 분이 ‘애덕기금회’란 이름으로 하자는 말을 꺼내더군요. 그래서 중국의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사회봉사단체인 애덕기금회(愛德基金會: Amity Foundation)를 세우고, 애덕기금회를 통해 애덕인쇄소(Amity Printing Press)를 세우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성서공회 역사 가운데 단일사역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한 것이 중국 인쇄공장입니다. 중국 정부가 볼 때도 사회봉사 단체에서 인쇄기계를 기증하여 중국인들이 직접 성경을 발간하는 것이니, 원칙에도 위배되지 않고 또 천만 달러 이상의 외국 투자를 유치할 수 있으니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된다고 여겼을테지요. 1987년부터 지금까지 애덕인쇄소를 통해 2,400만 권 이상의 성경과 1,300만 권의 찬송가를 발간했습니다. 중국어 성경 외에 조선족을 위해 한글로 된 성경책을 비롯, 소수민족 언어로도 성경이 나왔습니다. 성경이 중국어로, 중국인의 손으로, 중국에 세워진 인쇄소에서 발간되는 일은 결코 인간이 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최대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 행하신 이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선교사님은 직접 중국 정부와 협력하는 공개적인 방법으로 일해오셨습니다. 선교사님의 중국선교 원칙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중국은 공식적인 선교사 신분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많은 선교사들이 비공개적인 루트를 통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부와 직접 협력하는 선교를 할 때는 여러 가지 제한이 있고, 자격도 까다로운 것이 사실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든 비공개적으로 하든 우리가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것은, 중국 정부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기독교 자체의 발전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운동이 중국 정부를 위태롭게 하는 비밀결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중국선교에 열정을 갖는 것은 좋지만, 지혜없는 선교는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또한 그 열정이 그리스도 왕국의 종으로서의 열정이 되어야지, 그 외의 것을 위한 열정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선교하는 사람은 그 나라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그 나라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선교사님은 태국 사역, 그리고 이후 성서공회 사역을 하면서 외국단체,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일해오셨습니다. 현재 전세계에 나가있는 한국 선교사들이 협력에 약하다는 면이 지적되곤 합니다. 이것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 원인은 첫째, 협력과 동반자 의식이 약한 한국 교회에 있다고 봅니다. 수백 개의 교파 분열과 반목이 존재하는 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현지에서 한국 선교사들이 두 명 이상만 있어도 관계가 어려워지고, 더군다나 피선교지 사람들이나 다른 나라 사역자들과 동역관계를 맺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선교지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모두 힘을 합한다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 선교사역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을 전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여러 장벽을 넘어서 하나가 되어 선교할 때 사랑의 주님을 나타낼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각자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선교가 아니라, 나뉘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선교를 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서로를 귀히 여길 때에만 우리를 부르시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교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한국에는 중국을 마음에 품은 많은 선교 헌신자들이 있습니다. 선배 선교사로써 이들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중국 교회는 전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중국 교회의 성장은 우리의 기쁨이요 자랑입니다. 결국 우리의 비전은,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전세계의 교회들과 동역하여 10/40창문 미전도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며, 땅끝까지 함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목표는 중국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중국선교에 열심이 있는 한국 교회 안에 아직까지 중국 복음화를 위해 큰 계획 아래서 조직적으로 전략을 세우는 기구가 없습니다. 선교에 헌신한 젊은이들이 무조건 가기 전에, 중국을 더욱 잘 이해하고 올바른 선교를 배우며 훈련하는 일들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한국 교회가 도와야 합니다. 세계선교의 일부분으로서 한국 교회가 지혜롭고 질서있게 중국선교에 임할 수 있다면, 세계복음화는 빠른 시일 내에 성취되리라 생각합니다.
최찬영 선교사는 현재 미국 풀러선교대학원에서 후배 선교사를 양성하는 일에 여생을 드리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중국 교회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특히 중국 교회 지도자 교육 사역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했으며, 언제 어디서나 겸손한 종의 자세를 잃지 않았던 최찬영 선교사. 한 평생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일을 감당했던 반백의 노 선교사와의 만남은 그의 잔잔한 미소처럼 따스했다.
취재, 글 | 권수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