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분류보기 > 전체보기 
북쇼핑
2001.6.20  통권 70호  필자 : 전순동  |  조회 : 7559   프린트   이메일 
[중국사의 한 장면]
“채륜의 제지법은 인류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옛날 인간은 돌, 나무, 동물의 가죽과 뼈, 점토판, 옷감등 다양한 재료에 기록을 남겼다. 기원전 3000년 경, 이집트인들도 기록의 재료로서 나일강변의 파피루스를 이용하였는데 오늘날 종이라는 말의 어원은 이 파피루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파피루스 종이는 갈대 모양의 파피루스의 껍질을 벗긴 다음 내부의 하얀 심재를 얇게 갈라 접합시켜 만든 것으로 섬유질을 분산 접착시켜 만든 오늘날의 종이제법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이는 기원105년, 중국 후한시기에 채륜이 발명한 제지법에 의한 것이다. 

과거 서당에서 한문 입문서로 애용되던 천자문 가운데 ‘恬(편안 념)筆(붓필)倫(인륜 륜)紙(종이 지’라는 구절이 있다. “진나라의 몽념은 토끼털로 처음 붓을 만들었고 후한의 채륜은 처음 종이를 만들었다.”는 의미로서 채륜의 종이 발명을 상식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실로 종이의 발명은 문자, 인쇄의 발명과 함께 인류정신문화에 있어서 3대 발명이라 일컬어지며 이것은 또한 화약, 나침반, 인쇄술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 품 중의 하나로서 세계의 문화발전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은주시대에 거북의 등이나 짐승의 뼈에 글을 새긴 갑골문,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금석문이 있었다. 그 후 글씨 쓰는 재료로써 대쪽이나 나무 조각을 한 개 혹은 여러개를 연결해 철하여 사용하거나 비단을 이용하였다. 대나무를 이용한 것을 죽간, 나무를 이용한 것을 목독이라 하며 이것을 아울러 총칭하여 간독이라 한다. 그런데 간독이나 비단은 모두 불편함이 많았다. 간독은 지니고 다니는데 무게가 있어 불편하였고 비단은 비싸기 때문에 쉽게 사용하기 어려워 문화 전파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더욱이 역사나 경전을 중요시 하였던 한 대 유교 사회에서 기록하는 일이 더 많아지게 되자, 가볍고도 값이 싼 서사 재료의 출현은 시급한 문제로 대두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마침내 종이가 발명되었다.
  

종이(紙)는 붓(筆),묵(潶)벼루등과 함께 문방사우라 하여 지식을 존중하는 중국인들에게 귀중한 필기도구가 되었다. 이 중 가장 먼저 발명된 것이 붓이고, 그 뒤를 이어 먹, 벼루, 종이의 순으로 나타났다. 붓은 짐승의 털로 무엇인가를 찍어 묻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제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춘추시대에 들어서 아주 조잡한 형태의 붓이 처음 등장했고 이것이 진의 장군이었던 몽염에 의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형태로 개량되었다. 개량 직후 그을음을 이요아형 먹을 만들고 곧이어 돌을 깍아 벼루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것을 만드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종이는 가볍고 무엇보다도 글씨가 잘 써져야 했으므로 종이를 만들려면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해야만 했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는데 채륜이 제지의 방법을 자세히 관찰하고 연구한 끝에 마침내 글씨 쓰기에 적합한 종이를 만들어냈다.
 

종이를 발명한 채륜은 자가경중(敬仲)이고 계양 후난성 출신이다. 그는 성품이 정직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환관으로서 궁정 관리가 되어 국가 직영의 무기류 제조 공장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죽간이 너무 두껍고, 비단천은 너무 비싸며 마지는 글씨 쓰기에 불편함을 깨닫고 마지의 제조기술을 연구하여 글 쓰기에 적합한 종이를 창안해 내었다. 그는 마를 가늘게 부수고 강하게 입착하여 종전의 마지보다 훨씬 얇은 마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마의 섬유질이 완전히 분쇄되지 않고 마직용 마를 사용하다 보니 제조원가도 만만치 않았다.

채륜은 시험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마로 종이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섬유질 때문임을 알았다. 못 쓰는 헝겊, 못쓰게 된 어망, 나무껍질 등을 모아 물에 풀고 오물을 걸러낸 다음 절구로 분쇄하여 더 얇게 압착함으로써 상당히 개량된 종이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섬유질이 깨끗이 분쇄되지 않아 지면에 광택이 없고 글씨를 쓰기에 부작합했다. 이에 채륜은 원료에 부식성 물질과 석회를 첨가함으로써 입자가 가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종이를 만들어 내었다. 채륜의 계속된 갖가지 실험으로 마침내 글씨 쓰기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질 좋은 종이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가 후한 황제 흥원 원년이었다. 채륜은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후에 용정후로 봉해졌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그가 만든 종이를 채후지라 부르게 되었다.
 

