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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  통권 61호  필자 : 천전웨이(陳振威)  |  조회 : 3832   프린트   이메일 
[중국선교사 행전]
고아의 아버지, 존 러셀 밀즈 목사(Rev, Verent John Russell Mills)

출생과 성장
밀즈 목사는 1913년 5월 12일 영국의 버밍햄에서 태어났으며, 6세 때 캐나다의 마니토바(Manitoba)로 이사하였다. 어머니의 눈물어린 기도는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였다. 18세에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기술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를 중국 선교사로 부르셨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즈는 1931년 10월 1일 성경 한 권, 의복 두 벌, 신발 한 켤레, 그리고 후주머니에 몇 푼의 돈만 가지고 결연히 생면부지의 중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중국에 첫 발을 디딤
10월 28일, 목적지인 광둥(廣東)성의 관야오(觀瑤)에 도착했다. 그가 새로이 거주하게 된 곳은 강물을 욕실과 화장실로 삼은 선상가옥이었다. 파송 교회는 밀즈 목사가 팔고문(八股文: 중국 명, 청대의 과거시험에 쓰이던 문체(文體)로써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역자 주) 선생에게서 중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5개월의 노력 끝에 가까스로 현지인과 대화가 가능해졌지만, 대화중에 발음이 부정확하여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중국에 온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그는 약혼녀에게 편지를 썼다.「이곳 중국에서의 생활은 무척 고독합니다. 만약 당신이 중국으로 와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버텨나갈 자신이 없습니다···.」편지를 받은 그의 약혼녀는 주저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왔으며, 그녀는 중국 남부의 작은 어촌에서 첫 번째 외국인 신부가 되었다. 신혼여행 기간에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지냈다. 그들 가정의 좌우명이 ‘주를 섬기는 것이 우선이고, 일하는 것이 다음이요, 가정이 그 다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선상 가옥이 너무 비좁았기 때문에 그들은 작음 집을 하나 빌렸는데, 진흙으로 지어졌으며 천장은 볏짚으로 덮여있었고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밀즈 목사는 직접 벽을 뚫어 창문을 만들고 건물 안팎에 석회를 발랐다. 밀즈 부부의 존재는 마을 사람들을 크게 동요시켰다. 그들은 밀즈 부부를 ‘서양귀신’이라고 불렀고, 그들이 집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자기들에게 불길한 일이 생긴다고 믿었다.

마침내 밀즈 목사는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기면 모두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각서를 썼고, 그때서야 주민들이 안정되었다. 이 일은 밀즈 목사 부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중국으로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의 복음을 전파하여 마을 사람들이 죄와 미신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 곳 칭례전(淸連鎭)은 밀즈 부부 사역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능력의 복음을 전하며
어느 날 밤, 밀즈 목사는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이 깼다. 어떤 사람이 벌거벗은 채로 온 몸에 피를 흘리면서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온 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그를 본 밀즈 목사는 당황하여 중국어로는 말이 나오지 않자 영어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이 나갈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그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가고 경련도 멈췄고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온 마을 사람들이 이 기적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밀즈 목사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마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매일 300여 명 정도가 복음을 들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특히 바이완춘(白灣村)현의 현장(縣長)은 온 마을 주민들을 데리고 와서 마을 전체가 예수님을 영접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1936년, 드디어 첫 번째 교회가 그 마을에 세워졌다. 

그 외에도 밀즈 목사는 칭웬(淸遠)시 사람들을 인도하여 제방을 쌓기도 하고, 복음성가단을 조직하여 자신이 만든 중국어 찬양으로 전도하는 등, 광둥성 전 지역을 그의 활동무대로 삼아 적극적으로 사역하였다. 도처에 교회를 세우고 제자를 양육하여 지도자를 세웠다. 광둥성에 9개의 교회를 설립한 그는 모리슨(J. Elmor Morrison) 목사와 함께 복음성경학교(Evangel Bible School)를 창설하였다. 

