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분류보기 > 전체보기 
북쇼핑
2000.1.1  통권 61호  필자 : 이바포우(以巴弗)  |  조회 : 3371   프린트   이메일 
[내가 만난 하나님]
타협하지 않는 삶

 방황을 거친 결단

나는 1926년 4월 25일에 항저우(杭州)에서 태어나, 상하이(上海) 부근의 쑹장(松江)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는 감리교의 복음 전도자였지만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반대는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바로 주일학교 시작했으며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자주 성경말씀을 들으며 혼자서 기도하고 성경도 읽었다. 이런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11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에 대한 반발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왜 하나님은 마귀를 창조했는가? 만약에 마귀를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은 지옥에 갈 필요가 없지 않았는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으며, 마침내 ‘하나님은 나보다 더 똑똑하지 못한 것 같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반발은 4~5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황막감천(荒漠甘泉: 사막의 단샘)”」이란 경건서적을 읽으면서, 예수님 앞에 겸손히 나를 낮추게 되었다. 또한 고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1945년 초),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늘 영광을 버리고 천한 몸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이공계 방면의 대학을 진학하고 싶은 모든 야망을 포기하였다. 예수님께 내 자신을 맡기고, 예수님이 어느 곳으로 가라 하든지 예수님을 위해 그곳에 가고자 결심하게 된 것이다. 

때를 기다림

나는 이미 신장(新疆), 네이멍구(內蒙古) 등 어떤 곳에서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되더라도 모두 감당하기 원했지만, 예수님은 내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할지 응답해 주시지 않았고, 또 내게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도 주시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10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길을 걸었다. 

1945년 여름 일본이 항복하자 나는 쑹장으로 돌아가 2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 후에 상하이에 있는 중국 신학대학에 입학해 3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였는데, 그 때 상하이의 쇼우충탕(守忠堂)교회에서 실습을 했다. 1949년 5월 해방군이 상하이를 점령한 후, 그들은 2주 동안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이 2주의 기간을 이용하여 열심히 기도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정권의 시작이 분명히 교회와 복음 전도자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줄 것이고, 이로 인해 몇몇 복음 전도자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항상 하나님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죽는 그 순간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 전도자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예수님은 로마서 10장의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롬10:15)라는 말씀으로 나를 가로막으셨다. 나는 다시 기도했다. “하지만 저는 이미 주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주님 역시 저를 부르셨지 않습니까? 저는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헌신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란다. 그러나 모두가 다 복음 전도자가 될 수는 없단다.” “그러나 저는 이미 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대답했을 때 예수님은,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해서 모두가 반드시 복음 전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란다.”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다시 “신학교에서 저를 파송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은 “신학교에서 너를 파송했다고 해서 내가 너를 파송한 것은 아니란다.”라고 하셨다.

마침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만약 주님의 뜻이라면 다른 길을 가기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다른 일을 찾기 시작했다. 설사 내가 잡일이나 청소같은 일을 하게 될지라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훈련

예수님은 나로 하여금 임시교사를 하도록 인도하셔서, 8~9년 동안 중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쳤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상하이에서 텐진(天津)으로 이사를 갔다. 1957년, 텐진의 한 중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하방(下放; 간부나 지식인들의 사상 단련을 위해 공장·농촌 등지로 노동하러 가는 것-편집자 주)’을 당했다. 그 때 중국은 처음으로 간부들로 하여금 농촌에 내려가 노동하게 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은 내게 새로운 환경을 허락하셨다. 농촌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써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삼자회가 지배하고 있었다. 또 시간이 흐를수록 교회가 합쳐져 교회 수가 감소했으며, 단 한 명의 복음 전도자도 진정한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곧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 이 세상은 멸망할 것이라는 등의 성경 말씀을 전할 수가 없었다. 공산당에서 말하는 소위 ‘신앙의 자유’란 단지 마음속으로 믿는 것이지, 타인에게 전하면 법을 어길 뿐 아니라 공산당의 정책까지도 어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방침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이 내게 기회를 허락하실 때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로 인한 충돌이 갈수록 심해졌다. 그들은 내가 충고를 듣지 않자 체포와 고문의 방법까지 사용했다.

