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몽고의 징기스칸은 유목인을 일으키고 대정벌을 시작하여 금(金)과 하(夏)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러이아까지 침략하여 전후무후한 강대국을 건설하였다. 원 세조는 1260년 즉위하여 1271년 국호를 원(元)이라 칭하였다. 1279년 그는 남송(南宋)을 멸하고, 중국 전역을 통일하여,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족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당나리 무종의 탄압으로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경교(景敎)는 메소포타미아, 중앙아시아, 몽고 등 중국 변방 지역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몽고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경교가 다시 중국에 전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천주교도 전래하여, 원래에는 경교와 천주교가 함께 중국선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번 호에서는 원대의 경교와 천주교의 중국선교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경교의 중국 전래
시대적 배경
원의 종교 관용정책 : 몽고제국은 단시일 내에 유럽과 아시아에 걸치는 강대국을 건설하였기 때문에, 방대한 영토 안에 매우 복잡한 민족 형태를 구성하였다. 비록 몽고는 라마교를 국교로 신봉하고 있었지만, 제국의 정치와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각 민족의 종교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국 고유의 종교는 물론 외국에서 전래된 종교까지 자유롭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원의 통혼(通婚)정책 : 원은 방대한 국가를 건설하면서 종교관용 정책을 취할 뿐 아니라, 통혼 정책을 채택항 국내외의 안정과 지속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많은 변방국가의 색목인(色目人)들이 몽고족과의 결혼관계를 통해 원의 지배계층으로 군림하게 되었고, 이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변방에서 활동하던 경교도 함께 전래되었다.
징기스칸의 아들 타뢰(拖雷)는 몽고 북부의 유목 민족인 케라트(Kerart, 剋烈)족의 공주 사로화첩니(唆魯禾帖尼)와 결혼하였는데, 이 공주는 독실한 경교 신자로, 후에 헌종(憲宗)이 된 몽가(蒙哥), 세조가 된 홀필열(忽必烈)과 욱열원(旭烈元)의 어머니가 되었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 케라트족 경교도들은 상당한 세력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명한 신하 진해(鎭海)도 케라트족의 경교도였고, 그이 아들 셋도 모두 경교인이었다.
헌종은 비록 라마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독실한 경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경교 신자인 발랄해(钵剌海)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궁궐 부근에 사원과 십자가 제단을 설치하는 등 경교에 대하여 매우 우호적이었다. 원 세조 홀필열도 라마교를 신봉하였지만, 경교에 대하여 결코 소홀하지 않아서 "숭복사(崇福司)"를 설치하여 경교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또 그는 궁전에 3만 명의 근위대는 모두 경교를 신봉하는 아란(阿蘭, Alains)인 중에서 선발하였다.
원의 대 중국 지배정책 : 남송을 멸하고 중국 전역을 통일한 원 세조는 민족 차별정책을 실시하여, 몽고인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이민족 지배 체제를 형성하였다. 그는 전 국민을 아래와 같이 네 계급으로 나누어 통치에 편의를 구하였다.
• 몽고인 : 일명 국인(國人)으로, 중앙과 지방의 최고 지배 계층
• 색목인 : 일명 제국인(諸國人)으로, 서역을 포함하여 모두 30여족에 달하였다. 이들
몽고인을 보좌하며, 지배계층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 한족(漢族) : 황하 유역의 중국인으로 원래 금(金)의 통치를 받았었다.
• 남인(南人) : 남송의 지배하에 있던 중국인으로, 양자강 유역과 그 이남의 중국인을 가리킨다. 한족 과 남인 모두 피지배 계층이다.
원의 사회제도 : 중국의 역사가 전목(錢穆)은 몽고의 중국 통치는 마치 고대의 봉건귀족 시대를 방불케 한다고 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는 귀족의 높은 문화적 수양이 있었지만,몽고족은 문화적 수양이 없고 다만 무력에 의한 진압과 재산의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정신적 생활의 도야가 매우 부족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종교적 신앙이 그들의 유일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게 되었다. 원나라 당시 승려의 사회적 지위가 그 어느 시대에 비해서 높았던 것은 이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몽고어를 창조한 팔사파(八思巴)는 국사(國師)로서 그 지위가 상당히 높아서 세조는 그를 대보법왕(大寶法王)이라 존칭하였다. 그 뿐 아니라 몽고의 사회 제도를 보아도 승려의 지위가 매우 높은 것을 볼 수 있다. 원대에는 사회 계층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1.官 2.史 3.僧 4.道 5.醫 6.工 7.獵 8.民 9.儒 10.乞 등이다. 종교 지도자인 승려와 도사 계층이 관리층과 함께 구족 계급에 속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고의 명칭
원대의 경교는 "야리가온(也里可溫)"이라 불리었다. 이는 몽고어 "Arkaun"의 음역인데, 복 받은 사람(福分人), 선택된 신도들의 무리(徒衆), 하나님의 자녀(上帝之子)라는 뜻이다(이 글에서는 경교를 야리가온이라 지칭한다.)