전쟁으로 인해 굶주린 자들을 돕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자, 밀즈 목사는 가족을 호주로 보내고 자신은 홀로 중국에 남았다. 일본군이 쓰이(四邑)지역을 봉쇄하자 그 지역에 양식과 의약품의 유통이 단절되었다. 그러자 1940년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되었고, 그는 즉시 중미구원협회(Sino-American Relief Committee)를 창설하였다. 이 모임의 첫 번째 회의에서 한 사람이 그에게 “어떻게 자금을 모금하실 겁니까?”라고 묻자, 그는 ‘신(信)’자를 써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중국에서 살아온 10년 동안 매일매일 하나님만 신뢰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혼자 충칭(重慶)으로 가서 여러 구조단체에게 원조를 부탁하였고, 방송을 통해 미국 거주 화교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래서 62만 달러에 가까운 액수를 모금하여 돌아왔다. 그는 중앙 정부로부터 쌀을 구매하여 천여 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쌀을 운송하게 하였다. 또한 21개의 구제지부를 만들어 매일 1만 4천여 명에게 양식을 공급하였다. 

전쟁고아들과 함께
전쟁은 수많은 고아를 낳았다. 밀즈 목사는 방치된 학교와 사당을 개조하여 ‘아동수용소’를 설립, 고아들을 모아들였다. 아동수용소는 곧 만원이 되었지만 그는 계속하여 밀려들어 오는 고아들을 거절하지 않았다. 직원에게 젓가락 한 벌과 물 한 잔을 더 가져오라고 말할 뿐이었다. 밀즈 목사는 일본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을 다른 장소로 옮길 때도 있었는데, 그 때는 원아들도 쌀부대를 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야 했다. 나이가 너무 어린 아이들은 밀즈 목사가 두 바구니에 세 명씩 태워서 지고 가곤 했다.

밀즈 목사는 광둥성에도 5개의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고아들에게 먹을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도 전했다. 1945년에 5개 고아원의 총 원아 수가 700명이 넘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구조단체들도 하나 둘씩 중국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아원의 양식공급도 중단 되었다. 밀즈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하도록 하고 광저우(廣州)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밀즈에게 미국 버지니아주에 본부를 둔 중국아동기금(CCF)에 편지를 띄워보라고 권하였다. 편지를 보낸 지 두 주 후 미국으로부터 답장이 왔는데, CCF가 700명의 고아들을 위해 매달 1인당 2위안(元)씩 지원해주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식량의 운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는 고아원을 광저우로 옮기기를 원했다. 마침 장지에스(蔣介石) 장군의 소개로 장파쿠이(張發奎) 장군을 알게 되어, 몰수된 일본인 학교를 고아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중국이 안정을 되찾자, 밀즈 목사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기술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아침저녁으로 예배와 기도회를 통해 그들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도 제공하였다. 1947년 9월부터 밀즈 목사는 중국, 일본, 한국 지역의 CCF일을 주관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화북의 42개의 고아원과 연계하여 5,113명의 고아들을 도왔으며 이어 한국과 일본에서도 활동하였다. 

‘나의 사랑, 중국’
1949년, 중국이 공산주의 노선을 택하게 되면서 사회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졌다. 모든 외국인 회사가 폐쇄되었으며 밀즈 목사도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어느 날 총사령부에서 그를 불러다가, 고아원 운영은 신부위장일 뿐이고 간첩활동을 한다는 혐의를 씌웠다. 6시간 동안 계속된 심문 끝에 밀즈 목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마음엔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소, 만약 내가 죽게 되어 당신이 내 마음을 해부한다면, 당신은 분명 내 마음 중심에 오직 ‘中國’이라는 두 글자가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요.” 심문하던 관리는 돌연 그를 석방하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 

그러나 고난은 끊이지 않았다. 중국아동기금의 전 재산이 몰수되었고, 직원들은 모두 공산당원들로 대체되어 고아들을 공산주의 사상으로 세뇌하기 시작하였다. 밀즈 목사는 어찌할 수 없음을 느끼고 아쉽지만 중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 후로도 공산당은 계속해서 그에게 어려움을 가했지만 간첩혐의로 고소할 수는 없었다. 결국 4개월 후에야 밀즈 부부는 중국을 떠날 수 있었다. 