구속

1964년 공안국이 집에 들이닥쳐 나를 체포한 후, 그 동안 내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왔는지 추궁하며 심문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른 형제자매들과의 관련을 복음전파와 관련 있는 질문을 하면 난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공안국은 공산당의 ‘정직하면 관대하게 대하고, 저항하면 엄하게 다스린다.’라는 정책 하에, 그날 바로 나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 후 한 달 동안, 공산당은 여덟 번이나 나를 재판했다. 내가 그들의 질문에 계속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그들의 태도는 갈수록 점점 혹독해졌다. 그러나 처음 감옥에 들어갈 때나 공안국의 지프차를 탈 때,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 마음은 항상 평안했다. 

구속된 지 2년 후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그 해(1966년)에, 나는 마침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성경은 만약 어떤 사람이 주님을 따르고자 하면, 곧 자신의 부모나, 처자나, 재산 등을 모두 버리고 주님만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나는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하방 당할 때 목사의 직분을 박탈 당했고, 구속된 후에는 공민권을 박탈 당했으며,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에는 아내가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아내는 그 당시 나 때문에 홍위병에게 심하게 비판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나 때문에 고통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이혼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주님의 은혜였다. 곧 감옥에서 아내도, 자식도 없는 것이 내게 유익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염려 없이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었다. 

견고함

64년부터 67년까지 주님은 나에게 한 가지 확신을 주셨다. 곧 ‘죄를 인정하지 말고, 신앙을 돌이키지도 말고, 개조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치 학습을 할 때 말하지 않았고,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어록을 읽지도 않았고, ‘마오쩌둥 만세’를 외치지도 않았다. 손을 들라 해도 들지 않았고, 혁명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어떤 형태의 보고서도 쓰지 않았으며, 개조 일기에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시험을 볼 때도 이름만 쓰고 백지로 제출했다. 

68년, 범법자들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때, 나는 중죄인이었고 반개조분자의 전형이었다. 어떠한 고문에도 절대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나와 함께 방을 쓰던 죄수조차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를 무시하고 못살게 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인내

70년 겨울, 정부는 다시 나를 통제하기 위해 가장 열악한 감옥으로 배치시켰다. 다루기 힘들고 자주 소란을 피우는 죄수들도 이 감옥에만 오면 유순하게 변한다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그들은 나를 이곳에 약 4개월 장도 감금하였다. 이곳에서는 삼일에 한 끼만 먹을 수 있었고 심한 노동도 해야 했다. 그곳에 막 도착했을 당시에는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고 힘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내게 힘든 일을 시켰다. 힘든 일을 하면서 삼일에 한 끼 식사만 했기에 내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자주 기절했고, 길을 걸어갈 때조차 자주 넘어졌다. 심지어 한 번에 두 세 개의 철근밖에 들 수 없어 차에 가득히 채우지 못하자 전체 생산에 지연을 초래했다. 단지 몇 분 늦는 것도 생산 현장에서는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나를 때렸다. 그 때 끼고 있던 안경도 망가졌다. 

나는 갈수록 쇠약해졌고 이런 식으로 계속 가다가는 생산 속도가 지연되기 때문에, 그들은 나로 하여금 밖에 나가서 바위 다듬는 일을 하게 하였다. 한겨울이었는데도 그들은 내가 솜옷을 입고 일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 춥고 배가 고팠다. 그러나 이것 또한 주님의 은혜였다. 왜냐하면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을 때, 감옥 대표의 도움으로 제2중대 감옥으로 이송되었기 때문이다. 제2중대 감옥에서의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식사 전에 기도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교도소장은 내가 승리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으나, 비록 입술로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는 주께 감사드렸다. 그곳에서 건강은 매우 급속도로 호전되었다. 이 일은 곧 1970년 겨울부터 71년 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모두 23년을 보내었다. 