야리가온의 발전
몽고의 정치적 비호 아래 원대의 야리가온은 신속하게 전파되어서, 한때는 당대에 못지 않게 부흥하여 전국 각지에 널리 분포되었다고 한다. 원대 야리가온 발전의 모습을 몇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 원통제(元通製)의 조격승(條格僧)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也里可溫犯的勾當多有, 便有一百個官人, 也官不得,這事斷難行." 즉 야리가온 신도의 범죄행위가 너무 많아서, 백 명의 관리가 관리해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신도 수가 많다 보면 문제 있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은 어느 시대든지 소수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것을 보면, 당시 경교도의 발전이 어느 정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원 세조는 중앙 정부의 전문적인 기관을 설치하여 각 종교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선정원(宣政院)은 불교를 관리하고, 집현원(集賢院)은 도교를 관리하며, 승복사(崇福司)는 경교를 관리하였다. 이러한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야리가온은 원의 3대 종교 중 하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원대 「진강지(鎭江誌)」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3,845호(戶)중에 23호가 야리가온 신도였고, 총인구10,555명중에 야리가온 신도가 106명이었다. 그리고 2,948명의 독신 인구 가운데 109명이 야리가온 신도였다. 젋은층에 신도 수가 많았던 것을 볼 수 있다. 진강현 지역 일대만 보면 평균 167호 가운데 한 호가, 또 63명 가운데 한 사람이 야리가온 신도였던 것을 알 수있다. 「원사(元史)」에 의하면 야리가온 신도 중에 효자, 의사, 학자, 의인(義人)등의 이름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유명한 문학가인 마조상(馬祖常)은 대대로 야리가온을 신봉한 원대의 권세가였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비롯하여 기타 고전문헌을 통하여 보면, 숙주성(肅州省), 감주성(甘州城), 량주성(凉州省), 서녕주(西寧州), 녕하(寧夏), 천덕군대성(天悳軍大省), 선덕주성(宣悳州城), 경조부대성(京兆府大城), 한중성(漢中省), 운남성(雲南省), 진강부성(鎭江府城), 항주성(杭州城)과 복주성(福州城)등에 야리가온의 교당과 신도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야리가온의 활동 무대가 중국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야리가온의 쇠퇴
이토록 원나라 전역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야리가온도 몽고의 멸망으로 중국에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야리가온의 쇠퇴에 관하여 중국 기독교사 연구가 양삼부(楊森富)는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 원의 멸망과 더불러 경교를 신봉하는 색목인들도 몽고인들과 함께 중국에서의 정치 무대를 상실하여 자연적으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원 왕실은 비록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왕실에서 일부다처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교 제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 중원지역에 경교 회당에 관한 자료들이 고증되고 있지만, 그 신도들은 대부분 변방 민족, 즉 색목인 들과 외국 상인들이었다.
• 경교의 근거지인 페르시아는 중국과 거리가 상당히 멀었고, 또 중국에서 중국인 성직자들을 배양하 지 않고 페르시아만 의지하였기 때문에, 페르시아가 멸망한 다음 경교 성직자들이 부족하여 자연적 으로 쇠퇴하게 되었다.
• 왕고(汪古)의 추장인 활리길스(闊里吉斯)등 일부 경교 지도자들이 천주교에 귀의하여 경교의 쇠퇴를 가속하였다.