 채륜이 사용한 제지방법은 그 후 더욱더 개발, 발전되었고, 종이의 품질도 갈수록 좋아졌다. 종이의 원료도 다양해져서 지역에 따라 등피, 대나무, 닥나무 등 지방 특산물이 고루 사용되었고 심지어 연해지역에서는 미역을 종이의 원료로 첨가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제지술의 발전은 붓, 먹 그리고 벼루의 수요를 증가시키는 동시에 문구류의 품질도 향상시켰다. 제지술의 개발로 글씨 쓰기가 편리해지자 지식은 널리 보급되고 또한 시인 묵객들이 늘어나면서 중국문화 발전에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특히 서화예술의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또한 문화가 발전하고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종이의 용도도 다양해져 주로 문서기록이나 그림에만 사용되던 종이가 포장이나 장식 등 다른 용도로도 널리 쓰이게 되어 일상생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다.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술은 외국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맨 처음 전파된 곳은 한국이다. 그것은 3~4세기 경으로 알려져 있는데,[중국조치기술성쇠사]에 의하면 372년경에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으로의 전파는 우리나라를 통해서였다. 백제의 왕인은 405년 논어,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하여 일본을 유교문화권에 들게 하였고 고구려의 고승 담징은 일본에 건너가 제지방법과 제묵방법을 전하여(610년) 일본 문화의 개척원조로 평가되고 있는데 특히 담징은 일본의 종이, 인쇄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유명하다.  

서방으로의 전파는 751년 ‘탈라스’ 전투가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서진 정책을 펴던 당나라는 고구려의 유민 고선지 장군을 보내어 서쪽 영토를 점령하였는데, 한편 토번(티벳)과 사라센제국이 서로 동맹을 맺어 동진하면서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고선지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제휴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서역 각국과사라센제국은 이에 맞서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의 대평원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막기 위하여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원정에 출전하였나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갈룩크가 배후에서 공격하여 오히려 당군은 패배하고 많은 장병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것이 유명한‘탈라스 전투’인데 이 때 잡힌 당나라의 포로 중에 제지공이 있어 제지법이 사라센으로 전파되었고 이것은 그후 서양으로 제지술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종이에 의하여 인류에게 많은 정신문명과 문화를 일으키게 한‘실크로드’는 이제‘페이퍼 로드’가 된 것이다.
 

사라센인들에게 전해진 제지법은 지중해 연안을 거처 12,13세기에 유럽으로 전파되어 그곳에서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에서는 14.15세기 르네상스 시기를 맞아 종이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고 구텐베르그가 금속활자 인쇄기의 발명과 종교개혁으로 종이의 수요는 더욱 증대되었다. 이로 인해 종이를 뜨는 기계 곧 초지기가 발명되고 여기에 부수되는 기계들이 연구 개발되어 제지산업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문화용지, 산업용지로써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계속하였다. 

손으로 만드는 종이제조법은 동양에서 서양으로 전파되었으나 이를 기계화 시킨 기계초지법은 거꾸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전수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손으로 만들어지던 초지방법이 1798년 프랑스의 루이로베르가 기계적 초지법으로 장망식 초지기를 발명하였고 영국의 갬블이 기계 전문가인 돈킨의 협력을 받아 1801년부터 3년에 걸쳐 로베르의 초지를 개량하여 1804년 영국 런던 근교에 세계 최초의 기계식 제지공장이 세워지고 첫 기계식 초지기를 완성시켜 운전에 성굥하여 실용화했다. 이처럼 채륜의 제지술의 발명은 비단 중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중요사건으로 인류의 지식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채륜이 세계 최초로 종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과연 채륜이 처음 종이를 발명한 것인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 즉 1937년 중국 신장성의 누란 유적지에서 전한 선제 시대로 추정되는 마제종이가 발견되었으며 또한 1957년 중국 샨시성 시안의 유적에서 전한 무제시대로 확인된 마섬유 종이가 발견됨으로써 적어도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기 200여 년 이전에 이미 종이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이는 문자가 쓰여 있지는 않고 마포와 함께 동경을 포장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판명되고 있으며 문자가 기록된 종이는 채륜이 출현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채륜은 종이의 발명자라기보다는 그 이전의 종이를 연구하여 기록할 수 있는 품질 좋은 종이로 개량, 완성하여 보급시킨 제지술의 개량자라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종이의 발명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채륜이 고안한 제지기술의 개량과 품질개선은 종이의 사용과 지식보급의 획기적인 공을 세웠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니 그의 영예는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종이의 보급과 개량은 글쓰기나 인쇄의 발전과 함께 ‘문자의 나라’인 중국 문화를 지탱하여왔음은 물론 타국의 정신문명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었다. 그래서인지 중국의 제지학회에서는 여전히 채륜을 종이의 발명자로 인정하고 있다. 

전순동 / 충북대 역사교육과 교수

    인쇄하기   메일로보내기