시험

이후 감옥에 변화가 있었다. 곧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중범형 (최소한 15년 이상, 무기징역, 사형 선고받은 죄소)을 선고받은 죄수들도 가옥에서 모범적으로 생활을 한 경우 감형을 받을 수 있다는 공문을 하달한 것이다. 그때부터 많은 무기징역수들이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무기징역수들이 유기징역으로 재판결을 받게 되었다. 원래 71년 전에는 무기징역수가 200여명이었으나, 74년에는 6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78년에는 단 2명만 남았는데, 그 중 한 명은 나였고, 다른 한 명은 자주 말썽을 피우는 죄수였다. 79년 이후 나와 그 죄수는 닝샤(寧夏) 인촨(銀川)의 중싱(中興)감옥으로 이송되어졌다. 그때 만약 내가 협의서를 상부에 보냈다면 나도 감형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버리지 않고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뜻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나는 예전대로 입을 열지 않았고, 혁명가도 부르지 않았고, 손을 올리지 않는 등 사상개조와 관련된 모든 것을 거절했다. 얼마 후부터 공산당의 정책이 보다 관대해졌다. 내가 일체의 타협을 하지 않았는데도, 81년 상벌(賞罰)회의가 열렸을 때 감형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갔다. 법원의 판결문에는, 내가 뜻을 바꾸었기 때문에 감형을 했고, 그 결과 무기징역에서 6년의 유기징역으로 형량이 줄어들었다고 쓰여 있었다. 

선택

당시 내가 그 판결문을 받았을 때, 내 기분은 지난날 무기징역 판결문을 받았을 때와 같지 않았다. 그 때는 오히려 너무나 즐거웠지만, 이번에는 판결문 위쪽에 불쾌한 글이 쓰여 있었기 때문에 즐겁지 않았다. 형법 71조 규정에 근거한다면, 감형은 반드시 확실한 회심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내가 감형을 받아들인다면, 곧 나의 회심의 승인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지난날 예수님이 나를 불러 명하신 그 모든 일들이 죄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판결문을 받은 그날 오후에 바로, 이 판결문을 법원에 철회한다는 문서를 작성하였다. 즉 나는 회심한 적도 없고, 회심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일을 잘못 처리했다는 것을 알린 것이었다. 그러나 법원은 나의 상소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감옥의 최고 책임자는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당신이 회심을 하든 안 하든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오. 우리는 법을 집행하는 기관일 따름이오. 그래서 당신이 언제 나가야 하는지를 법원에서 판결해 주면, 우리는 곧 그 날 당신을 내보내면 그만이오. 당신 일에 참견할 바가 아니오.”

만약에 정말 이와 같다면, 나는 감옥에 계속 머물고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 때 마침 감옥에서 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유기징역수가 복역 기한을 끝마쳤는데도 출소하려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볼 면목이 없고, 둘째, 감옥에는 음식과 옷이 있고, 게다가 두 달에 한 번씩 목욕도 하고, 영화도 보고, 명절 때는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는데 출소하면 이런 것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출소해야 하는 날, 간수가 그에게 나가라고 하는데도 나가지 않고 아예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간수가 그를 아무리 끌어내려 해도 불가능하자, 곧 7~8명의 무장 경찰을 동원하여 밖으로 내쫓았다.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다시금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법원이 허위로 나의 회심을 조작했기에 내가 거절했으나, 감옥은 나를 밖으로 내쫓으려 했고 나는 이것을 뿌리칠 수 없었다. 

감옥 밖의 죄수

예수님은 나로 하여금 감옥에서 6년을 기다리면서 천천히 예수님의 뜻을 깨닫게 하셨다. 출소 후 공민증을 받았기 때문에 남방으로 갈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내게 두 가지 생각을 주셨다. 하나는 인촨을 떠나지 말고 계속해서 죄수의 위치에 있으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죄수는 감옥 안에 있는 죄수가 아니라 감옥 밖의 죄수로서, 사람들을 향해 내가 ‘변심’했기에 석방 되었다는 법원의 판결이 옳지 않으며 나는 여전히 나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손으로 기록할 필요도 없이, 단지 행동으로서 내가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의 삶과 행동을 통해 나는 곧 ‘죽을 때 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으로 남을 것이다.

구슬 | 이바포우(以巴弗)
정리 | 후신(湖心)
 

    인쇄하기   메일로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