천주교의 중국 전래
시대적 배경
몽고가 중국을 침략할 당시는 유럽에서도 마침 대변동이 발생하였던 시기였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면서 문화와 상업 등의 신속한 번영이 이루어졌고, 많은 상인들과 동방과의 무역이 빈번하여지고, 이에 따라 로마 천주교도 동방에 대한 선교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로마 천주교에는 두 개의 신흥 선교단체, 즉 프란시스칸(Franciscus)과 도미니칸(Dominicus)이 조직되어 세계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몽고가 수 차례에 걸쳐 아시아와 유럽을 향해 징벌을 강행할 때, 유럽인들은 이에 대해 상당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로마 천주교는 십자군을 파송하여 이슬람교도와 종교 전쟁을 강행하고 있던 시기여서, 몽고와 연합하여 이슬람교도들을 섬멸하고 또 몽고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여 몽고의 위협을 피하고자 하였다. 또 풍문에 의하면 징기스칸은 기독교인이며 그의 이름이 "다웟(大維悳, David)"이라고 전해져서, 교황과 로마 천주교도들이 원나라에 대하여 상당한 기대를 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교황 이노센트 4세는 프란시스칸 소속인 가르피노((Ginvanni da Piano di Carpine)를 특사로 임명, 몽고로 파송하였다. 이로써 로마 천주교와 중국이 처음으로 정식 접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246년 7월 가르피노는 정종(定宗)을 알현하고 교화의 서신을 전하였다. 그 주요한 내용은 "勸其勿嗜殺戮, 竝皈基督敎" 즉 살육을 삼가고 기독교에 귀의하도록 충고한다는 것이다. 가르피노는 이듬해 프랑스로 돌아가 교황을 알현하고 정종의 서신을 전하였다. 원 세조도 마르코폴로의 부친과 숙부를 교황에게 파송하여 과학자와 종교인사 백 명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전쟁으로 인해 실행을 못하고, 마르코폴로 부자만이 몽고에 돌아오게 되었다. 마르코폴로는 중국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세조를 도왔을 뿐 아니라, 중국 전역을 유람하고 후에 유럽에 돌아가 「동방견문록」을 출판하여 서방인들에게 동방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었다.
천주교의 발전
가르피노 이후에 교황은 수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사신과 선교사들을 파견하였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294년, 요한 몽테코르비노(John of Montecorvino)가 교황 니콜라스 4세(Nicholas Ⅳ)의 파견을 받고 원나라에 와서 선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중국에서의 본격적인 천주교 역사가 시작되었다.
몽테코르비노는1328년 북경에서 생애를 마칠 때까지 모두 34년을 중국선교에 헌신하여 눈부신 업적을 이루었다. 요한 몽테코르비노가 원에 왔을 때, 성종(成宗)은 그를 매우 환영하며 예우하였기 때문에 그는 쉽게 고위층과 접촉하며 선교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정교 신자인 고당왕(高唐王)활리길스(闊里吉斯)를 천주교로 개종하게 하였다. 고당왕은 이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선교사의 이름과 같이 요한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고당왕의 요청으로 몽테코르비노는 신약성경과 구약의 시편, 그리고 천주교의 예절과 기도문 등을 몽고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수도 베이징에 세 개의 예배당을 세우고 성가대를 조직하는 등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왕궁에서도 항상 찬양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교인 수도 급속히 증가하여 3만여 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당시 천주교의 선교가 매우 성공적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몽테코르비노의 이와 같은 선교 업적의 소식이 로마 교황에까지 전달되자, 교황은 그를 베이징 총주교로 임명하여 동방의 모든 교회를 담당 관리하도록 하고, 일곱 명의 부주교를 파송하여 몽테코르비노를 도와 계속 선교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중 세 명은 인도에서 죽고, 한 명은 트리에스테(Trieste)의 주교로 남아서, 겨우 세 명만 1313년에 중국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페루기아(貝魯日亞, Andrea da Perugia), 알부니(阿布意尼, Gerado Albuini)와 카스텔로(加斯 勞, Peregrino da Castello)등인데, 알부니는 새로 설치한 취엔저우(泉州)교구의 주교로 임명하고, 그 외 두 사람은 베이징에 체류하면서 몽테코르비노를 도왔다. 그들은 또한 취엔저우 교구 이외에 저장(浙江), 항저우(抗州), 장쑤(江蘇)와 양저우(敭州)등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원대의 천주교 활동이 매우 활발히 전개되어 가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계속 발전하지 못하고 머지 않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주요한 이유는 후에 중국에 온 세명의 선교사가 질병으로 차례로 세상을 떠났고, 1328년 몽테코르비노 마저 80여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중국 천주교는 위대한 영도자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그이 장례식에 신도들은 물론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대다수가 참석하였다고 하니, 그이 평소의 덕망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34년 동안 원에 머물면서 이룩한 선교 업적과 정신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사망한 후, 교황은 파리대학 신학교수 니콜라스(尼哥拉可, Nicholas)를 파송하였지만 가는 도중에 사망하여 부임조차 못하였다. 몽고 황제는 사신과 15개 교회의 대표들을 파송하여 후임자를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황제의 서신에 아래와 같이 요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自約翰死後, 中國敎會缺小了一個精神上的領䄂, 需要派一個繼續的人" 즉, 요한이 죽은 후에 중국은 정신적 영도자를 상실하였으므로 그를 계승할 만한 지도자의 파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몽고 황실의 진실한 태도가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교황은 마리그노리(馬利諾利, John of Marignolli)를 파송하였다. 1342년 마리그노리는 몽고 황제 순종(順宗)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베이징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몽고 정치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 오래지 않아 큰 재난이 이를 것을 예측하여, 부임한지 겨우 3년만인 1345년에 몽고 황제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교황은 세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지만 모두 임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실종되어 버렸다.