홍콩에서 계속되는 고아 사역
미국으로 돌아온 밀즈 목사는 중국아동기금에서 한국과 일본의 고아들을 돌보도록 파견되었다. 그는 한국의 4,000명 고아들이 수용된 23개 고아원과, 일본의 6,000명 고아들이 있는 60개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밀즈 목사는 기타 아시아 지역으로도 활동을 확장시켜나갔다. 그 즈음 CCF는 기독교아동복리회(Christian Children's Fund)로 개명하고, 밀즈 목사로 하여금 해외분양를 도맡아 전 세계에 구호의 손길을 펴게 하였다. 1951년 가을에는 홍콩으로 가게 되었으며 또다시 중국인을 위해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1950년 초에 수많은 중국 난민들이 홍콩으로 밀려들었는데, 그 중 300여 명이 광저우 CCF 고아원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따라서 홍콩에 고아원을 세우는 일이 급선무였다. 밀즈 목사는 1952년, 규모가 크고 설비가 잘 갖춰진 고아원을 짓기 위한 큰 공사를 설계하였다. 체계적인 도로망, 물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저수지, 병원, 소·중학교, 교직원 숙소, 천여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강당, 대형 축구장 등 일체의 건강, 오락, 체육시설을 갖춘 ‘어린이 마을(Children’s Garden)'이었다. 이 안에는 실험농장, 금속 및 목공기술 실습장, 그리고 66개의 숙소가 세워질 계획이었다. 이 숙소를 ’가정‘이라 하고, 각 가정마다 13명의 고아와 엄마로 불리우는 1명의 보모를 함께 살게 하였다. 이런 생각들은 고아들로 하여금 마치 일반 가정에 있는 것과 똑같은 정서 및 심리적인 건강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홍콩 중문대학의 맞은편 마안산(馬鞍山)에 위치한 28에이커의 땅은 고아들을 위한 어린이 마을을 만들기에 적당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밀즈 목사는 숱한 어려움 끝에 그 거대한 땅을 얻을 수 있었다. 5년 동안 밀즈 목사는 스스로 건설현장에 뛰어들어 어린이 마을을 완성했다.

밀즈 목사는 고아들을 돌보는 일 외에도, 그 지역 내에 사는 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교육받을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 정부에 건의하고 여러 단체와 협력하여 7층 건물의 옥상에 학교를 만들었다. 이것이 홍콩 옥상학교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로도 CCF는 30개의 옥상학교가 세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밀즈 목사의 홍콩에서의 성공적인 활약은 전 세계의 모델이 되었다. CCF는 빠르게 인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타이완, 아프리카, 남미와 유럽 등지에 이르기까지 복지사업을 확대하였다. 1958년까지 CCF는 전 세계 25만 명의 고아들을 도왔다. 

중국인과 고아들을 위해 드려진 삶
1958년 밀즈 목사는 본부의 명령에 의해 미국 리치몬드의 본부로 돌아왔으며 25년간의 현장경험을 토대로 고귀한 견해를 전해줄 수 있었다. 1963년 행정주임직을 맡아 재임기간 중의 모든 사업을 전산화하였고, 한편 각 가정에 도우미들을 파견하여 도움이 필요한 아동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1970년 2월, 그는 CCF의 총무로 임명되었다. 

이미 세 번의 심장질환을 겪었고 1980년 심장수술을 받은 밀즈 목사는 36년에 걸친 CCF에서의 봉사를 마무리하기에 이르렀다. 퇴임 후에도 그는 퇴임한 선교사와 몇 명의 중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리치몬드 중국인 침례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는 교회 봉사 외에도 이민국, 법원의 행정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국인들을 위해 번역을 해주거나, 중국 유학생들을 초청하여 그의 집에서 중국음식을 나누기도 하였다.

또한 한 중국인 신학생을 일대일 양육하여 세심하게 지도한 후에 좋은 목회자가 되도록 훈련하기도 하였다. 
1996년 11월 밀즈 목사는 심장질환으로 재차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마취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11월 21일 천국으로 돌아갔다. 

밀즈 목사의 인생은 믿음으로 일관된 삶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여 중국으로 갔으며, 교회를 세우고, 제방을 쌓았다.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아들을 보호하였으며, 후에는 전 세계의 아동들의 복지를 위해 일하였다. 이 모든 일들이 믿음의 실천이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다. 밀즈 목사의 모든 노고는 많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그의 삶은 중국인들에게 너무나 아름다운 모범이 되었다. 

천전웨이 |  밀즈 목사의 주치의로서, 홍콩에 있는 CCF의 신아이(信愛)고아원에서 성장하여 현재 캐나다에서 심장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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