천주교의 쇠퇴
천주교도 경교와 마찬가지로 원의 멸망과 더불어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서 중국 역사상 두 번째로 전래 되었던 기독교가 다시 한번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원인을 몇 가지 측면에서 검토해 보도록 한다.
• 원나라는 건국한지 109년 만에 멸망하고 몽고인들은 다시 몽고로 쫓겨갔다. 또한 몽고인들이 점령하 던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슬람 교도들이 장악하여 동서교통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서 교황이 파송한 선교사들은 원에 도달하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많이 희생되었다.
• 원나라의 천주교 신도가 3만여 명이 되었다고 하지만, 신도들은 대부분 몽고인과 색목인들이었다. 피지배 계급인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천주교에 귀의한 자료들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다.
• 원대의 천주교도 야리가온과 마찬가지로 현지인 성직자를 배양하지 않고 사방교회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교통의 단절된 후 지도자의 부족한 현상을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 몽테코르비노와 같은 선교 사명에 투철한 성직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도 천주교가 계속 존재하지 못 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선교사역은 많은 도전과 시련, 심지어는 죽음도 불사하는 굳건 한 사명의식이 무엇보다도 필요로 한다. 예수님과 바울은 선교사으 좋은 본이라고 볼 수 있다. 몽테 코르비노 이후에 그와 같은 선교사가 나타나지 않아 천주교의 선교사역은 단명으로 그치게 되었다.
결론
이상에서 원대의 경교와 천주교의 선교역사를 간단히 정의하면서 오늘날 중국선교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한국교회에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선교와 정치와의 관계
원대의 기독교가 단명한 가장 큰 원인은 선교사들이 지배층과 너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일반 민중사회에는 복음이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타문화권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어쩌면 현지 집권자들의 지지와 협조를 매우 필요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변화가 심하여, 이것만을 의지할 경우 쉽게 정치의 회오리에 휩쓸리기 쉬울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어용 종교가 되기 쉽다.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고,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는 선교는 어느 시대에도 필요한 것 같다.
선교사의 자질
오늘날 한국 교회는 수많은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견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며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원대의 천주교 선교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진정한 선교의 업적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다수의 선교사라기보다는 몽테코르비노 한 사람이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선교의 진정한 사명과 부르심에 확실하고 충성된 한 사람이 왕왕 다수를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교회는 주보에 선교사의 수를 많이 열거하는 데 주로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 주보에 열거된 선교사들의 숫자만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몽테코르비노와 같이 충성된 종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지인 배양문제
원대의 경교와 천주교 모두 현지 성직자들을 배양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선교활동을 단명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였다. 다행히도 근대 선교역사에서 현지인 신학 교육은 선교 활동 중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특히 종교를 아직까지 개방하지 않고 있는 공산 국가나 이슬람 국가들에 있어서 현지인을 통한 선교는 더욱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교파 간의 협조문제
원에서는 당과는 달리 경교와 천주교가 동시에 활동하였다. 지난 호에서 본 것처럼 경교는 이단 취급을 받고 천주교에서 쫓겨난 비정통 기독교였다. 이들이 근 천년이 지난 후에 몽고에서 만났지만, 과거의 아픈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양들을 탈취하며 시기와 질투와 불필요한 경쟁을 일삼아 선교활동에 가장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은 오늘날 많은 교파들이 난립한 환경에서 선교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참고가 되고 있다.
강인규/ 타이완 중위안대학(中原大學)교수•중국교회사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